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69
469
문이 열리면서 천대업 의원이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별실로 들어서자 혼자 앉아 있던 박상빈 실장이 얼른 일어나 먼저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의원님.”
중후한 분위기가 풍기는 스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천대업 의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와 악수를 나눴다.
“만나자고 해서 오기는 했소만……. 시기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박상빈 실장이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직 상황이 다 정리된 것도 아닌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천대업 의원도 약간 수그러진 얼굴로 미리 방석을 깔아 둔 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박상빈 실장이 미리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으나 두 사람 다 먼저 손을 대지 않았다.
어색함이 감도는 방 안 공기에 박상빈 실장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애써 친숙함을 연출하며 먼저 말했다.
“일단 한잔 받으시지요.”
술이 들어가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으나 천대업 의원은 잔에 가득 따른 술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내려놓았다.
탁.
마치 경계선을 긋는 것처럼 냉정한 태도였다.
예의상 한 모금 정도는 입에 댈 법도 한데 그것조차 거부하는 것이 앞으로 천대업 의원이 할 말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걸 보며 내심 입맛을 다신 박상빈 실장은 상대를 달래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먼저 예상치 못한 불상사로 인해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된 점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회장님께서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대업 의원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김성균 사장은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그런 사고가 터진 거요?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아시오?”
“나름 철저히 대비를 했었는데 사고가 생겨서 저희도 참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래도 의원님께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 심려하시지 마십시오.”
천대업 의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선거 자금 마련에 차질이 발생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피해가 됐소.”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일 다시 약속한 돈을 건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오?”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박상빈 실장이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의원님께 거짓말을 해서 저희가 득이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흐음.”
일을 망친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선거 자금으로 쓸 100억을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더군다나 태일그룹하고는 용산 드림 타워 프로젝트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이권으로 엮여 있었기에, 그걸 무 자르듯이 끊어 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천대업 의원은 앞에 놔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거요.”
천대업 의원의 말에 박상빈 실장은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절대 심려를 끼쳐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소. 박 실장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한번 믿어 보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한 박상빈 실장은 옆에 놔둔 서류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준비한 겁니다.”
“뭘 이런 걸…….”
말과 달리 천대업 의원의 눈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10억입니다. 양도성예금증서(CD)라서 추적이 불가능하니 쓰시는 데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천대업 의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장은 힘들겠고 선거가 끝나면 조용히 식사나 한번 하자고 전해 주시오.”
“그러겠습니다.”
불편해질 뻔한 천대업 의원과의 관계가 잘 해결되자 박상빈 실장은 그때서야 마음을 놓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오후, 외출 준비를 마친 혁권은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손에 걸리는 머리카락이 제법 길게 자란지라 언제 한번 자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그림자처럼 기다리고 있던 하킴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주민 전용으로, 주차장까지 곧장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하자 그의 검은색 벤츠 승용차와 나란히 놓여 있는 밴 앞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백성균이고, 다른 둘은 부하로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는 임영식과 지병하였는데, 원래는 여기 있어야 할 녀석들이 아니라 혁권은 어쩐 일이냐는 시선을 던졌다.
“자, 보스 오셨다.”
얼어있는 두 사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백성균이 재촉했다.
“보, 보스!”
“감사합니다!”
밑도 끝도 없는 외침과 함께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모습에 혁권이 잠시 의아해했다.
그러다 곧 백성균을 통해 나눠 준 돈 때문인 것을 깨닫곤 그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말 하려고 나와 있었던 거야.”
“네, 네!”
마치 쌍둥이처럼 동시에 입을 열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혁권은 귀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보스한테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앞으로는 굳이 안 이래도 돼.”
혁권은 운동부 출신이라고 티를 내는 것처럼 짧게 깍은 머리통을 보면서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 열심히 하라고 준 것이니, 둘 다 지금처럼만 해.”
혁권이 벤츠 뒷좌석에 타고 백성균이 문을 닫아 주자 그제야 임영식과 지병하가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보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신입답게 기합이 팍 들어간 목소리가 조용한 지하 주차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백성균이 시끄럽다며 정강이를 퍽 차자 둘이 똑같이 어깨를 움찔거리는 게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을 남겨두고 밴과 함께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벤츠 승용차가 도로를 매끄럽게 달렸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혁권은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실시간 검색을 살펴봤다.
여전히 유명 아이돌 멤버의 필로폰 투약 사건이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고, 잠실에서 있었던 현금 탈취 기사는 스리슬쩍 다 내려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직 SNS 동영상은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다 보니까 거의 이슈가 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묻히는 분위기였다.
단 며칠 사이에 사건을 조작하고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는 모습에 혁권은 새삼 재벌인 태일그룹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비리를 감추려는 천대업 의원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어찌 됐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인터넷을 끄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함단한테서 전화가 왔다.
-부쿠레슈티 공항에 중고 737-880 여객기 4대가 도착했습니다.
“기체 상태는 어때?”
혁권의 물음에 함단이 바로 대답했다.
-정비를 잘해 놨는지 중고 치고는 아주 깨끗합니다. 앞으로 한 10년은 더 쓸 수 있을 정도로 엔진 상태도 좋고 말입니다.
“다행이군.”
매물로 나와 있는 중고 여객기 가운데 괜찮은 걸로만 골라서 보냈다고 하더니 역시 홍성완 지사장은 믿고 거래할 수가 있었다.
“서류 작업은 다 끝났겠지.”
-TAROM에서 이란항공Iran Air에 여객기를 판매하는 걸로 정리를 해 놨습니다.
“나머지 여객기들이 도착하면 바로 테헤란으로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순조롭게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거래를 다 끝내면 이런저런 경비를 제하고도 최소한 2천만 달러가 그의 손에 떨어질 걸로 예상됐다.
한화로 계산하면 무려 220억이 훌쩍 넘어가는 거금이었다.
이제 이런 큰돈이 들어와도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는 본인의 모습에 혁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 혁권이 탄 승용차는 시내에 위치한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사무실에 도착했다.
인수 이후로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도 있고 운영을 맡은 정동식 부장이 꼭 할 이야기가 있다는 연락에 시간을 내서 찾아온 거였다.
그사이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소현을 따라다니는 스태프 외에도 세 명의 직원을 더 채용했다.
그리고 흔히 축제 차량이라고 불리는 카니발 밴도 2대나 건물 앞 주차장에 떡하니 세워져 있어 제대로 된 연예 기획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다른 대형 기획사하고 비교하면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매니저도 제대로 없어 정동식 부장이 직접 운전까지 해야 됐던 것에 비하면 엄청 환경이 좋아진 거였다.
사무실로 올라가자 이제 제법 관리자 티가 나는 정동식 부장이 그를 반기면서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혁권이 상석에 앉고 정동식 부장도 그 옆에 자리를 잡자 김수나가 보고 있었던 것처럼 타이밍을 맞춰 차를 가지고 왔다.
“고마워요.”
가볍게 눈인사로 대답한 김수나가 허리를 숙이고 나갔다.
그러자 혁권이 한쪽 다리를 무릎에 올린 자세로 커피를 한 입 마시더니 이내 다시 내려놓으면서 정동식을 향해 말했다.
“직원들이 별로 안 보이는군.”
“다들 스케줄이 있어서 외부에 나가 있습니다.”
연예 기획사의 특성상 외근이 많아야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애초에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를 통해 돈을 벌 생각은 없었으나 그래도 적자만 내는 것보다 나름 수익을 올리는 것이 백번 나았다.
“급히 의논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뭐지?”
뒤로 몸을 살짝 기대면서 혁권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정동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사에 소속된 모델들을 다른 곳에서 빼내 가려 하고 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혁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델들을 빼 가려 한다고?”
“그렇습니다.”
모델계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소속 모델들 가운데 다른 회사에서 꼼수를 써 가면서 영입해 갈 사람은 없었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혹시 소현이…… 아니, 정소현을 노리는 거야?”
그러자 정동식이 얼른 한쪽 손을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소현 씨한테는 손을 뻗치지 않은 걸 확인했습니다.”
“흐음. 그래.”
소현이 소속사를 옮기면 기껏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를 인수한 것이 다 헛일이 되기에 내심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소현을 빼고 다른 모델들을 영입하려고 한다는 것에 짙은 의구심이 생겼다.
“근래에 나도 모르게 뜬 모델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를 했을 겁니다.”
“그럼 왜 우리 쪽 사람을 빼 가려고 하는 거지.”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정동식이 자기도 답답하다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서, 그딴 치졸한 짓거리를 벌이는 회사가 어디라고?”
“도도엔터테인먼트입니다.”
왠지 귀에 익은 이름에 미간을 좁힌 혁권은 이내 손주아가 소속된 연예 기획사라는 걸 떠올리곤 와락 인상을 구겼다.
“경고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갑자기 분위기가 무섭게 변한 혁권이 이를 부드득 갈자 정동식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짐작되시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혁권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예.”
뭔가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정동식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서도 골치 아픈 상황을 혁권이 정리해 준다니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