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90
690
비닐봉지를 열어 본 경비원은 족히 3짜는 넘어 보이는 고등어 세 마리가 얼음과 함께 들어 있는 걸 보고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거 전부 월척감 아닙니까.”
“뭐 이 정도야 보통이지요.”
원래 노린 참돔은 못 잡았지만 고등어는 꽤 큰 놈들로 건져 올려 조황이 나쁘지 않았던 김범수는, 말과 달리 낚시꾼 특유의 허세가 가득한 모습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맛이 나쁘지 않을 겁니다.”
“매번 이렇게 얻어 가기만 해서 어쩌죠.”
“이런 거 가지고 그래요. 그리고 집사람하고 둘뿐이라 다 먹지도 못해요.”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고등어보다는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존중을 해 주는 김범수의 태도가 경비원은 너무 고마웠다.
“그럼 수고하세요.”
“예. 들어가십시오.”
웃으면서 기분 좋게 아이스박스를 다시 어깨에 멘 김범수는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뒤에서 들리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저씨!”
뒤를 돌아보니 마르고 눈매가 옆으로 찢어진 중년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서서 경비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외출이라도 다녀왔는지 귀에는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를 달고 입술에는 붉은색 립스틱을 칠했다.
나이치고는 관리를 잘한 듯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떠오른 표정 탓인지 상당히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자를 본 경비원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신지······.”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가서 짐 좀 들어 줘요.”
“그게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워서······.”
“잠깐이면 되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목소리와 함께 여자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자 경비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여기 열쇠를 줄 테니까 집으로 가져다줘요.”
“······예.”
핸드백에서 자동차키를 꺼내 경비원한테 건네주던 여자는 비닐봉지에서 올라오는 생선 비린내에 코를 막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아우. 이게 다 무슨 냄새야.”
얼른 냄새가 나지 않게 비닐봉투 손잡이를 묶는 경비원을 보며 여자가 짜증을 냈다.
“아파트 격 떨어지게 이런 냄새를 풍기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관리소장한테 이야기를 해야지 안 되겠네.”
괜히 자신 때문에 경비원이 곤란해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김범수가 나서며 대신 해명을 해 줬다.
“거, 너무하시네. 제가 드린 거니까 그쯤 하세요.”
“아저씨는 누군데 끼어드는 거예요?”
눈을 흘기며 째려보는 모습에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서로 얼굴을 붉혀 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그는 애써 화를 참았다.
“이 아파트 주민입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진짜 여기 사는 거 맞아요?”
아래위로 훑어보며 꼬치꼬치 캐묻는 여자의 행동에 김범수는 짜증이 났지만 이왕 참는 거 조금 더 참기로 했다.
“이 동 2102호에 삽니다.”
콧잔등을 찡그리던 여자는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는 이죽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 그 개인택시 하신다는······.”
“맞습니다.”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택시 운전은 자신이 한평생을 해 온 일인 데다 단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여자를 마주 쳐다봤다.
그러자 여자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려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비원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고, 빨리 짐이나 갖다 줘요.”
“예, 사모님.”
경비실 창문 옆에 자동차 열쇠를 놔둔 여자는 현관 비밀 번호를 누르고는 그대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여자네.”
여자가 들어간 현관 자동문을 쳐다보면서 김범수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경비원이 가까이 다가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방금 그 여자가 경우가 없는 거죠. 나도 참 택시를 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겪어 봤지만 저런 진상은 또 처음이네요.”
김범수 역시 같은 아파트 입주민이었기에 경비원은 맞장구를 치진 못하고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자는 뭔데 저렇게 기세가 등등한 거예요?”
“······입주민 대표입니다.”
경비원은 창문 받침대에 올려진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관리소장도 눈치를 봐야 되는 처지라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저 같은 건 그날로 해고를 당할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를 들은 김범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그게 바로 현실이었다.
그 역시 지금이야 마음이 내킬 때만 택시 운전을 하며 편하게 지내고 있었으나, 아들인 혁권이 아니었다면 진상 손님을 만나도 생계를 위해 참고 핸들을 계속 잡아야 됐을 터였다.
그런 마음을 잘 알았기에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빨리 가 봐야 될 것 같아서 이만.”
“그러세요.”
“고등어는 잘 먹겠습니다.”
재차 고마움을 표시한 경비원은 고등어가 든 비닐봉지를 경비실 냉장고에 넣어 두고는 짐을 올려다 주기 위해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걸 보며 좋던 기분이 다 사라진 그는 무거운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덜컹.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저녁을 만들고 있었는지 아내인 박필순이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다녀왔어요.”
“응.”
아이스박스를 내려놓는 남편의 얼굴이 굳어 있는 걸 본 박필순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얼굴이 어두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별거 아냐.”
“뭔지 말해 봐요.”
함께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었기에 귀신같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박필순이 재촉하자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고기가 꽤 잡혀 가지고 올라오면서 경비 서시는 분한테 고등어 몇 마리를 줬거든.”
“그런데요?”
“아. 글쎄. 주민 대표라는 여자가 자기 개인 심부름을 시키면서 아파트 현관 앞에서 생선 비린내를 풍긴다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잖아.”
그러자 뭔 일인지 알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박필순이 말했다.
“원래 그런 여자니까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당신도 잘 아나 봐?”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지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얼마나 까칠하고 성격이 제멋대로인지 아파트 내에 소문이 자자하잖아요.”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그것도 감투랍시고 얼마나 일하는 사람들을 달달 볶는지 그 여자만 보면 모두 학을 뗄 정도라니까요.”
“아니, 그걸 알고도 주민 대표를 계속하게 놔두는 거야?”
“다들 그런 데는 크게 관심이 없잖아요.”
“이런 걸 보면 조금 오래되고 불편하기는 했어도 예전에 살던 아파트가 더 좋았던 것 같아.”
“혁권이가 들으면 서운해할 수도 있으니까 행여라도 애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도 그런 눈치는 있어.”
그녀는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면서 화제를 돌렸다.
“어머. 이게 다 고등어예요?”
“참돔은 안 잡히고 그거만 올라오더라고.”
“구이를 해 먹으면 맛있겠네. 아직 저녁 전이죠?”
“그래.”
“바로 차려 줄 테니까 먼저 씻어요.”
“알았어.”
아내가 생선을 냉장고에 넣어 두려고 아이스박스를 챙겨 부엌으로 들어가자 그도 찝찝한 마음을 털어 내고 욕실로 향했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가로등만 덩그러니 서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잔디가 깔린 한강 고수부지는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가끔씩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량 옆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넓고 안락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혁권은 살짝 열어 둔 차창 틈으로 하얀 연기가 빠져나가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몇 시야?”
그러자 언제나 그렀듯 그림자처럼 조수석에 있던 하킴이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면서 몸을 뒤로 돌렸다.
“12시 10분 전입니다.”
“이제 곧 도착하겠군.”
말을 끝내기 무섭게 환한 전조등 불빛과 함께 국산 중형 세단 한 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멈추어 섰다.
엔진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사람은 주한 이란 대사관 1등 서기관인 팔레였다.
백성균이 간단하게 몸수색을 하고는 그가 탄 승용차로 데려와 뒷좌석 차 문을 열어 줬다.
“어서 오시오.”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으로 만나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혁권은 팔레의 말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괜히 남들 시선에 띄어서 서로 좋을 것이 없으니, 괜찮소.”
“먼저 주문한 여객기와 부품 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일정대로 도착한 것에 본국에서 크게 만족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오.”
이란과 미국 양측이 사전에 조율을 끝내 놨기에 원래대로라면 계약이 끝난 이후 그가 할 일이 딱히 없었다.
하지만 핵 협정에 관련해 백악관과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위험을 느낀 혁권은 계약 상대인 델타 항공이 보유하고 있던 재고 부품과 예비 엔진으로 급히 물품을 대신 받아 왔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지 않고 몰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가 핵 협정을 전격적으로 파기하는 초강수를 뒀다.
동시에 그동안 중단됐던 미국의 대이란 경제 제재가 다시금 재개되면서 전략 물자 수출이 전면 금지됐다.
여객기와 관련 부품 들은 당연히 전략 물자로 포함됐기에 자칫 조금만 늦었다면 이란으로 반출하지 못할 뻔했다.
이란으로서는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미리 지급한 구매 대금도 날리고 꼭 필요한 여객기와 부품을 수입하지 못하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걸 막아 줬으니 고마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추가로 필요한 여객기 예비 엔진과 부품을 더 가져다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혁권은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렵겠소.”
“지난번 오더 가격에서 2배를 쳐 드리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시에라리온 철광산 지분을 매각해서 큰 수익을 거둬들인 데다 무엇보다 대 이란 경제 재제가 다시 재개된 상황에서 괜히 시범 케이스로 걸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일로 미국 정보기관들이 날 주시하고 있을 테니, 오더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소.”
재차 거절을 하자 팔레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존슨 씨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이거 아쉽군요.”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않겠소.”
단호한 태도에 팔레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대신 아직 재제 품목에 들어가지 않은 의약품은 가져다줄 수 있겠지요?”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팔레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가능할 것 같소.”
“모두 600만 달러어치입니다. 자세한 품목과 수량은 여기 적어 뒀습니다.”
상대가 건넨 쪽지를 펼치자 각종 약품과 의약기구 목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오더를 무사히 잘 끝낸 것에 대한 본국의 보답입니다.”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팔레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한 달 안까지 부셰르Bushehr 항구로 화물을 가져다주면 되고, 대금은 내일 전액 다 먼저 입금될 겁니다.”
“알겠소.”
“그럼 다음에 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용건을 모두 끝낸 팔레는 살짝 머리를 까딱이고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