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84
784
#희생
시리아-이라크 국경 부근 유프라테스 중류 계곡.
황량한 암석 지대에 위치한 메마른 골짜기 안으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낡은 도요다 픽업 트럭 한 대가 들어섰다.
한참을 더 달려간 픽업트럭은 갑자기 폭이 확 넓어지는 장소가 나오자 왼편 바위 그늘 밑으로 가서 멈춰 섰다.
카키색 군복에 잡초처럼 턱수염이 잔뜩 난 사내가 조수석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계곡 안에는 사내와 마찬가지로 군복을 입은 무리가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한쪽에서 나무로 된 탄약 상자를 싣고 있는 군용 트럭 짐칸에는 IS를 상징하는 검은색 깃발이 걸려 있어 이들의 정체를 말해 줬다.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긴 사내는 위장막으로 입구를 가려 둔 동굴로 들어갔다.
입구에 이라크군한테서 노획한 K2자동소총을 든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지만 얼굴을 확인하곤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동굴 안은 상당히 넓고 깊었는데 군데군데 조명 기구를 설치하고 발전기를 돌려 전혀 어둡지 않고 밝았다.
무기와 각종 보급품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한쪽 구석에는 통신 장비까지 갖춰진 이곳은, 동맹군의 공격에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한 가운데 아직 살아남은 몇 개 안 되는 IS의 비밀 거점 중 하나였다.
사내는 터번 모양의 머리에 쓰는 천인 케피에Keffiyeh를 한 중년인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 계셨군요.”
눈빛이 날카로운 중년인은 사내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볼에 입술을 세 번 맞췄다.
“라크딤, 자네가 있던 마을에 양키 놈들이 무인기 폭격을 했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무사했군.”
“간발의 차이로 폭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알라께서 도우셨군.”
중년인의 정체는 IS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인 탈레브였다.
CIA와 인터폴(ICPO)의 A급 수배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위험인물로 유전 지대인 모슬에 이어 수도인 락까Raqqa마저 함락되며 점령지가 축소되자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미국을 비롯한 동맹군을 상대로 항전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었다.
라크딤은 무거운 탄약 상자를 바깥으로 옮기고 있는 전사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선으로 물자를 이동시키는 겁니까?”
그러자 탈레브가 얼굴을 살짝 굳히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남부 반군을 정리한 시리아 정부군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곧 이리로 공격해 올 거라는 첩보가 있어서 급히 방어선을 강화시키는 중이네.”
“그렇군요.”
쿠르드족으로 이루어진 인민수비대(YPG)와 이라크 정부군에 이어서 그동안 다른 반군하고 싸우는 데 집중하던 시리아 정부군까지 총부리를 이리로 돌린다면, 가뜩이나 세력이 크게 쪼그라든 IS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진 가운데 탈레브가 라크딤을 보며 말했다.
“알 살라위 소식은 알아냈나?”
“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살당해 카타르에 있는 알 우데이드 공군기지에서 화장됐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탈레브는 눈썹을 사납게 치켜 올리고는 부득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CIA 놈들이 파 놓은 함정이었던 거야.”
“압류하려던 유력자들의 숨겨 둔 비자금이 모두 국외로 반출된 걸 알고 빈 살만 왕세자가 크게 화를 냈다는 걸 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뭐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묻자 라크딤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습격을 했다가 거꾸로 당한 모양입니다.”
탈레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도살자라고 불리며 상대편에게 공포를 줬던 거물급 간부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전사였던 알 살라위가 그렇게 가다니······.”
고개를 든 탈레브는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 살라위를 죽인 놈이 누군가?”
“존슨이라는 자입니다.”
“존슨?”
시선을 받은 라크딤이 얼른 알기 쉽도록 설명했다.
“이쪽 바닥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거물로 이번에 리야드에서 비자금을 빼내 사우디아라비아 밖으로 가져간 놈입니다.”
“그딴 버러지한테 알라의 용맹한 전사가 쓰러지다니 정말 치욕스러운 일이야.”
입술을 비틀어 올리면서 차갑게 말을 내뱉은 탈레브는 앞에 있는 라크딤을 봤다.
“라크딤.”
“말씀하십시오.”
“알 살라위의 명예가 이대로 더럽혀지는 걸 그냥 놔둬서는 안 되지 않겠나?”
말뜻을 알아차린 라크딤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놈을 지옥으로 보내 주도록 하겠습니다.”
걸을 때마다 캉캉 소리가 울리는 낡은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제공되는 기숙사는, 지은 지 20년은 족히 넘었을 오래된 건물이었다.
외벽에 칠한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성한 곳을 찾기 어려웠고, 난간이나 창문틀엔 누런 녹이 슬었다.
다들 잠시 동안만 머물다 갈 곳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 건물 근처에만 다가가도 온갖 냄새가 범벅된 구린내가 풍기는 바람에 기숙사에 사는 사람 말고는 한낮에도 행인을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어학연수 비자로 들어왔다가 3년째 불법체류 중인 사내는 이미 그런 환경에 익숙해진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을 올라 4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방들도 마찬가지지만 한 사람이 살면 딱 좋을 좁은 공간에 억지로 2층 침대를 두 개나 우겨 넣은 탓에 발을 디딜 자리도 찾기 힘들었다.
사내는 먼저 와서 쉬고 있는 같은 방 사람들에게 눈만 살짝 까딱여 보인 다음 제 자리인 왼쪽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그는 다른 이들이 텔레비전에서 중계 중인 축구 경기에 정신이 팔려 이쪽으론 신경도 안 쓰는 것을 확인하고 스냅챗 어플을 켰다.
새 메시지 알림이 떠 있는 것을 본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더니, 이내 반사적으로 다시 주변을 살피곤 무릎을 세워 웅크린 자세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너 줄밖에 안 되는 짤막한 문장이었으나 사내는 통째로 외워 버릴 기세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스냅챗에 올라오는 메시지는 10초 안에 자동으로 삭제되므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터였다.
재빠르게 메시지를 읽은 사내가 밑의 링크를 클릭하자 젊은 동양인 사내의 얼굴 사진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사진에 찍힌 인물은 바로 혁권이었는데 간략한 인적 사항이 함께 나와 있었다.
사내는 발음하기 힘든 한국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이면서 자신에게 내려진 중요한 지령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겼다.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Tel Aviv.
저격과 도청 위험을 막기 위해 창문 하나 없는 방 안 소파에 스텔마치 모사드 국장이 앉아 중동 담당 책임자인 오페르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스텔마치 국장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고는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IS 놈들이 테러 지령을 내린 것이 포착됐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저희 시진트SIGINT 망에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됐습니다.”
Signal Intelligence을 줄인 약자인 시진트는 인공위성을 비롯한 기타 최첨단 장비를 이용해서 이상 신호를 감지하는 걸 말했는데, 인터넷과 SNS 등이 주 감시 대상이었다.
점령지가 축소되면서 예전의 위세를 거의 잃어버린 IS는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세포 조직을 이용한 무차별적인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기에, 각국 정보기관들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테러의 대상이 될 위험이 컸기에 모사드는 모든 정보 자산을 동원해서 IS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목표로 하는 대상이 어디야?”
“아직 정확한 건 아니지만 뜻밖의 인물입니다.”
“누군데 그래?”
“존슨입니다.”
스텔마치 국장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미간을 찡그렸다.
“우릴 두 번이나 물 먹인 그 존슨을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것 참 공교롭게 되었군.”
말과는 달리 재밌다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며 그가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갑자기 IS에서 놈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가 뭐야?”
“얼마 전에 IS 간부 중 하나인 알 살라위가 죽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모사드 역시 감시 대상에 올려놓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죽음을 가장 빨리 인지하고 정황 역시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 살라위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눈을 반짝이면서 스텔마치 국장이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일에 존슨이 연관되어 있다고 했지?”
“맞습니다. CIA하고 함께 작전을 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CIA 이야기가 나오자 스텔마치 국장은 콧방귀를 뀌면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존슨 그놈하고 여기저기 안 쑤시고 다니는 곳이 없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양해도 받지 않고 영토 내에서 작전을 벌인 것 때문에 빈 살만 왕세자가 크게 화를 냈다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은 스텔마치 국장은 잠시 아무런 말없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오페르를 봤다.
“CIA에서는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건가?”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세계 최대 정보기관이라 자처하는 CIA가 모사드도 파악한 일을 모른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었지만, 원래 덩치가 클수록 틈이 많은 법이었다.
스파이를 활용하는 휴민트HUMINT와 시진트를 한곳에서 관리하는 모사드하고 달리 미국은 통신과 인터넷망을 관리하는 정보기관을 따로 두고 있었는데, 바로 내부 폭로로 존재가 드러난 일명 빅브라더Big Brother의 대명사인 NSA(National Security Agency)였다.
CIA와 함께 미국 첩보공작의 양대 주축으로 두 기관이 함께 시너지를 내주길 원했지만 결과는 완전 반대였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고 견제를 하는 바람에 기본적인 정보 공유조차 잘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때문에 정보를 먼저 탐지하고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가능성이 컸다.
오페르가 슬쩍 스텔마치 국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
“CIA에 경고를 해 줄까요?”
그러자 스텔마치 국장이 어느새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입을 열었다.
“그냥 내버려 둬.”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나중에 이걸 가지고 CIA 쪽에서 항의라도 한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해질 텐데요.”
우려 섞인 시선에 상관없다는 듯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제 놈들도 모든 걸 다 알려 주는 것이 아닌데 우리만 왜 그래야 해? 그리고 이미 상황이 다 벌어진 뒤일 텐데 몰랐다고 잡아떼면 어쩔 거야?”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CIA 때문에 더 이상 복수에 나서진 못하지만 혁권이 두 번이나 모사드를 망신 주고 소중한 요원들을 잃게 만든 걸 그는 잊지 않았다.
느긋한 태도로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댄 스텔마치 국장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