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91
991
#악연
애마인 국산 중형 세단에서 내린 심인성 과장은 지하라 더욱 싸늘한 기운에 코트 옷깃을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 전쟁터가 따로 없군.”
입에서 저절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총알 자국이 가득했으며 이리저리 튄 탄피와 허옇게 떨어져 내린 페인트 가루들 때문에 지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들 중 멀쩡하게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개중엔 나름대로 비싼 차도 있었는데 깨진 유리가 가죽 시트에 어지러이 널려 있고 총에 맞았는지 백미러 하나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채로 보닛 부분이 박살이 나 있으니, 수리를 해도 제대로 굴러가긴 어렵겠다 싶었다.
심인성 과장은 먼저 도착해 현장 사진을 찍고 있는 과학수사대 대원들과 시신을 수습하느라 천으로 덮은 들것을 막 구급차에 싣고 있는 사람들을 쭉 눈에 담은 뒤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심복인 최기혁이 그를 발견하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쳐 놓은 폴리스 라인을 들추고 나와 앞으로 다가왔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아주 개판이군.”
“일단 현장을 통제하고 각 언론사에는 엠바고 요청을 해 뒀습니다.”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최기혁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심인성 과장은 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말을 이었다.
“예전하고 달리 말발이 잘 안 먹힐 텐데 통제에 잘 따라 줄지 모르겠군.”
“3차장님이 직접 언론사 데스크에 전화를 돌리셨다고 하니까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눈썹을 찡그리며 최기혁을 쳐다봤다.
“벌써 거기까지 보고가 올라간 거야?”
“예.”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고 최기혁이 바짝 긴장한 채 눈치를 살폈다.
짜증이 났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총격 사건 이후로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를 올리라고 3차장이 지시를 내렸기에 최기혁을 탓할 수는 없었다.
“조금 있으면 원장님도 아시게 되겠군.”
“죄송합니다.”
“됐어, 네 잘못도 아닌데.”
심인성은 담배 필터 부분을 질겅거리며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3차장님이 나서 준 덕분에 엠바고는 확실히 지켜지겠군.”
그나마 다행이라는 투였으나 최기혁의 얼굴엔 더욱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저, 그게······.”
예상과 다른 반응에 심인성이 왜 그러냐는 듯이 눈썹을 슥 치켜 올렸다.
“뭔데? 말해 봐.”
우물쭈물 분위기를 살피던 최기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언론 쪽은 틀어막았지만 인터넷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빠르게 퍼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늦은 밤이라고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곳이 병원이다 보니 입원한 환자와 근무 중이던 병원 직원들이 다수 있었는데, 이들이 SNS에 글을 적어서 올린 모양입니다.”
“당장 몽땅 다 내리라고 해.”
그러자 최기혁은 난감한 표정으로 심인성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전화를 돌려 지워 달라고 했는데 이미 여러 사람이 퍼 간 데다 각종 커뮤니티에도 번져서 전부 다 단속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심인성은 끄응, 하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인터넷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일을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입장에선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회사에 인터넷 담당하는 애들이 있잖아. 그쪽엔 물어봤어?”
“검색 프로그램을 돌려서 최대한 잡히는 족족 삭제해 달라고 이미 전달해 놓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흔적을 다 지우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거기다가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같은 해외 SNS들은 저희가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정보가 퍼지는 걸 막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특종에 목을 매는 언론사들의 특성상 아무리 3차장이 단속을 했어도 엠바고가 깨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봐야 했다.
“휴우. 어쨌든 최대한 막아 보라고 해.”
“예.”
대답을 들으면서도 심인성 과장은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 세계에 인터넷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시대에 그걸 통제하는 건 CIA라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혹시 몰라 혁권한테 꼬리를 붙여 둔 덕분에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수습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번 것이 다행이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심인성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최기혁에게 시선을 줬다.
“김 사장은 어떻게 됐어?”
“오른쪽 가슴과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현재 수술 중입니다.”
“많이 위독한 거야.”
“총탄이 심장과 장기를 건드리지 않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운이 좋군.”
아무리 위력이 약한 권총이라고 해도 지근거리에서 총탄을 그것도 두 발이나 맞고 살아 있는 건 심인성 과장의 말대로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참. 병원에 김 사장의 애인도 함께 있다고 그랬지?”
“예. 다른 사고로 크게 부상을 당해 이리로 실려 왔다고 합니다. 김 사장은 그런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가 습격을 받은 것이고요.”
심인성 과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거 냄새가 심하게 나는군.”
“처음부터 김 사장을 노리고 판 함정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애들을 총으로 쏜 놈들하고 한패일 가능성이 크겠군.”
“그럴 겁니다.”
매섭게 치켜뜬 눈을 하곤 잠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때 마치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때맞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니 표현구 국정원장이었다.
‘또 잔소리를 듣겠군.’
심인성 과장은 속으로 짜증스런 한숨을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예.”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으로 눈에 보인 것은 병원인 것을 알려 주듯 하얀 천장과 거치대에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 줄이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축 늘어져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리자 급하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하킴이 얼굴을 내밀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보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긴······ 병원인가?”
“예. 총알을 빼내는 수술을 하고 벌써 이틀째입니다.”
그렇게나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다니.
혁권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일어나려고 하다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됐으니까 가서 물이나 들고 와.”
오랫동안 누워 있었더니 목구멍이 깔깔한 게 마치 모래를 한꺼번에 들이부은 것 같았다.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 베드에 쿠션을 깔고 기댄 혁권은 하킴이 가져다준 물로 목을 축이며 잠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어깨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고 아까부터 살짝 두통과 함께 어지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일단 팔다리는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자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 혁권은 정색을 하고는 하킴을 보며 물었다.
“소현이는 어떻게 됐어?”
“무사히 수술이 끝나 지금은 옆 병실에서 회복 중입니다.”
“다행이군.”
어깨를 들썩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이어진 이야기에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상당 기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
“그리고 밴에 동승해 있던 스태프들도 크게 다쳤는데 운전을 하던 매니저는 그만 수술 중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깊이 아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항상 웃는 얼굴의 성실했던 도형석의 모습이 꽤 인상 깊이 남아 있었다.
스태프들하고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소현이기에 이런 사실을 알면 얼마나 상심이 클지 걱정이 됐다.
“소현이도 알고 있나?”
“치료를 받는 데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알리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잘했어.”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하들은 많이 상했나?”
“그게······.”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
“셋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상황이 종료된 후에 급히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둘이 수술 중에 숨을 거뒀습니다.”
부하들을 무려 다섯이나 한꺼번에 잃었다는 사실에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임영식도 죽은 거야?”
“······예.”
마지막에 임영식이 가지고 있던 탄창을 꺼내 건네주던 걸 떠올린 혁권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온몸이 터져 버릴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누구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혁권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이딴 짓을 벌인 놈들이 누구냐고!”
“저희를 습격한 것들은 안산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들이었던 걸로 파악됐습니다.”
총격전이 벌어지던 중에 러시아 말이 들렸던 걸 떠올린 혁권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라브로프 조직 계열로 밀수와 유흥업소에 동유럽과 러시아 여자 종업원들을 공급하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것저것 말을 많이 붙였지만 결국 제일 밑바닥에서 잡일을 하는 하부 조직원들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한국에 나와 있는 간부가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조직원들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이 누군지 모를 리가 없을 테니 하부 조직원이 아니라 전문 킬러들을 보냈을 터였다.
“딱히 엮인 일도 없는데 왜 날 노린 거지?”
“아마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배후가 있다는 거야?”
시선을 받은 하킴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지막에 비상구 계단에서 내려와 보스한테 총을 쏜 놈들이 기억나실 겁니다.”
“절대 잊을 수 없지.”
숨을 쉴 때마다 붕대를 감고 있는 상처 부위가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면도날로 생살을 쑤시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중 한 명이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 동남아계였습니다.”
“······!”
“그리고 소현 씨가 타고 있던 밴하고 부딪쳤다가 죽은 덤프트럭 운전자 역시 같은 동남아계 사내였다고 합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혁권의 두 눈썹이 곤두섰다.
“얼마 전에 저택 앞에서 국정원 요원들한테 총격을 가한 놈들하고 같은 패거리일 수도 있겠군. 아니, 그게 맞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도 숨어서 보스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 이제 뭔가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군.”
“아직 배후가 누구인지 오리무중입니다만 저희뿐만 아니라 국정원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니 곧 정체가 드러날 겁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감추지 않은 채 혁권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상관없어. 드러난 놈들부터 싹 다 쓸어버리면 되니까 말이야.”
-며칠 전 백주 대낮에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병원에서 외국인 조직 폭력배들 간의 총격 사태가 벌어져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동남아계 조직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권을 두고 서로 대립을 벌여 오다가 유혈 충돌까지 이어진 걸로 보입니다. 경찰은 불법 총기류가 대거 사용된 이번 사건을 엄중하게 생각하며 용의자들을 체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시민들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자 더 이상 숨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국정원에서 폭력 조직 간의 세력 다툼으로 내용을 둔갑시켰다.
의심을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현장에서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들의 시신이 나왔기에 대부분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믿었다.
사무실 소파에 혼자 앉아 뉴스에 나오는 앵커의 말을 듣고 있던 전병주 차장검사는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제길.”
뉴스를 접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김인철이 연관됐다는 걸 알아차린 전병주 차장검사의 입에서 절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설마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벌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