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0)
010 – 제갈량을 등용하다(3)
“들어가시죠.”
“예······.”
내가 직원 카드로 회의실 문을 열자 유지아가 쭈뻣쭈뻣 들어섰다.
김전감 PD를 만난 이후 사라졌던 의구심이 다시 유지아의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군. 설마하니 이제와서 내 신분을 의심할 리는······.
[쟤는 지금 네 정신상태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멍청아.]‘왜요?’
[···말을 말자.]나는 목각인형처럼 딱딱한 자세로 앉은 유지아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자기 자신이 투고한 원고임에도 유지아는 무슨 생경한 것이라도 되는 마냥 조심스럽게 받아들어 살폈다.
다시금 읽어나가던 유지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아깐 농담···하신 거죠?”
“······.”
“그렇죠? 이게 어떻게 드라마가 돼요? 전 스무 살도 안 되고··· 1차탈락이었는데··· 그것도 주말 10시에······.”
한껏 위축된 모양새.
나는 다소 곤란해졌다.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도리어 예상외의 반응이었던 까닭이다.
나는 유지아를 꽤 4차원적인··· 무척이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전 숙모 최숙기가 도작했던 내용이나 눈앞의 외계인 시나리오의 황당함으로 미루어볼 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배우의 이미지와 실제 본인이 차이가 나듯 작가도 작품의 경향과 본인 성격이 크게 다른 경우가 흔하지.]‘그러는 선배님은 쟤가 저걸 썼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실수해서 다른 애를 집어왔다고 생각하고 싶다.]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다.
드라마는 PD와 작가의 2인 3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대접은 박하다. 신인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수정하는 데 몇 년을 들였어도, 제아무리 대박 작품을 쏘아올려도 각본료 2, 3천만원 정도가 고작.
그나마도 영화가 실제로 제작되지 못하고 엎어지는 경우 계약금 5백만원이나 간신히 챙기곤 한다.
저번에 김철 선배한테 넌지시 물어봤더니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충무로 관행! 10년 전과 지금이 차이가 하나도 없지. 작가가 시나리오 잘 뽑아서 협상하려고 들면 돈 밝힌다고 매장해버리고 말이야! 그런 면에서는 드라마판이 잘 되어있긴 한 거야.]반면 드라마 쪽은 작가의 입김이 세다. 아니, 아예 기획 자체를 작가가 시작해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짧아야 10여편, 길면 50편 이상의 장편을 호흡을 맞춰가야 하는 일이다. 각본의 중요성이 말도 못하게 늘어난다.
그렇게 중요한 작가님이 저런 모습이다.
유지아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한 내가 휘두를 수는 있겠지만 그녀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요원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의 히트작가, 막장계의 큰손이 될 유지아가 필요하다.
일단 어떻게든 자신감을 살려줘야 할텐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SBC 안도정 사장님 아십니까?”
“예? 아뇨··· 죄송해요.”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그분은 다큐멘터리 PD로 사장까지 오르신 전무후무한 인물이신데 취임 전에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 요즘 SBC 드라마엔 허깨비만 둥둥 떠다니더군요. 저는 앞으로 SBC 사장으로서 허깨비를 잡으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드라마 PD들 사이에서는 꽤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유지아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무슨 뜻이죠?”
“흠, 이렇게 얘기해볼까요. 드라마 공모전을 열면 굉장히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들어옵니다.”
“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첫 번째 씬의 장소는 대개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어디일 것 같습니까?”
유지아는 잠시 눈을 굴렸다.
“글쎄요··· 주인공의 집?”
“답은 인천공항입니다.”
“예?”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합니다. 스르륵, 해치가 열리고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내립니다. 오랜만의 귀국이고, 대개 아주 성공한 사람이죠.”
“······.”
“감개 깊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리고 멀어지는 발걸음 뒤로 아직도 잊지 못한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아주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시작이죠. 어떻습니까?”
“···그, 괜찮은 것 같은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개의 PD들은 첫 씬이 인천공항으로 시작하면 심드렁해져서 대충대충 넘겨보다 던져버립니다.”
“예? 왜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명확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유지아가 눈을 깜박인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흔히들 드라마는 갈등이라고 합니다. 만나고 대립하고 충돌하는 곳에 드라마가 있고, 갈등이 없는 곳에는 드라마도 없죠. 그리고 이 갈등은 인물이,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겁니다.”
“인천공항 씬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뒤의 작가의 의도가 아주 명확히 읽히는 게 문제죠. 달콤쌉싸름한 첫사랑을 그리고 싶다, 아련한 분위기의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다.”
말을 툭 끊고 어깨를 한 번 으쓱인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 의도가 움직이는 스토리에 인물이 함몰되어 버립니다.”
“아······.”
유지아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작게 탄성을 발했다.
“드라마의 갈등이란 건 살아있는 인물간의 갈등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단순히 스토리를 움직이기 위한 인형이 되어버리는 거죠. 기껏해야 두 시간 남짓한 영화라면 몰라도 장시간 극을 이끌어나갈 주연 캐릭터들이 이런 허깨비면 어떻게 작품이 살아있겠습니까.”
“그런 뜻의, 허깨비······.”
유지아의 눈이 깊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쐐기를 박기 딱 좋은 상황이다.
“공모전 1차에서 탈락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 유지아 양은 많이 부족합니다. 기술은 단적으로 말해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좋겠죠.”
“···예.”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인물을 살리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유지아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최대한 얼굴에 철판을 둘렀다.
“스토리를 어떻게 전개하고 싶어서 전개되는 게 아닙니다. 작중에 살아있는 인물들이 자연스레 움직이며 멋대로 부딪쳐가며 갈등이 생기고 극이 진행됩니다.”
“······.”
“많이 보고 고민했습니다.”
나는 슬쩍 목소리를 절절하게 깔았다.
“주위에서도 미쳤다고들 했죠. 또라이란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 주변이 뒤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유령 한 사람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국, 제가 유지아 씨의 작품에 큰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겁니다.”
나는 어조를 낮추었다.
“어려운 점이 많겠죠. 저도 이제 막 입봉을 하는 참이니 부족한 점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유지아 씨가 제 기획 메인작가로 충분히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키워보고 싶습니다.”
유지아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김철 선배도 간신히 표정을 수습했다.
[미친··· 저 정신 나간 글을 그렇게까지 포장해내다니··· 아예 포장지 업체를 하나 차려보지 그러냐?]‘5년 이후로 살아남으면 고려해보겠습니다.’
[또라이 새끼······.]이번에는 평소와 약간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 ‘또라이’였다.
한참 후, 유지아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순간 흠칫했다. 눈빛이 말 그대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PD님.”
“예?”
“저 열심히 할게요.”
마치 전투를 앞둔 켈트 여전사와 같이 귀기가 서린 얼굴이었다.
“정말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요.”
“말 놓으세요.”
“응, 그래······.”
지직-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지아는 자신의 원고를 거칠게 찢어발겼다. 통째로.
힘도 좋다.
“저한테 딱 2주일만 더 주시겠어요? 고쳐올게요.”
“···오냐.”
열여덟 살 여고생의 행동에 쫄아 눈치를 보는 29(+10)세 청년이 있었다.
나였다.
#
그로부터 2주일.
[미친······.]김철 선배는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경악에 잠겨 있다.
“······.”
애써 표정관리를 했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
“어때요, PD 오빠? 아직 부족하지만 나름 고쳐봤는데요.”
눈앞에선 유지아가 웃고 있었다. 진한 다크서클 위에 벌개진 눈이 둥둥 떠 있다.
2주 전의 만남 이후 유지아는 나와 매일 통화나 문자로 의견을 나누며 원고를 개작했다.
그간 호칭이 바뀔 정도로 조금 친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이렇게 일주일 밤은 샌 것 같은 모양새로 다시 찾아왔다.
[나름······?]김철 선배가 딱따구리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진짜로 잉어킹이 망나뇽이 된 꼴인데······?]‘···잉어킹은 갸라도스로 진화합니다, 선배님.’
[···나도 알아, 새끼야.]평소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야 나와 김철 선배는 간신히 현실로 빠져나왔다.
말 그대로 중학생 습작노트 수준이었던 유지아의 원고는 고작 2주만에 몰라볼 정도로 환골탈태해 있었다.
재능충.
어마어마한 재능충······!
고작 4년 후에 쓴 작품을 도작한 것만으로 일자무식이던 최숙기를 스타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눈부신 재능이 이곳에 있었다.
[여전히 엉망진창이야.]김철 선배가 애써 냉엄하게 평가했다.
[개연성도 엉망, 핍진성도 엉망, 중심은 없고, 스토리는 널을 뛰고··· 그야말로 막장이다만······.]하지만, 하고 다시금 말이 끊긴다.
선배가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내가 대신했다.
‘재밌죠.’
[제기랄! 그래, 재밌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게······!]‘너무도 황당해서 복장이 터질 것 같은데도 다음회가 궁금해서 챙겨볼 수밖에 없는 맛.’
내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게 발암으로만 승부하는 짜가와는 다른 진짜배기 막장 드라마의 묘미입니다. 선배님도 드디어 아시게 되었군요.’
[알고 싶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놈아!]김철 선배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계신가요? 이쪽에 이현석 PD님이 계신다고 안내받았는데요.”
밖에서 어쩐지 낯이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태프인가?
“예,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얼굴도 왠지 낯익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누구지? 내가 저런 비주얼을 보고 잊었을 리가 없는데?
화려한 미모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유지아도 한껏 움츠러든 기색.
배우인가? 근데 왜 나 같은 무명 PD를?
“간만에 뵙네요.”
“아, 예.”
뉘신진 몰라도 인사를 하길래 일단 반사적으로 따라 인사를 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원고 봐주실 수 있을까 해서 와봤어요. 요 2주간 개작을 좀 했거든요.”
뭔진 몰라도 일단 주길래 반사적으로 받아보았다.
제목이 쓰여 있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
······.
······.
······??
김철 선배가 손뼉을 쳤다.
[아, 맞아. 저 얼굴이었어! 이제야 매치가 좀 되네.]······서예린 작가라고? 저 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