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09)
며칠 뒤, SBC 사장실.
최도정 사장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석이 그 친구가 혼자 MBS 쪽에 다녀왔단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목적이었는지는 모르고?”
“예······.”
앞에 선 오지호 CP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적어도 뒤집어엎으려고 간 건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렴 그렇겠지.”
최도정 사장은 손목시계를 풀어 손에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굴렸지만 끝내 답을 얻지 못한 듯 작게 혀를 찬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던가? 링깃 쪽 이지은이나 박진태 그놈은?”
“본인하고 얘기하랍니다.”
오지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죄다 그쪽 편이라니까요.”
“···박진태야 그렇다 쳐도 이지은이까지?”
최도정 사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스튜디오 링깃의 이지은 대표는 현재 명목상이나마 이현석을 고용하고 있는 입장이다. 곧 SBC의 자회사로 편입되는 것 치고는 꽤 미지근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간을 보고 있는 거겠지요.”
“···회사는 넘겨도 본인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건가?”
“이 피디가 또 전례 없는 스타 아닙니까? 옆에서 보다보면 다른 욕심이 날 수 있겠지요.”
하긴, 하고 최도정도 불편한 기색으로 납득했다.
방송가에 흔한 격언이 있다. 영화면 감독을 찾고, 드라마면 작가를 찾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대박을 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이가 알려지지 않듯, 드라마가 성공해도 그 피디의 이름이 알려지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현석의 명성은 여러모로 전례가 드문 케이스였다.
“사실상 맨주먹으로 자기 사단 꾸린 게 컸지요.”
유지아, 서예린, 이설, 한유미 모두 커리어 하나 없는 신인이었다.
그들을 그러모아 최악의 환경과 간당간당한 제작비로 쏘아올린 『연극처럼 살다』가 불과 1년여 만에 차지한 위상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거기에 본인의 개성도 여러모로 대단하다. 작품의 팬카페가 사실상 이현석 본인의 팬카페도 겸할 수 있는 이유다.
“다들 계산기 두드리는 겁니다. 이현석이란 인간이 어디까지 갈지. 아마 MBS 쪽도······.”
“음.”
최도정 사장이 침음을 삼켰다. 다 잡은 거위다 싶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오지호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그 친구 잡으려면 좀 더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도정 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 CP. 내가 멀쩡한 국장, 본부장 다 놔두고 자네랑 의논하고 있는 이유를 알잖나?”
“···국장님에 본부장님까지 죄다 이현석 피디를 흰 눈으로 보시기 때문이지요.”
“맞아. 이게 무슨 야구팀 응원하는 것도 아니고 순혈은 얼어 죽을 순혈 타령인지 모르겠어.”
최도정 사장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게 핑계라는 건 둘 모두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피디가 KBC 쪽에서 터트린 일이 크겠죠.”
“그것 때문에 꺼리는 거면 제놈들도 찔리는 게 있다는 증거 아닌가.”
최도정이 코웃음을 치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 전홥니다.”
“받게나.”
오지호는 고개를 숙인 후 전화를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높아진 목소리에 최도정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프리퀄 감독이 말입니까? 미국에서요? 예. 예······.”
오지호가 묘한 표정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디에고 로드리게즈 감독이 이 피디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고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새로울 건 없는 소식이군.”
최도정은 한숨을 쉬며 의자를 젖혔다.
“MBS에 더해 미국이라.”
“신빙성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신빙성은 무슨.”
최도정이 코웃음을 쳤다.
“현석이 그 친구가 원하면 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일 아닌가. 거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로드리게즈 감독을 통해 나온 소리고.”
눈을 깜박이던 오지호도 이내 최도정이 하고 싶은 말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피디가 일부러 시위를 하고 있는 거라고 보십니까?”
“십중팔구는. 비단 우리 쪽에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
“KBC 사태 때부터 알았네만 그 친구도 어지간히 능구렁이군.”
한참을 고민하던 최도정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예산은 내가 어떻게든 하지. 가서 지구 백 번쯤 날려도 된다고 전하게나.”
그 정도 예산을 잡으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파워 인플레이션 한 번 무시무시하군요.”
오지호 CP는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숙인 뒤 사장실을 나섰다.
한편, 문제의 능구렁이는 수면실에서 쪽잠을 자다 막 깨어난 참이었다.
#
···뭔 일이지.
일어나니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순간 또다시 무슨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다행히 상황은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 ···미안하네, 친구.
나는 머리를 짚었다. 이래서야 친구는커녕 웬수가 따로 없다.
– 한국에서의 상황은 들었네.
디에고가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 하지만 정말 본의는 아니었네. 인터뷰 와중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그렇게 와전될 줄은······.
찾아보니 인터뷰 내용 자체는 정말로 별 게 아니었다.
– 『벌칸의 몰락』이 원작을 뛰어넘었다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정신 나간 소립니다. 제가 수많은 매체에서 몇 번이고 강조했듯 저는 제 친우의 어깨에 올라탔을 뿐입니다.
디에고가 단호하게 말하자 인터뷰어가 고개를 끄덕인다.
– 오··· 그럼 그 어깨에서 내려오기가 아쉽겠군요?
– 물론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to the utmost) 내려오지 않고 버틸 생각입니다.
이게 전문이었다.
문제는 이걸 지아가 푸는 수능 언어영역마냥 멋대로 해석한 기자들이었다.
나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단순히 설레발에 가까운, 그러려니 봐줄 수 있는 기사였다. 여기에 위즈톤 매각에 관련된 기사 정도가 종종 섞이는 것도 뭐, 괜찮았다.
문제는 찌라시들이었다.
헛소리들이 어마무시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 헛소리들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시청자들 덕에 댓글창은 일대 혼란중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야말로 되는 대로 지껄이는군요.”
[저치들이 아님 말고 하는 게 하루이틀 일이냐.]···공식 발표를 준비할 수밖에 없겠군.
간신히 이도나 건이 사그러들었나 했더니 또 한동안 소란스러울 것 같다.
제기랄, 처음부터 저 망할 놈의 회사는 그냥 박진태에게 떠넘겼어야 했는데.
속으로 꿍얼대는 와중 다시금 전화벨이 울렸다. 짜증스레 보니 지아였다.
나는 얼른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 오빠······.
“왜, 무슨 일 있어?”
– 저, 그게요.
어째 조금 가라앉은 어조라 난 조금 불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아가 말했다.
– 이번 모의고사에서 저 영어 2등급 맞아서··· 그거 말씀드리려고요.
“오! 그거 잘 했다!”
나는 환희했다. 그야말로 황망한 심경이 씻겨 나갈 정도로 흐뭇한 소식이었다.
강성재가 잘 가르친 것도 있지만 역시나 타고난 머리가 좋았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한 치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김철 선배가 시선을 돌렸다.
– 수능 때는 1등급 맞을게요.
“암, 그래야지!”
나는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대학 가면 토익도 따고 회화도 공부할게요.
“음, 필요하다면 해야지.”
– 영어 마스터가 될게요. 학위도 따고요.
“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게 영어를 좋아하는데 왜 지금껏 공부를 안 한 거야?
내가 황당해하는 중에도 지아는 열심히 자신의 포부를 밝힌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뭐였지.
눈을 끔벅이고 있는 사이 곧장 서예린 작가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 딱히 자랑은 아니지만, 저 대학 때 영어 부전공을 했어요.
“······.”
– 그냥 알아두셨으면 해서요.
이쯤 되자 나도 상황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서 작가님, 아시잖습니까. 지금 나오는 소리 다 사실무근입니다.”
– 알아요.
서예린이 낮게 웃었다.
– 하지만 제 생각에 이 피디님은 국내에 오래 머무실 것 같지가 않아서요.
“아니, 저는······.”
– 아마 지아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 주변에선 반대로 왜 국내에, 그것도 드라마에 집착하냐는 얘기까지 종종 나오는 걸요.
“······.”
그야 내 모가지가 달려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나로서도 그런 상황을 이해시킬 자신은 없었다. 나는 애써 서 작가를 달랬다.
“···적어도 향후 5년간은 국내에 있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뒤면 내 모가지가 날아가든지 붙어있든지 하나가 정해지겠지.
서예린과의 통화를 마무리한 나는 이어지는 뉘신지 모를 전화들은 모조리 차단처리했다.
자고 일어나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껏 지친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죄다 제가 촬영에 집중하게 해주지 않는 걸까요.”
[···자업자득이란 말, 아냐?]“아니, 제가 뭘 했다고요?”
내 억울한 표정에 김철 선배는 어째선지 썩어가는 마멀레이드 잼을 보는 것 같은 눈을 했다.
그리고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지긋지긋한 심정으로 보니 오지호 CP였다. 간신히 촬영 관련된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나는 반색했다.
하지만 나온 말은 또다시 엉뚱한 것이었다.
– 하하, 한 방 먹었습니다, 이 피디님.
“···네?”
– 저희가 최대한 양보할 테니 그만해 주십사 연락드렸습니다.
“······.”
– 이후 SBC는 『연극처럼』 시리즈에 사활을 걸고 투자할 테니······.
통화를 종료한 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내 안에 어떤 확신이 섰다.
내가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뭐?]“『연구일지』의 종영을 기다리다가는 이 망할 상황에 끝도 없이 휘둘릴 거라는 겁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지금부터 곧장 차기작 기획을 시작하겠습니다.”
김철 선배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제정신이냐?]“물론 제정신입니다.”
[『연구일지』는 어쩌고?]“자는 시간 쪼개서 하면 됩니다.”
[작가 섭외는?]“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캐스팅 디렉터는?]“제가 하면 됩니다.”
[······.]내 완벽한 대답에 김철 선배도 감탄했는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의지는 확고했다. 어떻게든 이 끔찍한 스파이럴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잠깐만··· 현석아, 야!]그렇게 나는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도전에 나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