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1)
011 – 대붕이 만 리를 나는데 참새가 그 뜻을 어찌 알랴
“······.”
“······.”
째깍째깍.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 정도로 회의실 안은 고요에 잠겨 있다.
그 고요 안에서 서예린과 유지아는 제각기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원고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각자의 손에 들려있는 건 자기 자신의 원고가 아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
환하게 웃으며 들어선 서예린 작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건 내 앞에 있는 또다른 두터운 원고다발을 눈치 챘을 때였다.
“···그건?”
“아, 인사 나누시죠. 이쪽은 유지아 작가라고 제 기획 메인 작갑니다. 지아야, 이쪽은 서예린 작가님.”
두 여자는 무언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서예린 작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애써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다.
화장을 좀 자연스럽게 한 것만으로도 사람이 저렇게 인상이 바뀌나.
“······.”
하지만 어째선지 인사를 나눴는데도 분위기는 한껏 얼어붙어 있다.
서예린 작가는 왠지 마땅찮은 얼굴로 유지아를 바라보고 있다. 유지아도 낯을 가리는 평소와 달리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모습.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서예린 쪽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내게 묻는다.
“PD님 기획 메인 작가라고요?”
“예.”
“시놉은 작성하셨나요?”
“아직입니다.”
“그럼 당연히 컨펌도 아직이겠네요?”
“그렇지요.”
“즉,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는 뜻이군요?”
“···뭐, 그렇습니다만.”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제 고모 옆에서 방송국 짬 좀 먹은 서예린이다. 당연히 첫 번째 질문이 아래쪽을 죄다 포괄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물며 질문을 던지면서 싱긋 웃기까지 하는 모습.
[하아······.]‘선배님은 뭔가 좀 아시겠습니까?’
‘······?’
김철 선배는 벽 밖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그래봤자 나한테서 100미터 이상 멀어질 수도 없으면서.
“······.”
유지아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
충혈된 눈에 다크서클이 한가득인데다 그리고 있으니 당장 공포영화에 찬조출연해도 될 것 같은 모습이다.
쟤는 또 왜 저런데.
서예린이 빙긋 웃는다.
“반가워요, 유지아 씨. 고등학생인가요?”
“네.”
“작가로선 많이 어리네요. 좋을 때네.”
“···어린 거랑 글 솜씨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나요?”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대개 경험이란 게 있죠. 고등학생이면 아직 전두엽이 덜 성장했을 때기도 하고.”
“어설프게 경험을 쌓고 특정 작법에 집착하는 순간 도리어 길이 닫힌다고 어디선가 그러던걸요.”
“······.”
어째선지 가시 돋친 대화를 나누고 다시 서로를 가만히 노려본다.
그리고는 동시에 서로의 앞에 놓여있는 원고를 낚아챘다.
“PD님. 잠시 봐도 되겠죠?”
“죄송해요, 오빠. 잠시 시간 좀 쓸게요.”
“···그러십시오.”
서로 탐탁찮은 태도로 첫장을 넘기고 –
둘은 이내 말이 없어졌다.
나는 별 수 없이 혼자 적당히 밀린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하아.”
먼저 원고를 내려놓은 것은 유지아였다.
눈썹이 축 쳐진 채 침울해져 있다. 한껏 기가 죽은 모습이다.
그야 그렇지. ‘연구일지 속 보석함’이다.
지금의 내가 봐도 수작인데 알에서 막 깨어난 수준인 유지아가 보면 오죽했으랴.
막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기껏 살려둔 기가 꺾일까 싶어 전전긍긍해있는 중 서예린도 원고를 덮었다.
잘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이 원고, PD님이 손 대셨나요?”
“아닙니다. 모두 지아가 썼지요.”
“그래요.”
눈썹을 좁히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새.
유지아는 눈치를 보다가 서예린의 입이 열리는 순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 봤어요. 대단하네요.”
사심 하나 없이 쿨하게 칭찬하는 말이 돌아왔다.
“······에?”
유지아가 눈을 빼꼼 떴다.
“2주 전의 저라면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았을 테지만··· 그만둘게요. 어쨌거나 저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으니까.”
“저······.”
“재밌어요.”
“······!”
유지아는 손가락으로 벌어진 입술을 연신 매만졌다.
원고와 서예린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보는게 이런 글을 쓴 사람의 고평가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사실 나도 믿기질 않는다.
‘예전’의 서예린은 이런 막장 스토리에 누구보다 혹독한 사람이었는데?
옅어진 화장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엉망진창이고 황당해요. 그래도 계속 이어보게 하는, 이어볼 수밖에 없는 맛이 있어요. 지금의 이 PD님께 필요한 건 이런 자극적인 양념이겠지요.”
“······.”
“유지아 씨?”
“예? 예!”
“아까는 무시하는 발언을 해서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언니야말로 정말 무시무시··· 아니··· 경악스런··· 아니, 그······.”
유지아는 연거푸 말을 더듬었다.
그냥 ‘대단한 솜씨’라고 하면 될 걸 무어라 미사여구를 덧붙이려다 엉망진창이 된 모습이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서예린이 킥킥 웃었다.
“아직 단어를 구사하는 솜씨는 좀 모자라네요.”
“···노력할게요.”
“그래요. 열심히 해야죠. 그래야 다음 기회도 생길 테니까.”
서예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지아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넨다.
“뭔가 막히는 거 있으면 전화해요. 뭐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상담 정도는 해줄게요.”
“네? 네······.”
“PD님도, 행운을 빌어요. 그리고 다음 타자는 저라는 것만 기억해두세요.”
그리고 나서 눈을 찡긋한 후 서예린은 홀연히 떠났다.
유지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서예린은 잊었는지 일부러인지 원고를 회수해가지 않았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을 챙겨든 유지아가 입술을 오므렸다.
“저, PD 오빠. 저한테 1주일··· 아니, 사흘만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상관은 없다만······.”
“감사합니다!”
유지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원고를 안고 달려갔다.
···나도 보고 싶었는데. 『연구일지 속 보석함』 개작판.
#
사흘 뒤 초주검이 되어 나타난 유지아의 원고는 내가 다듬을 게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쯤 되면 다듬을 생각마저 나지 않았다.
[그게 맞는 거다. 우리는 비전문가야.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댄 요소가 이 막장의 금자탑에서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인지도 모르는 일이다.]‘···글에 대한 평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각본이 완성된 이상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다.
“시놉시스를 쓰자.”
“시놉시스······? 줄거리 요약을 말하시는 건가요?”
“아, 원래는 그 뜻이긴 한데 대개 기획안 자체도 시놉시스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
“그렇군요!”
유지아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달라면 간, 쓸개 다 빼줄 것 같은 기세다.
조금 부담스럽다.
[자업자득이지.]이죽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헛기침을 했다.
“기획안에는 제목, 형식, 주제, 기획 의도, 작의(作意), 등장인물의 관계도와 시·공간 설정, 그리고 간단한 줄거리가 들어가.”
“와, 많네요.”
유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놓은 기획이니 대충 해도 컨펌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당장 캐스팅을 하려고 해도 보낼 시놉시스와 대본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광고가 붙으려 해도 마찬가지고.
기획안을 쓰는 과정에서는 김철 선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라는 차이는 있지만 고작해야 직접 써본 게 한 개인 나와 수십, 수백 개를 써본 선배가 보는 안목은 전혀 달랐다.
[아냐, 아냐. 이미 네 기획은 누가 나오냐에서 완전히 밀렸단 말야. 그럼 시청자들이 아니라 다른 안목에서 매력을 어필해야지.] [주 시청층은 어떤 연령대가 될 예정인지, 그 사람들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를 두고 광고주들을 땡기게 만들어.] [PPL 끌어들일 여지를 남겨놔. 딱 올해가 공중파에 본격적으로 허용된 해 아니야. 다들 미적미적하는 판이니 화끈하게 장소며 소품이며 쫙 깔아버려. 그래야 싸움이 되지.]그렇게 훈수를 두던 선배도 제목에 이르러서는 입을 닫았다.
[이건 너희들이 정해야지.]나는 유지아의 의견을 물었지만 그녀는 저어했다.
“오빠가 정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글쎄.
나도 어지간히 작명 센스 없다는 소릴 들었던 몸이라.
결국 정하지 못하고 적당한 가제로 결재를 올렸고, 당연하다는 듯 통과되었다. 뭘 하든 별 관심도 없다는 것이 정답이겠지.
뭐, 이쪽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좀 정신이 박힌 CP라면, 혹은 각본 한 번 제대로 읽어보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쉽게 컨펌이 날 사안은 아니거든.
기획이 통과되고 나서 나는 곧장 스태프들을 소집했다.
“그래, 이제야 부르는군.”
“어때, 할 만 한가?”
“하하, 생각보단 나쁘지 않습니다.”
조영철 촬영감독과 서진태 음악감독은 내 처지가 안쓰러운 얼굴이었다.
둘 모두 40대가 한참 꺾인 고참들로, 대체재가 없는 실력을 자랑해 어지간한 CP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이들이다.
내 사수나 다름없던 김전감 PD와도 각별한 사이고.
그러니 드라마국의 분위기를 알면서도 기꺼이 내 쪽으로 와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데려온 스태프들도 나한테 크게 적대적인 기색은 없다.
“휴우, 저 아가씨가 형님이 서수현 작가 조카를 걷어차면서까지 챙겼다는 작가님입니까?”
“김전감 PD님이 형 정신 나갔다고 술 마실때마다 욕지거리 퍼붓고 계시는 거 알아요?”
“닥치고 자리에나 앉아라.”
AD들은 내 맞후임 수준인 민재 녀석을 비롯해 나름 믿을만한 녀석들로 꾸렸으니 말할 나위도 없고.
“···보내주신 시놉시스는 잘 봤어요.”
반면 한예슬 미술감독은 탐탁지 않은 기색이다.
30이 갓 넘은 나이로 한 분야의 감독을 맡을 정도로 열정도 실력도 남다른 사람이다. 사석에 한 자리 낀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겠지.
좋게 말해야 회의적 중립 정도.
“그런데 각본, 정말로 이대로 가실 생각인가요?”
“문제가 있습니까?”
“어떤 게 문제가 없는지 물으시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멀찌감치 앉아있던 유지아가 움찔했다.
쫄지 말라는 미소를 보내주고 주변을 슥 살폈다.
스태프가 노골적으로 작가와 대립각을 세운 셈이지만 대놓고 반발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자기들이 말 못했던 사안을 시원하게 꺼내준 데 감사하는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맙소사, 이 각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이가 설마 하나도 없단 말인가.
어리석은 우민들 같으니.
[···죄다 멀쩡한 양반들이라 참 다행스럽다만.]나는 김철 선배를 힐끔 째려보고 나서 한예슬 감독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 저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예슬 감독, 눈앞의 1호 우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