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10)
“네, 알겠습니다··· 예. 그쪽에는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박진태가 전화를 내려놓았다. 겉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그에게 이도나가 물었다.
“나가시나요, 실장님?”
“어? 어, 그래······.”
평소라면 낡은 실장님이란 호칭에 잔소리 몇 마디 했을 박진태다. 하지만 이도나의 부드러운 미소에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도나가 이 ‘연기’를 시작한 뒤 며칠째 비슷한 태도였다. 그나마 홍지호처럼 질겁하지는 않는다는 게 다행일까.
···아니, 애초에 이도나의 옛날 성격을 아예 모르는 입장이 아닌 걸 고려하자면 더 나쁜지도 몰랐다.
이도나가 온화하게 웃었다.
“잘 다녀오세요. 조심하시고요.”
“···오냐. 재석이 곧 돌아올 테니까 혼자 어디 나가지 마라. 무슨 일 있으면 밖에 직원들 부르고.”
문이 닫히고 적막만이 남았다.
가만히 손을 흔들던 이도나는 팔을 늘어뜨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렸다. 텅 빈 사무실 한편에는 큼지막한 전신거울이 놓여 있었다. 언젠가 거울이 없는 게 아쉽다고 비꼬던 이현석이 얼마 전 정말로 들여놓은 물건이었다.
이도나는 거기로 다가가 자신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손을 들어 입꼬리를 매만졌다. 최근 연기 탓인지 평소답지 않게 영 자신 없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이상한가?”
객관적으로 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소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웬수인 홍지호는 그렇다 쳐도 이현석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질린 표정에는 이도나도 꽤나 자존심이 상했다.
“좋게 대해주면 좋아해야 할 거 아니야··· 취향 한 번 이상하네.”
이도나는 작게 투덜거린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시간이 지나갔다. 시계바늘이 내려앉듯 점점 자신감이 없어져갔다.
사람 심리에 대해선 잘 몰라도, 십 년이 넘도록 누군가를 연기하고 있으면 거기에 가까워지게 마련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 쓰레기처럼 그게 드러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고ㅡ
“그만둘까.”
이도나가 생각을 툭 끊었다. 생각해보니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었다.
“그래. 이도나는 이도나지.”
그렇게 기지개를 펴던 순간, 문이 열렸다. 들어오던 홍지호는 이도나를 보자마자 흠칫 몸을 떨었다.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입을 달싹이며 쩔쩔맨다.
“어··· 그······.”
“넌 이젠 옹알이까지 하니?”
이도나가 짜증스레 내뱉자 홍지호는 어째선지 가만히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가족이 기사회생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도나야.”
“왜?”
“미안한데 욕 좀 해줘라.”
“···뭐?”
이도나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홍지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뭐든 나한테 욕을 좀 해보라고.”
“너 병신이야?”
이도나의 경멸스런 어조에도 어째 홍지호는 평화로운 얼굴이 되었다. 무슨 휴양림에라도 온 것 같은 표정으로 안도한다.
“다행이다. 난 네가 완전히 돌아버린 줄 알았다니까··· 이 피디님도 좋아하시겠다.”
“······.”
“되게 걱정하셨잖아.”
이도나는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그냥 콧방귀만 뀌었다. 그 인간에게만 계속해볼까.
이도나는 문득 홍지호가 든 봉투에 시선이 닿았다.
“···그나저나 그건 뭐야?”
“비디오야. 집에서 영화나 몇 편 쌔릴려고.”
그렇게 말하는 홍지호가 꺼낸 건 정말 옛날식 비디오테이프였다.
“요즘 세상에 너도 참······.”
이도나는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멈칫했다.
“···이건?”
“아, 영화 쪽 김철 감독님 알지? 그분 젊을 적 실험작이랜다. 어렵게 구해서 이현석 피디님 보여드리려고 가져왔어.”
“나 줘봐.”
“응?”
“줘보라고.”
이도나는 받아서 살펴보는가 했더니 그대로 윗 케이스를 열고 테이프를 늘여 구긴 뒤 잡아 뜯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구두 굽으로 꾹꾹 밟기까지 했다.
홍지호가 입을 떡 벌리는 사이 비디오테이프는 그대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아니, 뭔 짓이야? 진짜 돌았냐?!”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이도나가 차갑게 말했다.
“내 친구는 그딴 인간 알 필요 없어.”
“···뭐?”
10년 가까운 악연에도 상황을 알 수 없던 홍지호는 멍하니 눈만 끔벅거릴 따름이었다.
#
“음······.”
나는 꼼꼼히 리스트에 올라온 작가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못해도 10년, 가능하면 그 이상의 경력의 진짜배기 막장력을 가진 작가가 필요했다.
최은정··· 너무 어리고, 박미경··· 끝을 쓸데없이 훈훈하게 내고······.
거르고 거른 끝에 정리한 이름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나는 그중 한 명을 마저 지울까 말까 고심에 잠겼다.
김경숙.
54세, 25년차.
솔직히 경력과 실적이라면 비할 상대가 없는 인물로 ‘예전’에도 도작꾼 하나가 신성으로 떠오르기 전까지는 범접할 자가 없던 막장의 대모다.
지아의 작품을 베낀 최숙기가 치고 올라온 후에도 둘의 시청률 대결은 엘 클라시코에까지 비유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말하자면 전성기의 지아에 필적하는 막장력과 그 이상의 경험을 갖춘 진짜배기라는 뜻이다. 나에겐 그야말로 절실하기까지 한 인재다.
그렇다 해도 끌어들이기엔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게 내가 고민하는 이유였다.
[···아니, 너 진짜로 할 생각이냐?]김철 선배가 나를 보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반대로 왜 제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야······.]김철 선배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연구일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없냐? ]“없습니다.”
내가 딱 부러지게 잘랐다. 그랬다가 뭔 꼴이 났는지를 봐라.
돌이켜보면 『연구일지 속 보석함』은 처음부터 내 의도와 다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우선 막장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무리수를 둬야 했고, 그게 여의치 않자 시스템의 힘을 빌리려 디에고 녀석에게 목을 매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에야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 선택이 글러먹었던 겁니다.”
[어쩌겠냐, 현석아. 처음에 로드리게즈 놈이 그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냐.]김철 선배의 위로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응?]“설령 디에고가 막장도를 확보해준다고 한들 전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돌이켜볼수록 바보 같은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전후가 역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나의 소원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내 손으로 직접 궁극의 막장드라마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내 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으려는 수동적인 목적이 아니다. 내가 만들고 싶었기에 가졌던 목표였다.
그걸 타인에게 떠넘겨 요행을 바라다니, 넌센스에도 정도가 있다.
[아니, 너나 나나 이번에 뭘 어찌 할 생각은 없었잖아? 그냥 부분보상이나 받아서 메우려고······.]“제기랄! 그런 물러빠진 생각이 우리를 지금까지 휘둘리게 만든 겁니다!”
내가 책상을 쾅 내리치자 김철 선배가 움찔 놀랐다. 나는 김철 선배가 성을 내기 전에 더욱 언성을 높였다.
“지금의 참상을 보십시오, 선배님!”
[···뭔 참상? 수중에 쓸데없이 커질 회사가 하나 있고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시리즈가 대형 프랜차이즈가 되려고 하는 참상?]“그거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김철 선배가 침묵했다. 거 대단한 참상도 다 있군, 하고 꿍얼거린다.
“뿐입니까? 세간에서 절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방송가의 평을 축약하면 나는 인재를 보는 눈을 두루 겸비하고, 빈손인 와중에서도 천하를 꿈꾸며 웅비할 자세를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뿐인가? 심지어는 현재의 모든 상황을 내가 2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헛소리까지 있었다.
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다니는 대표적인 인물이 최도정 사장만 아니라면 나도 웃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쌓이고 쌓인 과대평가에 머리를 짚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대체 어디 사는 제갈량입니까······.”
[뭐, 세간의 눈에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다 보니 여기까지 굴러왔다는 게 더 개소리로 들리겠지.]김철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좀 진정해라, 현석아. 세상 일이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게 아니잖냐?]“『연극처럼』 초창기 때는 주먹구구식으로 잘만 하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그 때는 작가들이라도 네 편이었지.]김철 선배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적은 리스트를 눈짓했다.
[네가 생각하는 정통파 막장드라마는 일단 나이대 있는 작가가 필요해. 아니냐?]“···맞습니다.”
[그런 작가들 콧대랑 고집이 좀 세냐? 죄다 드라마 혼자 만든다고 생각하는 군상들 아니냐.]···그건 그렇지.
그 정점에 있는 게 리스트 제일 위에 적은 김경숙 작가다. 능력이 있는 만큼 콧대도 제일 높다.
하지만 그보다 급이 못한 상대라고 콧대가 능력에 비례해서 낮아지는 건 아니다.
[단언컨대 그치들에게 네 명성은 전혀 도움이 안 될 거다. 어깃장이나 놓지 않으면 다행이지.]“어째 잘 아십니다? 영화판에만 계시던 분이.”
[···이 정돈 누구나 알아.]김철 선배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냥 서둘러 들이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천천히 물밑에서 움직여야지.]“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철 선배의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리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너 내 말 들은 거 맞냐?]“들었고 맞는 말인 것도 압니다.”
하지만 내게는 어떤 종류의 직감이 들었다. 지금의 기세를 살려서 들이받지 않으면 또다시 상황에 끌려 다닐 뿐이라는 직감.
밑져야 본전, 일단 들이박는다고 손해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최근의 나에게 가장 빠져 있던 헝그리 정신이 아니겠는가.
[헝그리는 얼어 죽을······.]김철 선배가 혀를 찼다.
[아니,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거냐고. 정신론 이전에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어찌됐든 세간에서는 저를 무슨 대단한 모사(謀士)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럼 그 평판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응?]#
올해로 어언 25년차가 되는 김경숙은 사실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가는 아니었다.
이전 그녀의 멘토는 의외로 서수현 작가였다. 김경숙은 그녀를 보고 꿈을 키웠으며, 거기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평판은 나빴다. 두어 번쯤 말아먹고 반쯤 업계에서 쫓겨났던 그녀가 간신히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었던 건 차라리 천운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천운을 놓치지 않으려 독기를 품은 채 쓴 작품들은 그녀에게 현재의 지위를 거머쥐게 해 주었다.
오해하기 쉽지만 김경숙 자신이 그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되레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란 요상해서 미묘하게 남은 감정은 존경하던 서수현 작가를 꺼리게 만들었고, 이어 싫어하고 경멸하게까지 만들었다.
김경숙이 서수현을 싫어한다는 건 세간에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그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대개 알지 못했다.
그리고, 눈앞의 PD야말로 그 사람이라는 것도.
마주앉은 이현석은 그런 심정은 전혀 모르는 양 태연한 표정이었다. 김경숙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나요? 말씀하신 일이라면 거절했을 텐데.”
“그걸 좀 다시 생각해주십사 왔습니다.”
이현석이 부드럽게 웃었다. 유지아나 서예린이 본다면 오늘은 참 기분이 좋은 것 같다고 흐뭇해할 정도로 호의적인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김경숙이 생각했다.
‘···협박하러 왔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