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16)
곽태영 감독의 제안은 대개 영화감독으로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두절미하고 한 마디로 줄이자면 이런 말이었다.
“힘을 합쳐보세.”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무척이나 군침 도는 제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살짝 노한 얼굴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곽태영은 그리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내가 싫은 건가?”
“아닙니다.” “그럼 영화가 아니라 꼭 드라마 판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
정답이었지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내가 침묵하자 곽태영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지. 유감이네.”
“송구합니다.”
“저······.”
그런 대화가 이루어지던 와중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던 강주연 매니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곽 감독님, 그러면 설이 캐스팅 관련해서는······.”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본래 하려던 대로 해야지요.”
“아.”
강주연이 화색이 된 순간 곽태영 감독이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이 감독에게 양보할 생각입니다.”
“······네?”
강주연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나 역시 애써 표정을 관리했을 뿐 비슷한 심정이었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나?
나를 바라보는 곽태영의 눈썹이 아치를 그렸다.
“솔직히 이설 양이 많이 욕심나긴 했어. 어지간한 놈이면 그냥 짬으로 두들기고 뺏을 생각이었고.”
“그럼.”
“하지만 자네라면 얘기가 다르지.”
제발 빼앗아달라고 말하려던 순간 곽태영 감독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설 양과 자네는 최고의 콤비 아닌가?”
구석에서 멍하니 듣고 있던 이설의 얼굴이 슬몃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연구일지』에서 이설 양의 비중이 줄어들어 아쉬웠네만 주역이라니, 이거 정말 어떤 게 나올지 기대되는군!”
“아뇨, 이번 기획은 정말 평범한 통속극입니다. 꼭 이설 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나는 허둥지둥 진화에 나섰다.
“시나리오가 김경숙 작가님이신 만큼 제가 간섭할 기회도 많지 않을 테고······.”
“아무렴, 시작은 별 거 아닌 통속극이겠지.”
곽태영 감독이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자네 성격상 그대로 끝날 리가 없지 않나?”
“······.”
뭐라는 거야.
제발 불안한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제발 그대로 끝날 수 있기를 아침저녁으로 기원하는 중인데.
이후 내가 애써 설명을 잇자 곽태영은 그제야 납득한 기색이 되었다.
“김경숙이 그 아지매랑은 좀 악연이 있어. 내가 이설 양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냉큼 선점을 하려고 한 게지.”
“그럼······.”
“그 사람도 불쌍하게 됐구만. 이번만큼은 임자를 만난 게지! 하하!”
전혀 납득하지 않고 있었다.
임자는 얼어 죽을.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곽태영은 한참 동안 나를 괴롭히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주연 매니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같이 일어섰다.
“저, 이렇게 가시면······.”
“강 매니저. 대충 오늘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알겠습니다.”
“······.”
강주연이 덜컥 굳었고 곽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작규모하고 내 커리어에 눈 돌아간 건 알겠는데 배우에게 중요한 건 자기를 최대한 살려주는 감독입니다. 그걸 모르는 매니저는 이류입니다.”
“그······.”
“그리고 이 감독이 나보다 못하다고 선을 그은 시점에서 명백한 삼류고요. 스스로 한다고 하는 일이 정말로 배우를 위한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곽 감독은 짐짓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강 매니저 아버님도 아마 그런 걸 바라고 보내신 걸 테지요.”
곽태영이 자리를 떠난 뒤 강주연 매니저는 한동안 얼이 빠진 모양새로 서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얼이 빠진 채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는 사이 슬그머니 다가온 이설이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뭐가?”
이설이 내 손을 꾹 쥐었다.
“저, 곽태영 감독님 영화에 안 지게 연기 열심히 할게요.”
하지 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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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잘 하셨어요.
김경숙 작가는 곽태영 감독과 대면해 이설을 캐스팅해왔다고 하자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답지 않게 당장이라도 방방 뛰기 시작할 것 같은 목소리다.
“···저, 곽 감독님과는?”
– 그러네요. 김철 감독과 그 인간 정도의 관계라고 생각해두세요.
내가 시선을 돌리자 김철 선배가 어깨를 으쓱였다.
[웬수라는 소리지.]흠.
김경숙 작가는 몹시 기분이 좋은 어조로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거기에 반해 내 기분이 더욱 우중충해진 건 물론이었다.
[···어쩔 거냐?]“어쩔 도리도 없지요.”
여기서 엎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설을 죽이고 김경숙의 색깔을 최대한으로 살려낼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하나뿐이었다.
“얼마 전 연락이 온 KDS 대표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음?]“그리고, 샤이 그 친구도요.”
『연구일지』 오디션 당시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지만 현재로서는 그 녀석이야말로 몇 안 되는 희망이었다.
의아해하던 김철 선배도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힙찔이 녀석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인 것 같다.]“···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나는 다시금 편집실로 돌아왔다. 한창 믹싱 전 편집 작업이 한창이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업에 집중했다.
“이 씬은 3번으로 갑시다.”
내 말을 들은 조을호 편집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여기 홍지호 씨 블로킹 크기로는 웨이스트가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타이트풀입니다.”
“······?”
스크린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상황에 따라 배우를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은, 혹은 멀리서 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런 불만을 제때 캐치하고 샷을 변경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런 렌즈의 줌에 따라 연기의 크기를 바꾸는 게 배우의 미덕이다.
하지만 연출이란 게 늘 그렇듯 정답은 없다.
홍지호의 작은 움직임을 큰 화면으로 잡으면 시청자는 욕구와 어긋난 줌에 불만을 느끼겠지만, 적절한 연출에 따라서는 도리어 그 작은 움직임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음악도 빼버리고, 줌은 28번 씬부터 들어갑니다.”
“알겠습니다.”
내 설명을 들은 조 편감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을 슬쩍 보니 어째선지 김철 선배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뭡니까?’
[아니다.]김철 선배는 고개를 저었지만 흐뭇한 미소는 떠날 줄을 몰랐다. 뭔가 기분이 나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작업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일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살짝 늘어진 분위기 속에 조 편감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원래 이렇게 꼼꼼하게 보시는 편은 아니셨지 않습니까? 이 씬도 크게 중요한 쪽은 아니고······.”
“슬슬 후반부 클라이막스로 넘어가니까 말입니다.”
내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작된 새 기획에 『연구일지』의 촬영이 소홀해지지 않도록 애써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에 가까웠다.
···뭐, 그와 별개로 최근 서예린 작가의 애매한 태도도 있고.
[뭔가 불안해하는 느낌이란 말이지. 현 시나리오는 자기가 밀어붙인 주제에.]‘뭐, 신나게 기분대로 쓰던 드라마 작가한테 불안이 찾아오는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흔하다고 해도 마치 감기와 같아서 해결은 쉽지 않다.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심리의 문제인 까닭이다.
설령 주변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아도 나쁜 쪽만 보며 더욱 땅을 파고들게 마련이고.
[그래서 방법이 이거냐?]‘그야 힘을 빡 넣고 호평으로 뒤덮어주면 싫어도 치유될 테니까요.’
[에휴······.]김철 선배는 한숨을 쉬긴 했지만 신작전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는 데 부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차기작에서 김철 선배가 도울 일은 없었다. 애초에 있어서도 안 되고.
나는 조 편감에게 테이프를 건네며 말했다.
“뭐, 서예린 작가님과의 협업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합니다.”
뭐, 내 모가지가 제한시간 후에도 붙어있다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이요?”
“흠, 이쪽은 디제시스(Diegesis) 살려서 사운드 따로 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음향 팀에 말씀 좀 전해주십시오.”
“아, 예!”
어째 잠시 요상한 얼굴이 되었던 조을호 편감이 화들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간 사이 나는 잠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한껏 지친 기분이었다.
하지만 채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금 전화벨이 울렸다.
“어, 수아야.”
간신히 얼굴을 펴고 전화를 받은 나는 다시금 표정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경숙 작가님이 인터뷰를··· 어쨌다고?”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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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도나는 성격상 드물게도 굳이 불편한 시간을 감내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서예린 작가가 앉아 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영 우울한 기색이 폴폴 풍겼다. 사실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이도나가 간신히 입을 뗐다.
“그··· 아마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뭐가요?”
“김경숙 작가님 말이에요.”
“알아요.”
서예린이 빙그레 웃었다.
“분명히 제게 뭔가 부족한 게 있을 거예요. 이 피디님은 그걸 발견하셨을 테고요.”
아무것도 알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도나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아, 젠장. 입을 닫고 있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이쯤 되면 도리가 없었다.
이도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 사람과 예전에 얘기한 적이 있어요.”
“네?”
“알던 작가와 배우들을 쓰지 않고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더군요.”
서예린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도나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서 작가님이나 유지아 작가님이나··· 저랑 설이 같은 배우도 쓰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친구’와의 약속을 어긴 데 희미하게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도나는 드물게도 나중에 사과할 생각을 굳혔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니까 작가님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저, 잠시만요.”
말을 이으려던 이도나에게 서예린이 손을 들었다. 휴대폰을 살펴보던 그녀는 어째 신묘한 표정이었다.
“그, 기사가 올라와서요.”
“기사요?”
이도나가 가방을 찾는 사이 서예린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받아들고 헤드라인을 본 이도나가 눈을 깜박였다.
여기까진 대수로울 게 없었다. 문제는 이 아래였다.
이도나의 표정이 몹시 상냥해졌다.
“···이 썩을 놈의 인간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