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17)
“···결산은 이상이 되겠습니다.”
작은 기획사에서 일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던 와중, 큰 연예기획사에서도 회의가 한창이었다.
KDS 대표 – 강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본 쪽은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그 건은 어떻게 됐나?”
“그 건이라 하심은······?”
“이현석이 말이야. 약속은 잡았나?”
“아, 예. 물론입니다.”
팀장이 눈짓하자 실장 하나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강영철 사장은 옆의 비서에게 손짓해 일정을 살피도록 했다.
“민택이··· 샤이와의 약속은 일단 미뤄뒀습니다. 대표님과의 미팅 후에 다시 일정을 잡으려고 합니다.”
강영철이 턱을 쓰다듬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나?”
“예?”
“만나는 김에 나랑 같이 나가서 보면 되지. 그 녀석 일정 비워둬.”
실로 효율주의자다운 발상이었다.
실장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심 샤이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 까불대는 성격에 어지간히 불편한 자리랴.
팀장이 슬쩍 말을 돌렸다.
“참, 그리고 김경숙 작가 발로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현석 피디 드라마의 주연이 확정됐다고 합니다.”
“그래? 누군데?”
“이설입니다.”
대부분이 담담한 수긍이나 또인가, 하는 애매한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쓴웃음이었다.
“주연이 그 녀석이 썩 좋아하진 않겠군.”
“예?”
강영철이 표정을 바꿨다.
“아닐세. 다음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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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CP가 전화를 걸어온 건 김경숙 작가의 인터뷰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 그, 최도정 사장님께서 최대한 빨리,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물론입니다.”
오 CP의 전화를 끊으며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식으로 부드럽게 말했을 리가 없지. 욕지거리나 퍼붓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집어넣었다.
이설 캐스팅 건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김경숙 작가는 내가 천천히 뭘 하게 두질 않는군.
[···그 인간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본인은 그런 생각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자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김경숙은 서수현 작가와 그리 큰 차이가 없는 세대다. 드라마 한 편 촬영하면 주역이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라는 뜻이다.
상세사항에 대한 발언도 아니고 출사표를 던지는 데 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할 위인이겠지.
“뭐, 그렇겠지요.”
반대로 영화판은 시나리오가 이름 내기도 힘드니 반대로 균형이 맞는 셈이다.
나는 최도정 사장을 설득할 방안을 고민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데 어째 분위기가 시끌벅적했다.
“고은솔! 너 오늘에야말로 죽었어!”
“해 봐라, 돼지야.”
사무실에서는 에어리즈의 막내와 셋째 간에 술래잡기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보면 오늘이라고 했지.
잠시 서서 역동적인 씬을 구경하고 있는데 고은솔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는 헉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리고 강아라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내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아, 뭐야······.”
강아라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 시선을 올리고는 뻣뻣이 굳었다.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히는 게 보인다.
“피··· 대표님. 그게, 그······.”
나는 한숨을 쉬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쓱쓱 닦아주었다.
“가능하면 뛰어다니는 건 예능 프로그램이나 숙소에서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넷!”
강아라가 붕붕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주머니에서 초콜릿 바를 하나 찾아 건넸다.
“드시겠습니까?”
“아······.”
강아라는 몹시 갈등하는 표정이 되었다. 슬쩍 눈치를 보던 고은솔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대표님. 걔 이미 충분히 돼지인데 더 살찌우시면······.”
진심어린 말투에 강아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장이라도 잡아다 회를 치고 싶은 표정인데 내 앞이라 어쩌지도 못하는 기색이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전 체중이 두 배쯤은 늘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아이돌 확대범!”
어째선지 멤버들이 동시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확대까진 오버라도 좀 키우고 싶기는 했다. 원래는 저 체구의 세 배는 되었으니 지금은 좀 안정감이 없단 말이지. 불면 날아갈 것 같고.
다시 막내와 셋째가 투닥거리는 사이 나는 박진태에게 손에 든 서류를 건넸다.
“시끌벅적하군요.”
“한 마디 할까요?”
“아뇨, 적막한 것보다 낫지요. 처음엔 너무 조용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박진태가 흐뭇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멤버들이 갑작스레 밝아진 이유는 뻔했다.
시선을 돌리자 흐뭇하게 동생들을 지켜보던 한유미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맏언니가 제정신을 차리자 그룹 전체에 생기가 돌아온 느낌이다.
[어떻게 된 거지······.]김철 선배는 상황을 잘 모르는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이젠 한유미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지만 알아챈 기색은 없다.
말인즉슨 이설은 또······.
···생각을 말자.
“대충 그룹 단위 일정 다시 잡았습니다. 유미 씨는 계속 연기에 매진하게 할 생각이고, 나머지 멤버는······.”
나는 박진태의 그룹 육성계획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이미 말씀드렸듯 알아서 해주시면 됩니다.”
어찌어찌 상황이 꼬여서 여기까지 와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회사를 경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아이돌 활동에 대해 내가 뭘 알겠느냔 말이지.
쓴웃음을 지은 박진태가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나저나, 최도정 사장님 쪽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사실 그게 고민입니다.”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박진태가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제 생각에는 얼마 전 MBS 원광훈 사장을 만나고 오신 것도 큰 것 같습니다.”
“그건 지아 관련해서 일종의 약정승계였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아와 MBS측의 계약은 주체가 되었던 장연철 PD가 여러 이유로 물러나게 됨으로서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 찾아갈 이유는 충분했다.
설마하니 곧장 사장과 독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잘 풀렸습니다. 지아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내 목표는 나는 신작을, 지아는 MBS에, 서예린 작가는 고모님에게 청탁해 새 기획을 찾아줌으로서 『연극처럼』 시리즈의 거품을 빼는 데 있었다.
이후에는 정수아의 입봉작에 기대하게 되겠지.
“음.”
내 완벽한 청사진을 들은 박진태는 어째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김철 선배는 조금 다른 걸 의아해했다.
[···근데 언젠가부터 서수현이를 그냥 고모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너?]‘아.’
#
이도나는 온종일 기분이 나빴다.
암막커튼 틈 사이로 살짝 샌 아침햇살에 눈을 뜬 것도 기분이 나빴고, 머리를 감던 중 빠진 머리칼이 평소보다 약간 많은 것도 기분이 나빴고, 신으려던 구두코에 흙이 약간 묻어있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쁜 이유를 생각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고, 홍지호는 평소처럼 기분 나빴다.
아무튼 그렇게 좋지 않은 기분으로 이도나는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흐르자 그래도 그간의 마인드 트레이닝이 효과가 있었는지 조금 나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좋아진 것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게 이설을 찾아간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설이 너 일이 그렇게 됐으면 나한테 얘기라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별 생각은 없었고 그냥 푸념이나 좀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어조도 장난스러운 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설이 돌려보낸 대답은 꽤 신선한 것이었다.
“그래야 하나요?”
“···뭐?”
이도나가 멍해진 사이 이설의 눈이 살짝 옆으로 이동했다. 작게 “제가 말할게요.”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혹여 못 들었을까 걱정된다는 양 또박또박 반복했다.
“제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요?”
이도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필요라니, 하고 중얼거리는 이도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우리 촬영도 같이 했고······.”
“이도나 선배님은 주연이시고 전 단역이잖아요. 선배님은 촬영 한 번 하면 거기 있는 배우 분들께 전부 근황을 말씀하시나요?”
“······.”
물론 그렇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면 이도나는 그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논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나는 논리의 정합성보다는 평소 별 생각 없어보이던 이설이 노골적으로 날을 세우는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황스러움이 분노로 화하기 전 이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이도나 선배님 관련해서 최근 이야기가 많아요.”
“뭐? 나?”
“네.”
이도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그렇잖아요. 감독님께 매번 먹을 거 챙겨주시고, 툭하면 가서 얘기하시고, 장난도 치시고 그러시잖아요. 이상한 소문이 안 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이도나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돌이켜보면 처음 생긴 친구에 들뜬 나머지 확실히 지나친 구석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도나는 그걸 순순히 인정할 정도의 성격은 못 되었다. 되레 일단 당황이 가시고 나자 불끈 머리에 스팀이 올랐다.
“조금 친하게 굴어서 뭐 어쨌다는 거야? 조그만 게 발랑 까져서는 생각하는 게 그 따위니? 문제 있었으면 너 아니라도 실장님이 진작에······!”
“지적하시는 분은 아니죠. 대신 홍지호 선배님이 고생하셨지.”
“···뭐?”
“둘만 있으면 홍 선배님 허겁지겁 뛰어가시는 거 눈치 못 채셨어요?”
이도나는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보면 대화가 길게 이어지려고 하면 튀어나온 홍지호 덕에 무위로 돌아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경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나?
“솔직히 말해 ‘그 사람’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고는 생각해요. 이도나 선배님도 물망에 있어요.”
이도나는 고개를 숙였다.
“왜 선배님에 한해서만 ‘그걸’ 못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래도······.”
이어지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래, 그러니까 대충 상황은 알겠다. 뭐, 꽤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라는 것도 납득은 간다.
이도나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많이 죽었네.’
이도나는 회개하는 심정이 되어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이지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었다.
충분히 자기반성을 마친 그녀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들었다. 잘못한 걸 알았으면 고쳐야겠지.
“설아.”
“네.”
이도나가 빙그레 웃었다.
“너 보자보자하니까 내가 만만하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