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24)
『연구일지』의 국제 에미상 노미네이트 소식은 안 그래도 뜨거웠던 감자에 불을 붙였다. 반향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기자들이 곳곳에 진을 쳤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흥미 본위로 마구 전화를 걸어댔다. 어지간한 나도 그런 이들 중 KBC 안기식 사장까지 끼어있는 데에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에미상··· 좋네요.”
그렇게 주위가 죄다 피곤하게 구는 와중에도 이도나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근데 어차피 안 되겠지, 정도로 요약되는 태도였다.
실로 최근 드물기까지 한 냉정한 반응이라 나는 조금 달가웠다.
“노미네이트된 상의 종류가 바뀐 게 아닌가 싶지만요.”
“종류요?”
“나한테 여우주연상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고개를 빳빳이 든 거만한 태도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게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뭐라고요?”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다음번엔 더 나은 감독을 만나실 겁니다.”
굳이 저자세로 나가줬는데도 이도나는 어째 말문이 막힌 모양새였다.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만 이내 얼굴을 한껏 구긴 채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딴 식으로 나오면 안 되죠!”
“예?”
그리고는 되레 역정이다.
“그런 말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잖아요? 댁한테 가당키나 하겠냐거나, 꿈도 야무지다거나··· 뭐 그런 소리를 해야 하잖아요, 그쪽이?”
“······? 왜 그래야 합니까? 이도나 씨는 실력이 충분하신데.”
“자꾸 그렇게 술 달고 살래요?”
이도나는 늘 그렇듯 일반인은 도통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한동안 시끄럽게 굴었다.
간신히 그게 가라앉은 후에도 툴툴거리는 모양새는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동네는 말이 국제지 동양인 배우한텐 상도 안 주잖아요? 대놓고 차별하는구만.”
“일단 05년도에 중국 여배우가 받은 적은 있지요.”
하지만 확실히 수상은 그 정도로 드문 일이다.
하도 그러다보니 최근은 동양 쪽 미디어들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노미네이트되어도 그러려니 기사 몇 줄 띄워주고 마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연구일지』가 노미네이트된 걸로 시끌시끌한 건 꽤나 별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미국 쪽의 프리퀄이 그렇게 된 게 크겠죠.”
이도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설마하니 무관으로 끝날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했으니까.”
“완전한 무관까진 아닙니다만······.”
그렇다곤 해도 참패라는 게 바뀌는 건 아니었다.
11월에 발표되는 국제 에미상과 달리 9월 말에 시상식을 여는 에미상 본편은 이미 발표가 끝난 상태였다.
『벌칸의 몰락』은 편집상과 특수효과상, 메이크업상 등의 잔가지 몇 개를 수상하는 데 그쳤다.
화제가 된 빈도에 비해서는 작품상, 감독상, 배우상, 각본상 등의 메인급 라인은 건드려보지도 못한 참패였다.
이도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짜고 친 거예요. 암만 그래도 그게 말이 돼요? 지금 『연구일지』가 까이는 이유도 그쪽은 오히려 호재였잖아요.”
“···뭐, 아무래도 외국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외전이라는 게 컸을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감독 본인도 아쉬운 기색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 애써 수긍하는 느낌이었고.
“시청자들이 항의를 하고 있는데 뭐라는지 원.”
재차 코웃음이 돌아왔다.
“아무튼, 외전이 그 모양으로 끝났으니 원작에 줄 거 아니냐는 말이 도는 거죠.”
“『연구일지』가 딱히 원작은 아닙니다만.”
“영향만 따지면 『연극처럼』보다 이쪽 아니에요? 그쪽은 한지원 하나고, 이쪽은 문명이 날아간 원인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건 그랬다.
“설이 걔는 좋아하지 않을 얘기지만요.”
이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난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타고난 빼어난 눈치로 최근 둘의 사이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군자는 위험을 가까이 하지 않는 법이다.
“어쨌거나 초청은 받은 거죠?”
“사실 안 갈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렇게 쓸데없이 시끄러워서는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이도나가 흘끗 나를 보았다.
“···그럼 촬영 일정을 조정해야겠네요?”
“그렇게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전 『연구일지』 촬영 외에는 다른 일정 없어요.”
내가 눈을 깜박였다.
“네?”
“같이 가자고요.”
이도나가 맡겨놓은 돈을 달라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
국제 에미상이 시상하는 부문은 대략 10개 가량으로 100개를 훌쩍 넘기는 본편에 비하면 꽤나 적은 편이다.
그중 드라마 자체로 수상할 수 있는 건 드라마 시리즈(Drama Series), 숏폼(Short-Form Series), 미니시리즈(TV Movie), 그리고 텔레노벨라의 네 개 부문이다.
이중 텔레노벨라는 연속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화수가 정해져 있으며,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방영되는 모든 드라마가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개 막장드라마가 받지.]“그야, 뭐······.”
그런 장르니까 말이지.
『궁극의 막장 드라마』에 대한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제 에미상 텔레노벨라 부문에서 수상하는 것 역시 충분히 조건에 해당할 것이다.
[뭐, 『연구일지』야 당연히 그냥 드라마 부문이다만.]“『연극처럼』을 들고 왔다면 텔레노벨라 부문이었을 텐데 아쉽군요.”
[오, 글쎄다.]김철 선배가 미국인이 빙의한 것처럼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풀고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튼, 운이 좋았어. 드라마 부문에는 그 댄 크레이그가 있잖냐. 실수로라도 이쪽에 줄 일은 없을 거다.]대니얼 조나단 크레이그.
사회 비판, 자연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영국의 감독이다. 꾸준한 봉사활동, 기부 등의 선행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감독으로서의 솜씨 역시 대단해 그 김철 선배마저 ‘뭐, 나한테 미치지는 못하지만 제법 괜찮은 놈이지.’ 라고 인정할 정도의 실력파다.
“원래라면 이즈음 TV로 작품을 낸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내가 입맛을 쩝 다셨다.
김철 선배는 수상을 절대 일어나선 안 될 무언가로 보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조금 복잡했다.
내 모가지야 간당간당할지도 모르지만 서예린 작가의 경우 과거의 시청자 영합주의식 물건이 나올 확률이 아예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건 꽤 매력적이었다······.
[모가지가 달려 있다. 잊지 마라. 너랑 내 모가지가 달려 있다고.]김철 선배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선배님 따님도요.”
[이 자식이!]“아, 저기 오네요.”
멀찍이서 다가오는 이도나를 본 김철 선배는 언제 날뛰었냐는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도나는 공항 입국 심사관에게 매여 있었던 게 짜증나는 듯 입술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봤자 몇 분 정도일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놀러 다닐 장소나 체크해두세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쓴 상태에서도 훤히 보이는 뚱한 얼굴로 툭 내뱉는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관광객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캘리포니아 하면 역시 엘도라도랑 요세미티지. 그래도 LA하고는 좀 거리가 있으니까 남쪽을 먼저 돌고······.”
“아, 시끄러워! 내가 여기 처음 와봐?”
그런 주제에 옆에 있던 매니저가 입을 열자 대놓고 쏘아붙여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든다.
···모르겠다. 대체 언제쯤 되어야 내가 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알았어? 일단 나가면 너 먼저 가서 예약 알아보고······.”
이도나가 그렇게 매니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던 와중이었다.
“현석!”
멀찍이서 거구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오, 디에고!”
디에고는 환한 얼굴로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 역시 미운 정도 정이라고 뜻하지 않게 얼굴을 보니 놀랍고도 반가웠다.
“자네가 여긴 대체 웬일이야?”
“하하, 자네가 같은 나라에 있는데 내가 두더지들하고만 놀 수는 없지 않겠나?”
디에고가 껄껄 웃었다.
제아무리 같은 미국이라 해도 동부 끝에 있는 뉴욕과 서부 끝에 있는 로스앤젤레스가 만만한 거리랴. 안 그래도 일정이 바쁜 걸 잘 아는 나는 그 배려가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혼자 온 것도 아니었다.
“자네를 꼭 보고 싶다는 친구들만 고르고 골랐네. 수다쟁이가 되어야 할 거야.”
“하하.”
나는 알렉스 포터를 비롯해 이미 면식이 있던 친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디에고는 내 뒤쪽을 보고는 순간 반색했다.
“아, 항상 브라운관 너머로 뵙고 있습니다, 도나 리! 최근의 활약은 정말 멋졌습니다.”
“···아, 네. 그거 참 영광이네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납게 굴던 이도나는 어째선지 맥이 탁 풀린 표정이 되었다.
#
“드라마 시리즈 부문은··· 대니얼 크레이그의 『What’s Up』입니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이변은 없었다. 댄 크레이그는 온화한 얼굴로 단상에 올라 수상소감을 읊었다.
김철 선배는 눈에 띄게 안도한 반면 디에고와 그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을 감독의 이름으로 주다니!”
“크레이그는 괜찮은 감독이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아니었어.”
노골적으로 투덜거리는 이들을 디에고가 애써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들이 슈퍼히어로라고 생각해 봐. 여기 있는 현석과 크레이그 감독이 싸우고 있고 둘 모두 면식이 없다면 누구 편을 들겠는가?”
스태프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말이라고 하나? 그야 당연히 크레이그 감독이지.”
“리 감독은 누가 봐도 악당이야. 그것도 중역이지!”
순식간에 반전된 분위기에 나는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디에고가 껄껄 웃어젖혔다.
“뭐, 우리 일이 늘 그렇듯 대중들이 평가하겠지. 마음 편히 놀고 돌아가게, 현석.”
그리고 나서는 정말로 관광이 이어졌다.
디에고 로드리게즈의 이름은 꽤 만만한 게 아니었던 터라 나는 예전 사진과 상상으로만 접했던 할리우드의 여러 곳들을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음······.
나를 바라보던 김철 선배가 슬그머니 물었다.
[욕심이 나냐?]‘솔직히 아니랄 수는 없겠지만··· 제가 목표로 하는 곳과는 다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제작자라면 가슴이 술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그런 곳이었다.
“애초에 컷, 와이프, 디졸브 외엔 자제하라는 건 ‘초보자는 약한 불로 시작하세요’와 다를 게 없는 거야! 그걸 대체 왜 신경 써야 하지?”
“오, 자네가 개를 키우는 줄은 알았지만 서로 머리를 바꾸기로 했으면 말은 해줬어야지. 그럼 내가 개소리를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았겠나?”
디에고가 데려온 친구들과의 대화도 여러모로 즐거웠다.
천생 제작자인 이들이 모이니 단순한 헛소리와 농담도 결국은 제작 기법과 과정에 대한 난상토론으로 이어지곤 했다.
예산과 시간에 쫓겨 타협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국내와 달리 이들이 보는 관점은 자못 달랐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나와 차원이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 항시 그게 안타까웠어.”
“···고맙네, 디에고.”
나는 그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도나의 불만이 터질 무렵이 되어, 그렇게 의미 있는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하지만 이도나보다 먼저 사건이 터졌다.
“···뭐라고?”
“스캔들이야.”
디에고가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를 제치고 상을 탄 크레이그 감독이 비리에 휘말렸어.”
“······?”
나는 눈을 깜박였다.
앞으로 몇 년 뒤까지의 기억을 뒤져봐도 그야말로 금시초문인 사태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