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26)
이현석의 방송 출연으로부터 며칠 뒤.
“하여간에, 난 놈과 미친 놈은 구별이 안 간다는 소리가 맞는 것 같아.”
SBC 사장 최도정은 작은 파전집에서 소주잔을 비우며 푸념을 내뱉고 있었다.
“도대체가 왜 잘 달아오른 팬에 물을 끼얹나, 끼얹기는!”
“하하.”
맞은편에 있던 안기식 사장이 쓴웃음을 짓는다.
불과 이틀 전이던 이현석의 ‘지역’ 발언의 화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방송이 나간 지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기사가 속속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길은 순식간에 국내를 집어삼키고 SNS 등을 타고 미국으로까지 번졌다.
당시 오지호 CP의 얼굴은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렸는데 어찌나 심했던지 질책하려 부른 최도정조차 차마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뭐, 그래도 반응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잖나?”
안기식 사장의 말대로 미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썩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다.
– 오, 생각보다 맞는 말인 것 같은데?
– 오스카나 에미나 로컬 치고는 크긴 하지만 그것뿐이지.
– 이번 사태를 봐서는 크기만 하지 그만한 품격도 없는 것 같더군.
최도정 사장이 한숨을 쉬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으면 뭐하나? 이걸로 미국 방송계 쪽에는 제대로 물을 먹인 셈인데!”
그간의 반응이 무시에 가까웠다면 지금부터는 백안시에 가까워질 것이 뻔했다. 필요치도 않은 허들을 굳이 겹겹으로 쌓은 셈이다.
“영화감독이라면 호기로운 말일지 몰라도 드라마 PD로는 제정신이 아닌 짓거리란 말이네, 이건.”
“그 친구, 역시나 영화로 나가려는 게 아닌가?”
“제기랄, 그러면 포기라도 하지 않겠나!”
최도정이 신경질적으로 잔을 비웠다.
“본인 말로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더군!”
김철 감독에 대한 대수롭지 않은 뒷담으로 시작된 지난 만남에서 이현석은 거의 단정 짓듯 선언했다. 적어도 앞으로 5년은 드라마 판에 있을 거라고.
최도정으로서는 더욱이 속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그럴 사람의 행보인가?
“그냥 만들면 팔릴 『연극처럼』 시리즈는 만들기 싫어, 천운으로 뜬 미국 시장은 제 발로 걷어차··· 대체 뭔 생각인 건지 원!”
“고생하는구만.”
안기식 사장은 끌끌 웃으며 울화통을 터트리는 친우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뭐, 현석이 그 친구 아닌가. 뭔가 생각이 있겠지··· 신작은 김경숙 작가라고 했던가?”
“그래, 하필이면 그 김경숙이야.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쓰는 그 노인네. 제기랄, 뭘 기대하겠나?”
안기식 사장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좀 심하군. 그래도 원로 작가 아닌가?”
“심하기는 무슨, 그 여자야말로 허깨비의 제왕이야! 내 말이 틀린가?”
조금 사그라들었던 최도정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간 그 여자의 드라마에 나온 인물들을 포지션별로 죄다 섞어놓고 무작위로 뽑아서 만든다고 해보세. ‘신작’ 딱지를 붙여서. 장담컨대 시청자들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걸?”
살짝 취기가 오른 듯 역정을 내는 태도에는 안기식도 쉬이 반론하지 못했다.
자기복제와 스테레오타입은 좋거나 싫거나 다작을 한 작가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이지만 김경숙 작가는 그게 무척이나 과도한 타입이었다.
착하고 답답한 여주인공, 그런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주인공, 그런 남주인공을 호시탐탐 노리는 악녀를 보고 나면 드라마 한 편이 굴러갈 모양새와 결말이 얼추 예상이 된다.
안기식 역시 그런 틀에 박힌 스토리가 반가우랴만은 굳이 표정을 굳히고 반론을 꺼냈다.
“시청률이 말해주는 걸세, 최 사장.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중들이 선택한 걸 부정하는 건 방송국을 대표하는 태도가 아니지.”
“음······.”
이번에는 최도정 사장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그리고 현석이 그 친구라면 어떻게든 할 거라고 믿네. 나로서는 그 친구가 끌려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질 않아.”
“하, 이번만큼은 그 녀석이라도 잘못 생각했다고 보네.”
최도정 사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유지아나 서예린이나 신출내기 작가였어. 하지만 김경숙이는 제가 서수현인줄 아는 위인이 아니냔 말이야. 제 경력 10분지 1이나 되었을 애송이한테 기가 죽어줄 늙은이가 아니지.”
“음.”
“이번만큼은 그 친구가 곤욕을 치를 걸? 내기해도 좋네.”
이번만큼은 한번 실패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최도정은 코웃음을 쳤다.
#
“의견을 듣고 싶군요. 이건 아니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고쳐보도록 하지요.”
“······.”
나는 애써 표정을 수습하고 있었다.
작가와 PD가 회의를 하며 각본을 다듬고 고친다. 딱히 이상할 건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 작가가 직접 사무실까지 찾아온 김경숙이 아니라면 말이지만.
나는 가만히 그녀를 살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간 보아온 김경숙이란 인물은 나를 깔아뭉개면 뭉갰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의견을 구할 위인은 아니었다. 이설 건이나 인터뷰 건 등 나를 무시하고 돌출한 경우를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렇군요······.”
나는 원고를 넘겼다. 일부러 간격을 두고 뜸을 들였지만 김경숙 작가는 딱히 인상을 찌푸리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우선 주인공의 아버지가 기억을 잃고 있는 상황이 지나치게 개연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딱히 의학적인 소견 없이 단순한 건망증으로 잊고 있다는 게 그리 멀쩡한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다음은?”
나는 허를 찔린 심정이 되었다. 설마하니 담담한 수긍이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연히 말이 꼬였다.
“어··· 시어머니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주겠어요?”
“음,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불가사의할 정도의 정중함이었다. 나는 말을 이어가면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문득,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놀리던 김경숙 작가가 툭 내뱉었다.
“그··· 저번에 방송에서 한 얘기는 꽤 속이 시원했어요.”
“예? 방송이라면······.”
“이틀 전의 그거.”
나는 눈을 끔벅였다. 글쎄. 대놓고 던진 무리수에 칭찬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런 내 태도에 김경숙 작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명할 필요를 느꼈는지 천천히 말을 고른다.
“나는··· 아니, 내 세대는 거의가 옛날 사람이에요.”
“예.”
그야 누가 봐도 그렇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를 가서 봐보려고 해도 그리 별시럽지가 않아 보여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여기저기 번쩍번쩍하다보니 이야기가 끝나 있지요.”
김경숙 작가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우리 것보다 우월하다고, 대단하다고 하고.”
“······.”
나는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우리 땅에서 상을 열 번 타는 것보다 저기 물 건너 코쟁이들 상 하나 받는 게 더 대단한 취급을 받지요. 세월의 흐름이겠지만······.”
김경숙 작가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그 코쟁이들을 지방이라고 딱 자르는 이 피디 말에 좀··· 속이 시원하더군요. 그것뿐이에요.”
···과연.
뜻하지는 않았지만 즐거운 오산이었다. 다른 뜻이 없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가 재개되었다. 이 변덕스러운 아주머니가 금세 태도를 바꾸지 않을까 싶어 나도 조금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이 건은 그렇게 하고, 다음은··· 이 악역은 약간 입체적으로 만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방법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 의견에 김경숙 작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이 피디라면 잘 알겠지만 노파심에 한 가지만 말하지요. 사람들은 내 드라마를 욕을 하려고 봐요.”
“예?”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김경숙 작가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지요. 그게 사회생활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화는 나는데 어디에 터트릴 곳은 없는 거예요.”
“음······.”
“그런 사람들은 정당하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부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줘야 해요. 적어도 나는 그간 그런 이야기를 쓰려고 했어요.”
평면적인 악역을 입체적인 악역으로 만드는 건 좋다. 하지만 그걸 근본부터 바꾸면 그건 김경숙의 글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 되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나쁘다는 소린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걸 만들려고 한다면 굳이 이 피디가 나와 일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
나는 재차 허를 찔린 심정이 되어 쓴웃음을 지었다.
김경숙··· 그간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과연은 막장드라마의 대모로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희미하게 드러난 관록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문득 자신감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하고라면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선배님.’
회의는 계속 이어졌고 내 말은 조금씩 짧아졌다.
#
그런 이현석과 같은 시각, 이도나는 서예린과 모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평소 이야기를 나누던 사무실이나 단골 카페 등은 좋은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장소는 그녀의 집이었다.
“그 인간도 참 어디 튈지 모르는 작자라니까요.”
이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처럼 조금 이지적이고 냉정하게 행동하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하고 그녀는 내심 불평만만이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현석은 항상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이도나는 늘 그랬듯 선량한 자신이 참아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처음이지?’
응, 하고 이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었다. 매니저와 박진태 실장 이외의 인물이 집에 찾아온 건.
하물며 그게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쯤 되면 이도나도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목소리에도 그런 기분이 실렸다.
“어쨌거나, 다행이네요. 요즘은 드라마 욕하던 소리들도 쏙 들어갔고··· 서 작가님도 조금 마음을 놓으셔도 되겠어요.”
“···다행일 리가 없잖아요.”
“네?”
서늘한 투로 돌아온 대답에 이도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이 꽉 쥐어졌다.
“책임은 이 피디님이 죄다 뒤집어쓰시다가, 상황이 바뀌니까 반대로 공을 몰아주시는 게 어딜 봐서 다행인 일인가요?”
“그건······.”
“저는 이 피디님의 파트너일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절··· 지아와 비슷한, 돌봐야 할 애로 여기고 있는 것 같네요.”
손톱이 희미하게 살을 파고드는 게 보였다. 이도나는 순간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어라 말을 잇지는 못했다.
확실히 그간 그런 기미는 있었다. 항시 심드렁한 태도인 이현석은 몇몇 이들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무른 태도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유지아라든가, 서예린이라든가.
···혹은, 애써 내색하려 하진 않지만 이설이라든가.
이도나가 짐짓 밝게 말했다.
“뭐, 배려를 받는 건 좋은 일이지요. 서 작가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바닥엔 참 쓰레기 같은 감독들도 많거든요.”
정말이지 그랬다. 쓰레기 같은 아버지지만 그 때만큼은 정말로······.
이도나는 애써 떠오르는 상념을 쫓아냈다. 그녀가 보기에 서예린의 고민은 꽤나 사치스러웠지만 누구나 똑같은 경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만 할 일을 하죠. 그러니까··· 어디까지 했던가요? 분명히 유지아 작가님이 간단한 시놉시스를······.”
“···좋으시겠네요. 이도나 씨는. 신뢰받으시니까.”
“어··· 네?”
갑작스레 찔러온 말에 이도나가 눈을 깜박였다.
“이 피디님께 본때를 보여주자고 하신 것치고는 요즘 많이 가까우신 게 아니신가요? 같이 미국까지 다녀오실 정도니.”
“······.”
서예린은 말을 내뱉고 나서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합니다. 단순한 화풀이였어요.”
“아뇨······.”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