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27)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이도나가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침묵을 깼다.
“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네.”
“저는 그 인간이 마음에 안 들어요. 반드시 본때를 보여줄 거고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확실히 자신이 최근 풀어진 태도를 보인 것 같기는 했다.
이도나는 이현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뭔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니 어쩌니 진지한 얼굴로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던 얼굴, 그런 주제에 끝내 고른 건 이설.
‘좋아.’
자연히 평소와 같이 한 방 날려주고 싶은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유지아 작가님하고 두 분이서 쓰신 초안은 읽었어요.”
둘은 무언의 합의로 그동안 이어오던 모의로 돌아갔다.
“사실, 전 김경숙 작가 본인은 굳이 더 분석하고 경계할 부분이 없다고 봐요. 솔직히 비교가 안 되지 않나요?”
“그건······.”
“스톱.”
무어라 말하려던 서예린을 이도나가 막았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서 작가님은 그 사람이 골랐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 거예요. 30년 가까이 그러고 살았던 분이에요. 더 우러날 구석이 퍽이나 있겠어요?”
“······.”
“그런 주제에 자존심도 보통내기가 아니고. 이번만큼은 이현석 그 인간이 날뛸 가능성은 일단 배제해도 될 거예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던 이도나는 끝에 “아마도.” 하고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간 그녀가 경험한 이현석이란 인간은 99퍼센트 이상 확신할 수 있어도 항상 남은 1퍼센트로 미친 짓거리를 벌이는 인간이지 않던가.
당장 이번 로컬 발언 사태만 해도 그런 케이스였다. 최근 본 오지호 CP의 수척한 얼굴에는 어지간한 이도나도 안쓰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설마하니 또 『연구일지』 1화의 공룡 같은 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
바꿔 말해 그 정도의 파격이 아니라면 시나리오의 우열은 확연하다고 해도 좋았다. 비슷한 클리셰와 패턴이라도 풀어내는 솜씨가 차원이 달랐다.
유지아는 뻔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데 능했고, 서예린은 시시한 내용을 시시하지 않게 만드는 데 말도 안 되게 뛰어났다.
서예린은 여전히 미적지근한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수긍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기획은 어떤 분께 맡기실 생각이세요?”
“그건.”
결국 PD는 누구로 할 거냐는 질문에 이도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경력이 적잖은 입장이니 떠오르는 이름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상대가 이현석이라고 가정하고 보면 누구 하나 만족스럽게 생각되는 인물이 없었다.
“···생각해둔 사람은 있지만 좀 더 고민해볼게요. 적어도 유지아 작가님 수험 끝나실 때까지는요.”
“네.”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이도나는 서예린과 눈을 몇 번 마주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도나는 오늘에야말로 친구가 하나 더 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지만 돌아오고 있는 눈빛은 꽤나 다른 종류였다.
그렇다고 해도 썩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구체적으로는··· 그래.
예전에 나를 굴러온 돌처럼 보던 어떤 선배의 눈이 저랬던 것 같은데.
‘설마.’
이도나는 애써 착각으로 넘기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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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작가와 긴 논의를 한지 며칠 뒤, 사무실에는 또다시 불청객이 찾아왔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요즘 감독들 중 제일간다는 패기의 이현석 대표님 아니신가?”
익숙한 거구의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적당히 하십쇼.”
“아무렴, 적당히 하고말고! 어떻게 내 주제에 미국 따위 지방방송은 신경도 안 쓰시는 분의 말씀을 거역하겠어?”
남자는 껄껄 웃어댔고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김전감 CP님?”
“어허, 아직 PD야. 어딜 사람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려고!”
김전감 PD가 얼굴을 굳혔다.
“아니면 그건가? 천하의 이현석 피디님께 나는 길가의 돌멩이쯤 되는 건가? 그거 몰라뵈었구만!”
“······.”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다.
나는 골이 아파졌다. KBC 시절 여러모로 신세를 진 양반만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쫓아냈을 텐데.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 양반은 내가 신세를 진 이상으로 조연출 시절 날 굴려먹었던 거 같은데. 내가 딱히 빚을 진 게 아니지 않나? 그냥 쫓아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고민하던 찰나 김전감 PD가 씩 웃었다.
“그나저나 왜 왔냐니, 저번에도 한 번 찾아왔던 것 같은데? 나 고용할 마음 없냐고.”
“···그거 진심이셨습니까?”
“진심이었지, 당연히.”
나는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비록 김전감 PD가 KBC에서 아웃사이더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쌓은 명성은 결코 적지 않다.
이제 CP로 올라가서 조금 편해질 찰나에 이런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곳으로 적을 옮긴다니,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곧장 못을 박았다.
“혹여 이번 『연극처럼』 시리즈 같은 대규모 건을 생각하시는 거면 당분간은 무리일 겁니다.”
애초에 그럴 작정으로 작정하고 저 양반이 지금 놀려먹고 있는 발언을 내놓은 것이기도 했다.
“음··· 그건 좀 아쉬운 일이군.”
김전감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가 한 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뭔 소리 말입니까?”
“뭐냐니, 결국 주로 자국에서 소비되고 평가되는 드라마가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에서 이러쿵저러쿵 헛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 말이다.”
“······.”
가만히 돌이켜보았다.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런 있어 보이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네 의도도 대충 알고 있다. 김경숙이는 좋거나 나쁘거나 서수현과 함께 원로로는 양강이지. 그런 김경숙을 새롭게 해석해서 이 바닥에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거 아니냐?”
“···전혀 아닙니다.”
어느 쪽이냐면 반대로 그 아주머니가 쌓아온 경험을 빌리고 싶은 상황이다.
“흐흐, 뭐 그런 걸로 해 두자.”
헛소리를 지껄이던 김전감 PD는 이제는 황희 정승이 빙의한 마냥 ‘좋지, 좋아’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음.
생각건대 고민의 여지조차 없었다. 나는 단매에 그를 내쫓을 뜻을 굳혔다.
“죄송하지만······.”
“김경숙 작가는 노인네지.”
내 태도를 예상했다는 듯 김전감 PD가 툭 내뱉었다.
“소식은 들었다. 너와는 많은 점에서 충돌이 있을 거 같은데, 아니냐?”
“그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김경숙 작가로서는 충분히 저자세로 나와주고 있는 요즈음도, 아니, 요즈음이기에 더더욱 나와 그녀간의 메울 수 없는 도랑이 느껴지곤 했다.
“알다시피 나는 배동기놈 덕에 KBC에서 대개 짬처리 담당이었지. 꼰대를 달래고 맞춰주는 데에는 도가 텄고.”
김전감 PD가 으스댔다.
“넌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으음······.”
나는 고민에 잠겼지만 쉬이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할까요, 선배님?’
[···뭘?]‘김전감 선배님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건 수년간 같이 일한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점이었다. 그 서수현 작가와도 별 문제 없이 합을 맞춘 적이 있으니 지금 한 말에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한때의 상사를 밑에 두고 일한다는 게 이래저래 문제가 있을 것 같은 감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김철 선배가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거기에 따라 나도 표정을 굳히는데 정작 나온 말은 엉뚱했다.
[나도 김씨다.]‘···네?’
[나도 선배고.]‘아··· 네. 그렇지요.’
나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 소리지, 선문답인가.
어째선지 김철 선배가 그런 나를 몹시 마뜩찮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튼 선배는 이유를 알 수 없이 툴툴대긴 했지만 김전감 PD를 받아들이는 데는 일단 동의했다.
“뭐, 그렇게 됐으니··· 대표님이시니 존댓말 쓰는 게 좋을까요?”
“관두십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전감 PD가 킬킬 웃었다.
“그래서, 새 기획을 시작한다는 건 『연구일지』는 거의 끝난 거냐?”
“아직 좀 남았습니다만··· 뭐, 더 손을 댈 구석은 많지 않습니다.”
시나리오는 완성되었고, 촬영 방향도 확정되었다. 더해 막판을 화려하게 장식할 CG는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하니 이제는 일정을 굴리는 일만 남은 셈이다.
김전감 PD는 나와 김경숙 작가와의 기획을 살펴보고는 눈을 퉁방울만하게 떴다.
“굉장하군··· 너한텐 조련사로의 자질도 있는 것 같은데? 그 양반이 이 정도면 엄청 양보한 거야!”
그는 거듭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쓰던 사표나 마주 쓰고 오마. 그 다음에 작가도 만나보고··· 그런데 이건 뭐냐?”
“아······.”
김전감 PD가 지적한 내용을 본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인공이 이중인격이니까 악역은 삼중인격으로 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김 작가님도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몇 안 되는 나와 김경숙 작가가 의견이 맞은 케이스였다.
내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눈을 끔벅이던 김전감 PD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 그러니까··· 뭐가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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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지아 팬카페를 관리한다는 중책을 맡은 최미나의 수고는 최근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 이현석은 또라이이며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 사회자가 당황해서 커버치려고 두 번 세 번 되묻는데 노빠꾸하는 상남자 보소ㅋㅋ
– 이 피디님 미국으로 나른다는 소리 어떤 분이 하셨었죠? 눈깔이 삐신 듯!
한때 욕으로 도배되던 모습은 간 데 없고 이번 사태를 재미있어하는 이들만이 남아 날뛰었다.
다만 유지아 이야기가 쏙 빠지고 다른 사람 이야기로 도배되는 상황도 최미나에게 있어서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최소한 드라마는 유지아와의 연결점이라도 있지 않던가?
그렇게 시원찮은 상황에 최미나는 유지아를 교실에서 슬그머니 찔러보았다.
“그··· 지아 너는 수시 1차 어떻게 넣었어?”
“응? 그건 왜?”
“아니, 그냥.”
수시 1차에서 붙으면 수능에서 최저등급을 맞추는 정도로 충분하거나, 일부 경우는 아예 볼 필요도 없다. 최미나는 유지아가 한시라도 빨리 활동을 재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제 코가 석자인 본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지아는 이내 그러려니 대답했다.
“그러니까, 어디 넣었냐면······.”
유지아가 읊는 리스트를 들은 최미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전부가 단순한 인서울권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톱클래스의 대학들이었다.
“진짜로······?”
“진짜로.”
“최근 성적 오른 건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 간 거 아냐?”
유지아 정도의 실적이라면 중위권 대학 정도는 전형에 따라 쉬이 패스가 가능한데도 그런 궁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리스트들이었다.
유지아는 조금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기는 한데··· 나 최근에 예린이 언니랑 이도나 씨랑 만났었거든?”
“응, 들었어.”
“거기서 말이야. 지금이 기회다 싶어서.”
···대체 무슨 기회?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미나에게 유지아는 멋쩍게 웃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그, 저번에 내 팬카페가 있다고 했잖아?”
“어··· 있지.”
최미나는 조금 켕기는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혹시 사람이 백 명 정도는 될까?”
“···그거야 넘겠지.”
백 명 좋아하시네. 며칠 지나면 거기에 천 배를 해야 할 판인데.
뺨을 긁적이는 친구의 순진한 소리에 최미나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게 왜?”
“그, 거기에 좀 올려봤으면 하는 게 있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