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4)
014 – 사마귀가 수레에게 앞발 들고 개기다
본격적으로 크랭크 인에 들어간지도 어언 2주가 흘렀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어휴······.”
서을용 배우가 대본으로 얼굴을 부치며 걸어 나갔다.
근 34도에 가까운 기온. 로케이션을 돌리기엔 더운 날씨다.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조영철 촬영감독이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았다.
원래부터 마땅치 않아했던 이광도 조명감독에 이르러서는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다.
“고생하셨어요, 선배님. 그래도 열 번 안에 끝내셨네요.”
“고생했지, 그야.”
서을용이 투덜거리면서 물을 받아 마신다. 60에 가까운 고령으로서는 힘들겠지.
정작 그 물을 건넨 최순영도 5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서을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이쪽을 보며 외쳤다.
“거 감독 양반. 살살 합시다, 살살!”
“죄송합니다.”
“거 씬이 기가 막히게 나오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무어라 말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기는 나도 적당히 끝내주고 싶었다. 애초에 막장 드라마에 뭔 신들린 연기가 그리 필요하겠는가?
[제기랄··· 이거보다 더 낫게 뽑을 수 있으면서 뭘 저리 엄살질이야.]뒤에서 투덜거리면서 눈을 홉뜨고 있는 유령만 아니라면 말이다.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는 간간히 조언만 던지며 적당히 방관하던 김철 선배는 본격적인 프로덕션 과정이 되자 더 이상 참아내지 못했다.
일단 콘티 작성부터가 난항이었다.
[거기서 곧장 미디엄? 제정신이냐? 달리 뒀다 뭐하냐, 롱에서 타이트풀까지 팍 들어가야 박진감이 있을 거 아냐?] [이런 이미지라인은 그냥 넘겨버리는 거다, 이 곰탱아! 블로킹에 묻어가면서 생동감을 확 살려야지!] [뭐? 루킹룸? 리드룸? 씬에 절대적인 법칙이 어딨냐. 이거 달려야 할 씬이다 싶으면 걍 흔들어버려도 돼!]제아무리 존경하는 선배기로서니 코앞에서 지적질을 당하면 나도 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면 마이크 때문에 헤드스페이스가 안 나오죠!’
[그럼 걍 무선마이크 달면 되지, 멍청아!]‘어이구, 사운드가 잘도 맞물리겠습니다. 후처리는 생각도 안 하세요?’
콘티를 작성하는 동안 나와 선배는 계속 서로 침을 튀겨가며 다투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크다. 영화감독인 김철 선배와 드라마 PD인 나는 결국 의견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 촬영에 들어가보면 열에 아홉은 김철 선배의 생각이 낫긴 했지만.
과연 3대 영화제 그랜드슬램의 칭호는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었다.
물론 선배는 거기에 잘난 척을 하기는 커녕 실제 촬영에서 더욱 화를 내기에 바빴다.
[정태수 저거 지금 설렁설렁 하는 거야! 몰입하면 얼마나 감정씬 잘 뽑는 놈인데 저러고 유도리를 부려?! 야, 현석아! 가서 저 새끼 다리를 분질러버려!]‘예, 예. 진짜 다리를 분지르면 5년 뒤에 선배랑 저 사이좋게 뒈집니다. 진정하세요.’
적당히 오케이하고 싶어도 김철 선배가 뒤에서 난동을 피우면 나도 영 별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리테이크를 주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나쁘지 않다.
“헉, 헉······.”
“어이구, 애 잡겠네, 잡겠어.”
‘에어리즈’의 한유미가 30번의 리테이크 끝에 오케이를 받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내 벌떡 일어선다.
“감사했습니다!”
한유미가 쪼르르 달려갔다. 노배우들이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자 땀이 범벅이 된 몰골로 활짝 웃는다.
“저거 의외로 독종이네. 생각보다 연기력도 괜찮고.”
조영철 촬영감독이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는다.
까딱하면 입덕해버릴 것 같은 싱그러운 모습이다.
“비하인드로 넣으면 좋겠군요.”
내 말에 조 감독이 씩 웃었다.
“자신 있어? 현석이 자네한테 팬들 악플이 폭주할 텐데?”
“아니, 제가 뭘 했다고요?”
“이봐,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같이 일하기 제일 까다로운 놈 1순위는 전감이 녀석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슬슬 그 확신이 흔들리려는 참이야. 알겠나?”
“······.”
조 감독이 혀를 쯧쯧 찼다.
나는 억울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김전감 PD만 하겠는가. 내가 그 양반한테 퍼먹은 욕이 얼만데.
“뭐, 그래도 촬영장 분위기는 좋잖습니까. 결과가 괜찮게 나오니까. 햐, 누가 형님 보고 입봉작 찍는 PD라고 생각하겠어요.”
지나가던 민재 녀석이 낄낄대고 웃었다. 현 AD중 최고참인 만큼 녀석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대본 리딩때 형님이 하셨다는 말 듣고서는 살짝 맛이 가신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뭐 임마?”
“하하, 근거 있는 자신감이셨다고요. 일하러 갑니다!”
민재 녀석이 후다닥 뛰쳐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촬영장의 분위기는 좋았다. 배우들이 고생하면서도 만족해하니 처음에는 미심쩍던 스태프들의 표정도 밝다.
각본으로는 엉망진창으로 보이던 씬이 실제로 옮겨지니까 생각보다 그림이 괜찮았던 탓이다.
“그래도 시청률 한 7퍼센트까지는 비벼보지 않을까?”
“에이, 난 높게 본다. 9퍼센트!”
종종 긍정적인 전망도 나왔다.
···저걸 긍정적인 전망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아무튼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순조로운 꼴을 못 견뎌하는 이도 있었다.
어느 날, 촬영을 얼추 마쳤을 무렵이었다.
“어이, 이현석이! 있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기하고 있던 최도진도 얼굴을 굳힌다.
간만에 제대로 들어간 씬이었는데.
“잠깐, 지금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돌아보자 웬 녀석이 촬영장에 건들거리며 난입하고 있었다.
배재윤이었다.
“비켜! 어어? 안 비키냐? 어딜 조연출 주제에······.”
막으려던 민재 녀석이 흠칫 하며 물러섰다. 뒤에서 배동기 CP가 헛기침을 하며 따라 들어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마지못해 그들을 맞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배동기 CP가 턱짓을 했다. 배우들 눈 없는 곳 가서 얘기하자는 뜻이다.
별로 좋은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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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촬영이 얼추 끝날 무렵이기도 해서 배우들은 그냥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러니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촬영 막 시작한 판에 스태프 절반을 빼가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어쩔 수 없지 않나.”
배동기 CP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1팀 쪽에서 인력이 부족하다고 난리야. 내가 틀어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개뿔.
“···지금 저희 기획도 평균의 8할 정도의 숫자만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남은 스태프들은 다 휴가라도 갔답니까?”
그나마도 김전감 PD 입김으로 간신히 채운 숫자다.
배동기 CP가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사회생활 하겠나. 우리 월화 10시가 MBS하고 박터지게 싸우고 있잖나. 이미 최대한 긁어모아서 1팀 지원하라고 국장님께 지시도 받았네.”
“······.”
그 국장이 멀쩡하게 꾸려진 팀 스태프 뽑아가라는 소리는 안 했겠지.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자네들 건 내놓은 기획 아닌가? 스태프 좀 줄어든다고 별 차이도 없는 거 그냥 좀 양보하게나.”
이쯤 되면 반쯤 통보다.
[이런 씨발··· 별 미친 개새끼가··· 야!]김철 선배는 자신이 유령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원통한 듯 가슴을 땅땅 치고 있다.
웃기지도 않은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눈엣가시로서니 설마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오나.
생각지도 못한 졸렬함에 뒤통수가 얼얼해있는데 뒤에서 또 다른 놈들이 등장했다.
“뭐, 그런 고로 이쪽은 오늘부로 빠집니다. 수고하십쇼.”
“···이광도 감독.”
배동기 CP 라인인 이광도 조명감독이 실실 웃고 있다.
내가 지시를 내릴 때마다 똥 씹은 표정이더니만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이다.
그 뒤쪽으로도 스태프들이 십여 명 가까이 줄을 서 있다. 미리 작업을 쳐 둔 거겠지.
대개 고참들이다. 심지어 나와 몇 년간 동고동락하던 AD 놈들도 몇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났다.
그렇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입봉 PD한테 의리 지키느니 배동기 CP 라인 타는 게 출세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진작에 내 말 듣지 그랬냐. 사표 쓰기도 늦었고, 어쩌냐.”
배재윤이 비웃음을 흘리며 나를 지나쳤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높인다.
“자, 1팀 『설빔』으로 옮겨가실 스태프분들 모십니다! 무궁화호 입석에서 KTX로 옮겨탈 기회! 성과급 빵빵하게 챙겨드립니다!”
···여기가 무슨 도떼기 시장통인줄 아나.
방송국 생활 평생 겪어본 적이 없을 괴상한 상황에 다른 스태프들이 얼떨떨하게 마주본다.
당연히도 스태프 편성은 저 따위로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기획서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검토하여 결정된다.
아무리 그 스태프 편성의 1차 권한이 배동기 CP한테 있다지만 이미 컨펌이 난 지금 이 상황은 말도 안 되는 폭거다.
···뭐, 폭거니 말이 안 되니 하는 건 대개 힘없는 놈의 논리니 별 의미는 없지만.
“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기회!”
배재윤이 한창 신이 나 있는 와중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죠?”
문득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 여자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배재윤이 반반한 얼굴에 잠시 눈을 깜박이나 싶더니 이내 히죽 웃는다.
“못 보던 얼굴인데, AD인가?”
“아니요.”
“그럼 FD?”
웃음이 더욱 깊어진다.
“너도 같이 와봐. 이런 망한 기획에 몸 담그고 있으면 같이 묻히는 건 시간문제야. 경력 쌓아서 나가야지. 내가 괜찮은 외주제작살 하나 아는데······.”
끈적끈적하게 다가간 손이 어깨에까지 닿는 순간이었다.
순간 그를 와락 잡아 끌어당기는 인물이 있었다. 배재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돌아보았다.
“아, 씨발 어떤 새끼··· 삼촌?”
배재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배동기 CP는 녀석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잘 잡았구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하나라도 우리 애한테 닿았으면 그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묻어버리려고 했는데.”
터벅터벅.
일견 평범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걸어온다.
하지만 그녀를 본 배동기 CP는 식은땀만 줄줄 흘릴 따름이다.
어지간한 배재윤도 그녀의 얼굴은 아는지 얼굴이 시퍼래졌다.
“서··· 서수현 작가님······.”
“······.”
“작가님께서 여긴 어떻게······.”
그녀는 한껏 미간을 좁힌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에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PD님. 조금 늦었죠?”
“아니오, 제때 오셨습니다.”
옷자락에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연신 털어내는 서예린 작가. 나는 그녀와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