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40)
강주연 매니저는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은 없었다. 익숙한 모양새로 열쇠를 꺼내들어 문을 열었다.
늘 그렇듯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살풍경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 싶어졌다. 기껏 소속사에서 큼지막한 곳으로 인심을 썼지만 이래서야 막 이사 온 집에서 황량한 창고로 되레 퇴화한 꼴이다.
“설아! 이설!”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담당 배우를 불러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침대에도, 화장실에도, 헤드폰이 걸려 있는 방에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혹시나 해 등받이로 가려져 있는 소파로 목을 빼본다.
“어휴.”
아니나 다를까, 새우처럼 등을 둥글게 만 채 쿨쿨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깨우려다가 달력의 날짜를 흘끗 보고는 그만둔다. 어차피 곧 일어날 터였다.
“으음······.”
그리고 역시나, 대략 한 시간쯤 지나자 이설은 꾸물대다가 몸을 일으켰다. TV에서는 막 『연구일지 속 보석함』의 오프닝 타이틀이 흘러나오던 즈음이다. 여전히 귀신같은 정확도였다.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던 이설이 그제야 눈치 챈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언니. 언제 왔어요?”
“방금.”
강주연은 그렇게 대답하며 흘끗 눈치를 살폈다.
최근 이설의 성격은 그야말로 양극단적이었다. 지금처럼 조금 심드렁하지만 평범한 태도로 접해올 때가 있는가 하면 매사에 단답형인데다 조금 다그치면 서늘한 눈으로 섬뜩하게 노려볼 때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아무튼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강주연이 들고 온 물건을 건넸다.
“김경숙 작가님께서 새로운 대본을 보내주셨어. 의견 좀 말해달래.”
“의견 말이죠······.”
시나리오를 받아든 이설이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반응이 제대로 돌아오는 게 다행히 오늘은 기분이 좋은 쪽인 모양이다.
“저보다는 감독님께 의견을 구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이현석 피디랑은 이미 충분히 친하신 것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이름에 나아졌던 강주연의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진다.
김경숙 작가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는 암만 그래도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싶었지만 둘은 어째 생각보다 원만하게 지내는 듯 싶었다.
하기는,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그 천만 배우 최대웅을 데려왔는데 줄곧 고자세로 나갈 수도 없겠지.’
그것만 해도 곳곳에서 수군거릴 정도로 놀랄 일이었는데 심지어 이설의 차기작으로 점찍어뒀던 곽태영 감독마저 드라마 진출을 선언했다. 도무지 의미를 모를 상황에 사람들은 놀람을 넘어 어리둥절해했다.
하여간에 이현석이라는 인간이 끼어들면 뭐 하나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그럴 시간에 제 드라마 마무리나 잘 할 것이지.’
결말을 눈앞에 둔 현재 논란이 최고조에 이른 『연구일지』에 대한 강주연의 심정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그녀는 명백하게 이현석을 싫어했으므로 발을 헛디딘 것이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감은 있었다.
하지만 조연으로나마 자기 배우가 출연하고 있고, 앞으로 새 기획을 같이 할 상황이니 그 평판이 나빠지는 걸 순전히 달가워할 형편도 못 되었다.
더욱이 강주연의 아버지, KDS 엔터테인먼트 대표, 강영철은 그를 쓸데없이 고평가하며 밀어주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저번에 잠깐 집에 돌아갔을 때는 이런 얘기까지 했다.
“야심과 능력을 모두 갖췄어. 그 친구한테는 걸어볼 만 해.”
“아빠 눈 삐었어? 백 보 양보해서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야심은 무슨 얼어 죽을 야심이야?”
기가 차서 반발하는 딸을 본 강영철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이 일을 못 물려주고 있는 거다, 주연아. 아직도 덜 배웠구나.”
“······.”
할 말은 많았지만 강주연은 꾹 삼켰다. 하지만 스스로가 그간 보아온 이현석이란 인물을 떠올려볼수록 그 말이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야심?
‘그냥 자기 내키는 대로 내달리고 드라마를 막장으로 만들고 싶은 야심이라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강주연 자신보다야 KDS를 현재의 규모로 불린 강영철 쪽의 시선이 보다 신뢰도가 높다는 것도 명백했다.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작 망하면 이쪽도 문제가 없지 않다. 그게 그녀가 이현석에 관해 속으로만 끙끙대고 있는 이유였다.
강주연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설아, 우리 얼마 전에 『연구일지』 촬영장 갔었잖아?”
“아··· 그랬었죠.”
“‘아’가 뭐야, 불과 얼마 전 일이잖아.”
강주연이 혀를 찼다.
“아무튼, 어때? 저거 스토리 수습될 거 같아?”
이설은 대답하지 않고 길게 하품을 했다. 재차 채근하자 귀찮다는 듯이 대답한다.
“언니가 직접 보면 되지 않을까요?”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에 옆에 앉아 TV를 들여다보던 강주연은 5분 후 중얼거렸다.
“···망했네.”
이번만큼은 사심이 담기지 않은, 일종의 감탄사에 가까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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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아, 너는 지금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걸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유강진의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 『연구일지 속 보석함』 45화는 당장에 뭔가 보여줘야 하는 상황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지를 골랐다.
강주연은 입을 떡 벌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상씬이라니··· 좋은 분위기에 나와도 속도감 깨진다면서 좋은 평가를 못 받을 텐데.”
그간 이현석이라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자주 해왔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심지어 회상도 유강진이나 다른 인물이 아니라 여주인공 윤가연의 과거를 다시금 되짚고 있다.
어릴 적 눈 내리는 설원에 버려져, 좋은 양부모에게 주워졌다. 하지만 금세 사별해, 남주인공 김성재를 만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나열해보면 가엾기는 하지만 후반부의 행보는 개연성이 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공감하기에는 지금 늘어놓고 있는 내용은 기존 촬영분의 재탕이다. 핸드폰을 흘끗 들여다보면 인터넷상의 여론도 좋지 않았다.
– 회상ㅋㅋ 그냥 이대로 급전개로 마무리하려나보네
– 솔직히 끝까지 윤가연이 뭔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음;
– 나는 미국 프리퀄과 연계하는 것도 괜찮았다고 보지만··· 이래서야 안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 근데 뭔가 지금 지나가는 장면이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데?
ㄴ 그만 쉴드 쳐라. 추하다..
ㄴ 아니야, 나도 아까부터 보고 있는데 기존에 나온 거랑 미묘하게 배경이나 인물이 달라.
ㄴ 퍽이나 다르겠다ㅋㅋ
강주연이 핸드폰을 집어넣은 후에도 회상은 한동안 이어졌다.
장면은 간신히 끝나는가 싶더니 주르륵 거슬러 올라가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처음의, 눈 내린 곳에 한 아기가 버려져 있는 씬이다.
그걸 강조하듯 비춰준 후 장면이 돌아온다.
「왜 내가 화를 내고 있냐고? 당연하잖아! 나는 버려졌었어!」
화면 안의 윤가연의 눈이 번들거린다. 연기력은 훌륭하지만 구성이 이렇다보니 그리 공감은 가지 않는다.
「시설의 수녀님은 조금만 더 방치되었다면 내가 죽었을 거라고 했어. 자라면서도 한 번도 좋았던 기억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반드시 복수하려고, 그러기 위해서 살아왔었어. 그런데 뭐? 왜냐고?」
「네 분노는 이해해. 그게 진짜라는 것도 이해하고.」
유강진이 곤란한 태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일단 뭐니 뭐니 해도 네가 그 연구일지의 주인이라는 게 그 사실을 증명하니까.」
「···뭐?」
생뚱맞은 소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윤가연에게 유강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뭐, 원한다면 날 죽이던, 어떻게 하던 괜찮아. 너에겐 그럴 권리가 있으니까.」
「···이상하게 순순하네.」
「그 전에, 내가 사실을 전달할 수 있게 해주면 고맙겠어. 일단 이것도 내게 주어진 의무거든.」
「변명을 하겠다는 거네. 좋아.」
윤가연이 눈을 가늘게 뜬다. 무슨 헛소리를 하든 듣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그걸 보는 유강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정말 난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표정이다.
「음, 이렇게 말하는 게 알기 쉽겠지.」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결정한 듯 입을 연다.
「삼백일흔네 명.」
의미 불명의 숫자에 윤가연이 눈을 깜박인다.
「뭐?」
「삼백일흔 네 명이야. 너와 같은 엄동설한에서 실제로 죽은 아이들의 숫자는. 뭐, 전체의 3할 정도려나.」
「무슨······.」
윤가연이 눈을 깜박인다. 유강진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어떤 버튼을 누른다.
디스플레이에 무언가가 떠오르나 싶더니 그곳 대신 어디선가 낡은 앨범이 스르륵 올라온다.
「어디 보자··· 여기 있네. 참 옛날 방식을 좋아한다니까.」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던 유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가연에게 건넨다.
거기에 있는 건 당연히 사진이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수백 장의 사진은 전부 똑같은 걸 복사한 것처럼 보인다.
눈이 새하얗게 쌓인 설원, 거기 버려져 있는 아기.
하지만, 명백히 다르다.
「아······.」
눈살을 찌푸리던 윤가연은 이내 그걸 깨닫고는 멍하니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구도가 다르다. 아기의 혈색이 다르다. 해가 떠오른 정도가 다르다. 그림자가 다르다. 눈이 쌓인 정도가 다르다. 바람에 옷자락이 떠오른 정도가 다르다.
윤가연은 멍하니 앨범을 넘겼다. 구도는 똑같다. 누가 보면 똑같은 걸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하게, 서로 다른 수천 장의 사진이 찍혀 있다.
유강진이 설명에 나섰다.
「내 어머니··· 뭐, 그렇게 말해도 세포를 좀 빌렸을 뿐이지만, 아무튼 정하늘이라는 사람은 말년에 좀 돌아버렸던 모양이야.」
「······.」
「한지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 누군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떤 사람인지도. 하지만 어쨌거나 정하늘은 그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이미 죽었지만 말야, 하고 유강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연구일지가 펼쳐진다. 이전 유강진이 읽어준 내용이 클로즈업 되며 스쳐지나간다.
– 그리고··· 가능하면 어딘가의 시대에는 살아있다고 믿는 그 녀석이 이걸 발견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윤가연에게 유강진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래서, 정하늘은 그 사람을 ‘만들려고’ 했어.」
「···그만.」
「뭐라고 했니?」
「그만해······.」
윤가연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는 어떠한 것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뚜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네가 듣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거니까.」
그리고 유강진은 자신이 말하는 내용에 어떠한 것도 느끼지 않고 있는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공연하게 섬뜩함을 자아냈다.
「그 사람은 한지원에게 뭔가 힘을 건네받은 모양이야.」
「그래서 정하늘은 그 힘을 받은 자신의 세포 어딘가에 그 사람과의 견결이 남아있을 거라고 믿었어.」
「말인즉슨, 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거지.」
「사실이야 어찌됐든 정하늘은 그걸 실험에 옮겼어. 자신의 세포를 활용해 만 명 가까운 ‘자식’을 만들어냈고, 전부 동일한 기억과 배경을 씌웠지.」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작용권(Ergosphere)을 활용해 가장 가까운 공간을 찾아 시공간 너머로 날려버렸고.」
유강진이 빙그레 웃었다.
「이쯤 되면 알겠지? 네가 들고 있는 연구일지가 어떤 연구에 대한 기록인지.」
윤가연은 멍하니 자신이 그동안 생명줄과 같이 믿고 의지해왔던 작은 노트를 바라보았다.
그간 이해할 수 없었던 암호와 같은 내용들이 ‘트리거’가 작동한 것으로 인해 풀려갔다. 내용을 본 윤가연은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았다.
「보다시피 많은 실패가 있었어.」
그녀가 집어던진 연구일지를 주운 유강진이 우스운 듯 설명했다.
「말했듯이 엄동설한이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죽어나가는 경우가 제일 많았어. 거의 성공했는데 워프가 실패해서 배꼽만 남은 경우가 있었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른 인격이 자리를 차지해서 꼬인 경우도 있었고.」
화면이 변했다. 유지아, 김경숙의 양대 작가가 조언하고 PD가 있는 힘껏 벼려낸 회심의 장면들이 연속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 장면임에도 웃기지도 않았고, 황당하지도 않았다. 상황이 갖춰지니 그것들은 그저 한없이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아ㅡ
그 장면을 본 강주연은 처음으로 이현석의 어떠한 재능을 눈치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 연구일지는 후보들 중 가장 한지원에게 가까운 존재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도록 되어 있어. 정하늘은 그 최종 후보자에 한해 어떤 가상세계에 접속하도록 장치도 했고.」
「······.」
20화 중반, 자신을 ‘한지원’이라 자칭하던 정하늘과 만났던 장면이 컷백 기법으로 스쳐지나갔다.
「너는 그 모든 시험을 끝냈고, 따라서 완전한 한지원이 되어야 했지만 말야.」
하지만, 하고 유강진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완전히 실패한 모양이네.」
유감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전혀 유감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뭐, 저 찬란한 벌칸 문명의 시조라고는 해도 제정신이 아닌 인간의 실험은 이런 정도려나.」
「···게.」
「응? 미안해,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주겠니?」
「뭐야, 그게······!」
윤가연이 벼락과 같이 울부짖었다.
「나를···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들은!」
외치는 표정이 얼마나 처절하고 흉악했던지 화면 안을 빨려갈 듯 바라보고 있던 강주연이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글쎄.」
거기에 반해 어깨를 으쓱이는 유강진은 여전히 정적인 태도였다.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로봇이나 인형을 데려다놓은 것 같았다.
애초에 그걸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행보가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며, 섬뜩함이었다.
「불행히도 이제 그걸 물어볼 사람은 없는 것 같네··· 그보다 나는 언제 죽일 거니?」
강주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