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41)
「너는······.」
화면 안의 윤가연의 표정은 복잡했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하고 있었지만 눈가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경련이 일지 않는 곳이 없었다.
카메라는 딱히 복잡한 술수 없이 그 광경을 먼 시선으로 담담하게 담아냈다.
「너는 죽는다는 말을 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아마 그걸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유강진이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아까 전에 신호를 보내봤어. 사실은 예전에도 몇 차례나 보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바보 같은 실험의 생존자는 우리 둘이 마지막인 모양이야.」
「······.」
「더해, 네가 활용할 세력을 구축해두고, 이번에 그 멍청한 미사일을 날리는 걸로 마지막 과정도 끝난 셈이고.」
유강진이 빙그레 웃었다.
「축하해. 이제 나까지 처리한다면 네가 최후의 성공작이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화려한 축하가 예정되어 있었을 텐데··· 나 하나라선 도리가 없네. 유감이야.」
표정이 변한다. 예전, 남주인공 김성재와 윤가연이 다툴 때 종종 짓곤 하던 안타까운 표정이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간 윤가연의 표정은 몇 번이고 고뇌에 따라 변했다. 반면 유강진의 표정은 점토를 빚어 만들기라도 한 듯 단 한 번도 변하거나 미끄러지지 않는다.
윤가연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는, 뭔가 하고 싶은 건 없는 거야? 그 뭔지 모를 계획이 끝난 걸로 충분해?」
「뭐, 그렇지.」
「······.」
「앞서도 말했지만 생존자는 우리 둘뿐이고, 그 사람이 건국할 찬란한 문명도 멸망이 확정되어 있으니까 말이지.」
「멸망?」
「어이쿠, 이건 말하면 안 되는 종류였나.」
유강진은 실수했다는 얼굴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내 아무래도 좋은가, 하고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봬도 나는 충분히 너한테 감사하고 있어. 그 멸망의 요인을 따져보면 너는 충분히 우리의 빚을 갚아준 셈이거든.」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윤가연에게 대답 없이 웃음만 돌려준다.
동시에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벌칸의 몰락』의 주요 장면들을 간소하게 데포르메한 것 같은 씬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간 비판의 주축이 되었던, 이른바 악의 제국과 같은 모습을 그러모아 몇 배로 농축해놓은 것 같은 장면들이다.
십이궁 – 조디악은 평화롭고 선량한 이들이 모인 벌칸을 침공하고, 불태우고, 학살했다. 그것이 프리퀄 『벌칸의 몰락』의 스토리의 모든 것이었으며, 실로 알기 쉬운 선악구도의 대립이었다.
여기서 악이 주인공 세력이었다는 것이야말로 그간의 반발을 낳은 원인이었다.
「물론 그게 썩 정의로운 과정은 아니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
유강진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정리했다. 그러면서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꼴좋다.」
「······.」
딱히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다.
물론 듣는 사람을 진동시키는 힘이 들어간 어조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45화를 달려오며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표정이며, 말투였다.
그리고 그 별 것 아닌 변화는 일순간에 극의 분위기를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의 힘이 있었다.
#
“······.”
화면 밖의 강주연은 멍한 표정이 되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이설이 툭 내뱉었다.
“팬카페 가입하실 거예요?”
“누가!”
강주연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아뇨, 언니가 방송에 『로켓맨』이 나올 때랑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으시길래.”
어마어마한 반발을 접한 이설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님 마는 거지 왜 저러나, 하는 투다.
그런 태도에 강주연은 되레 멋쩍어져 애꿎은 자신의 팔뚝 살만 꼬집었다.
헛소리가 따로 없었다. 누가 저렇게 애매하게 생긴 배우를.
“···엉망진창이야.”
다시금 눈이 가는 걸 애써 참아내고 악담을 내뱉는다.
“뭐야, 이게. 제정신으로 이런 스토리를 짠 거야?”
“뭐, 확실히 멀쩡한 것 같지는 않네요.”
“그렇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빠져들어서 보시기도 했고요.”
“······.”
다시금 팩트에 얻어맞은 강주연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히 이도나의 연기는 대단했고, 유명우에 이르러서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연기를 살린 데는 연출의 공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아버지를 목표로 하는 몸으로 강주연은 그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현석의 방식은 여전히, 오히려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정하늘의 행동은 이해가 안 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강주연이 기분을 몰아내듯 빽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없어졌으면 환경을 조성해서 똑같이 만들면 된다니, 어떤 미치광이가 저런 생각을 하겠어?”
“그런가요?”
이설은 묘하게 켕기는 태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뭐, 코너에 몰리면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싶은데요······.”
#
나는 미국 쪽 프리퀄, 『벌칸의 몰락』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언급했듯 프리퀄 제작진들은 시리즈의 설정을 홈페이지에 따로 정리해두고 있었다. 『연극처럼 살다』로부터 시작해 『벌칸의 몰락』으로 마무리되는 역순행적으로 그려진 연표도 그중 하나였다.
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작가인 지아 본인조차 가끔 까먹고 참고하곤 하는, 실로 공신력이 높은 자료였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데다 노력을 쓰는 거냐, 얘네들은.]하지만 오늘 보니 그 수수한 연표가 이제는 쓸데없이 화려한 효과가 한가득 첨가된 나선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클릭에 따라 빙그르르 돌며 기준 시간대가 바뀌고, 『연구일지』의 윤가연이 그 나선의 주축을 차지하고 있다.
[쓸데없이 기삿거리가 하나 늘었구만.]“······.”
나는 딱히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침묵했다.
사실 말하는 건 물론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었다.
– 스토리 제정신임? 이건 후속작 수준이 아니잖아;
– 여러모로 미친 스토리, 다른 의미로 미친 연출과 연기력······.
– 이 정신 나간 전개 하려고 초장부터 복선 쳐깔아둔거 보소. 기가 차다
– 진작에 정하늘 그 미치광이를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우리가 킹갓엠페러 한지원님의 뜻을 몰라뵈었음ㅋㅋ
ㄴ ㅇㄱㄹㅇ ㅂㅂㅂㄱ
논란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스토리에 일부 시청자는 화를 냈으며, 일부는 호평을 내놓았다. 어떤 이들은 시리즈 전체의 전개를 짜 맞추려고 들었고, 그 과정에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일부는 그걸 감상하며 팝콘을 뜯었다.
여기에 기삿거리를 찾는 기자들이 끼어들고 실검에 올라서며 『연구일지』는 비로소 시청률 벽을 넘겼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 45화의 방영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를 집계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평균시청률 40.3%, 시청자 중 해당 드라마를 막장이라 생각하는 비율은 68%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계획대로가 아니었다. 김철 선배는 놀란 기색이었다.
[와··· 어째 생각보다 선방했는데?]마치 막장도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이 나의 미학을 몰라보지 않는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메시지를 받은 날 곧장 편집실에 진을 쳤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내게는 싸울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내 차기작에 출연할 천만 배우 최대웅에게서 연락이 걸려왔다.
– 하하, 이 감독님! 여기까지 하신다고는 말 안 하셨잖습니까?
전화기를 들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웃음에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자제하려고는 했지만 영 어울려줄 기분이 아니니 말은 절로 퉁명스럽게 나왔다.
“뭐가 말입니까? 저번에 말씀드린 그대로잖습니까.”
– 흐흐, 한 가지 더 나가신 게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 회상씬 중간에 끼워 넣은 것들, 죄다 김경숙 작가 스타일의 막장드라마 클리셰 아닙니까?
“······.”
뭐, 정확히는 지아의 도움도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기분은 확연히 나아졌다. 한껏 힘을 준 씬이 그대로 묻힌 모양새에 침울했었지만 역시나 재사(才士)된 자는 알아보는 법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다음 화에는 비중과 범용성을 넓히면 되겠지 – 내가 그렇게 내심 방안을 궁리하고 있던 때였다.
최대웅이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 하여간에, 아는 사람들이 다 난립니다. 이 감독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예?”
– 이번 건, 김경숙 작가 저격하면서 대놓고 선 그은 거 아닙니까?
······?
나는 눈을 끔벅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 흐흐, 시치미 떼봤잡니다. 그 사람 드라마에 쓰일 만한 클리셰를 죄다 때려 박고 상황과 연출로 굴렸지 않습니까? 대놓고 싸워보자고 출사표 던진 거 아닙니까?
아니, 진짜 뭐라는 거야.
나는 어찌됐든 이 헛소리를 진화해야겠다 싶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 막장 대모라고 불리는 사람하고 차기작 가면서 져줄 생각 없다고 저지르는 패기! 캬, 역시 제 생각대롭니다. 하여간에 이 감독과 있으면 재미없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불행히도 최대웅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인종이었다.
내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는 와중 그는 열심히 자기 할 말만 늘어놓고는 끊어버렸다.
이 머저리를 무시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다음에 전화를 걸어온 이는 뜻밖에도 곽태영 감독이었다.
– 그 사람에게 대놓고 싸움을 건 배짱은 솔직히 존경스럽습니다만···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
무어라 말하기도 뭐한 아주 진지한 위로와 격려였다.
어찌어찌 답례하며 전화를 끊자 이번에는 KDS 강영철 대표의 전화가 울렸다.
“제기랄!”
이쯤 되면 도리가 없었다. 내 해명보다도 입이 빨랐고, 그 입들은 기삿거리에 눈이 벌게진 기자들을 타고 금세 고속으로 퍼져나갔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녀석이 있으니 결과야 말할 것도 없었다.
『방영 외적인 요소로 변동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시청자 중 ‘연구일지 속 보석함’을 막장이라 생각하는 비율은 49%입니다.』
내 망연한 표정을 본 김철 선배가 훗, 하고 웃었다.
[괜찮다, 현석아. 너도 나랑 같이 유서나 써두자꾸나.]“···유령이 유서 써서 뭐 하시려고요.”
내가 기가 차서 묻자 김철 선배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예전에 죽기 전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서를 못 남긴 게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내 필체로 미리 써두면 그 소원을 푸는 셈이지.]“사기 아닙니까······.”
내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일단 김경숙 작가 본인과 이야기해 오해를 풀 생각이었다.
– ···패기가 좋더군요. 원고를 수정할 시간을 좀 줬으면 하는데.
말할 것도 없는 실패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