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5)
015 – 사마귀가 수레에게 앞발 들고 개기다(2)
서수현.
지금에야 아무래도 좀 위세가 떨어졌지만 전성기 때는 기분을 상하게 한 것만으로 방송국 사장이 직접 방문해 사과를 한 일화가 있을 정도의 거물 작가다.
본인의 네임밸류도 그렇지만 거느린 ‘사단’에 속한 배우들도 하나같이 대단해서 국장도 못 단 CP가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그런 거물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한때 KBC를 내 앞마당처럼 여겨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이 좀 희한한 전통이 생겼구만. 요즘은 촬영 시작한 드라마에서 사람을 멋대로 빼가나 보지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꼴은 뭡니까?”
배동기 CP는 무어라 변명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배재윤이 얼른 나섰다.
“아닙니다, 작가님. 이건 1팀 기획이 인원부족이라 어쩔 수 없이······!”
“조용히 해. 어딜 양아치 같은 것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양아치’라는 거친 표현치고는 크게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오히려 굉장히 담담하고 부드러운 어조.
그리고 난 조카인 서예린 작가와 합을 맞춰본 경험이 있어 알 수 있었다.
저건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징조다.
“아무렴 내가 너 따위보다 방송국 물을 덜 먹었을까봐 친절하게 가르쳐주려는 거니?”
“그······.”
하지만 배재윤은 몰랐고, 허둥지둥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 입을 배동기 CP가 얼른 틀어막았다.
···조금 아쉬웠다.
“죄송합니다! 애가 아직 어려서 뭘 모릅니다.”
“그래. 잘 좀 가르치도록 해요. 나이 먹고 저러고 다니면 부모 품성이 의심받아.”
“···예.”
“그리고 사과할 상대가 하나 더 있지 않나?”
서수현이 턱짓하자 배동기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에 가득 찬 시선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CP 직책을 고스톱으로 딴 건 아닌지 배동기는 결국 표정을 굳히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이 PD. 상황이 너무 급해서 내가 무리수를 던진 것 같아. 내가 한 말은 모두 철회하겠네.”
“받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주억였다.
“근데 저기 저 사람들은 좀 바꿔주셔야겠습니다. 이쪽 싫다는 사람들 굳이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죠.”
안 그래도 어거지로 그러모은 스태프들의 역량부족이 여실히 느껴지던 중이다.
지금이라면 어지간한 에이스들로만 도배해도 배동기 CP는 들어줄 수밖에 없겠지.
좋은 기회다.
“가능하면 내 눈에도 띄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고.”
서수현 작가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합을 보탰다.
“드라마 가지고 정치질하는 거, 난 정말이지 질색이니까요.”
이광도 조명감독과 뒤에 나래비를 선 스태프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서수현 작가의 ‘눈에 띄지 말라’는 소리는 본인뿐 아니라 본인 사단에 포함된 배우들 역시 이광도 등이 제작진에 포함된 모든 드라마를 보이콧하겠다는 얘기다.
사실상 사형선고다.
“그, 그건······.”
애원하는 눈으로 배동기 CP를 보다가 이내 나를 돌아본다.
[어딜 눈깔을 뜨고 보냐. 감독 이름 달고 기획에 참가한 주제에 정치질이나 하는 쓰레기 놈이.]김철 선배가 욕설을 퍼부었다. 조금은 시원해진 표정이다.
음.
서수현 작가가 여기까지 하는 건 나로서도 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뭐, 도리가 있나. 오랜 세월 얼굴 봐온 놈들이라 좀 그렇긴 해도 나도 뒤통수 맞고도 때린 놈 구해주는 성자는 못 된다.
내가 뭘 보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대부분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린다.
“배 CP님 조카도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죠?”
“···당분간 자숙시키겠습니다.”
“좋아요.”
서수현 작가가 품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재윤은 얼굴이 시뻘개졌지만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기세등등하게 찾아온 배 CP 일행은 패잔병이 된 몰골로 자리를 떠났다.
[속이 다 시원하네.]그 모습을 본 김철 선배가 콧방귀를 뀌었다.
조금은 울분이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넌 알고 있었냐? 저 새끼들이 오늘 지랄할 거라는 거.]‘아뇨.’
[그럼 서예린이를 왜 불렀는데.]‘지아가 계속 언니 좀 불러달라고 징징거렸잖습니까.’
[···이현석.]‘정말 별 일은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도 이즈음 배씨 내외가 한 번 와서 깽판을 치려고 했거든요. 당시엔 서예린 작가 보고 바로 꼬리 내렸었는데 지금은 지아밖에 없으니 타이밍 맞춰 불러봤던 거죠.’
[지금 상황은 예상 못했고?]‘이걸 누가 예상합니까. 멀쩡히 컨펌 낸 기획에 스태프 빼가려는 미치광이 CP나, 서수현 작가 정도의 거물이 조카 따라 놀러오는 거나.’
[하긴······.]김철 선배가 입맛을 쩝 다셨다.
[보니까 서수현 작가가 널 도와주긴 했다만 그렇다고 네 아군도 아닌 모양이다.]‘예?’
내가 반문하는 사이 서수현 작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요. 당신이 이현석 PD인가요?”
“그렇습니다. 말 놓으시죠, 작가님.”
“괜찮아요. 그 정도로 친해지고 싶은 사이도 아니고.”
뼈가 있는 말이요, 가시가 있는 눈빛이다.
“···무슨 면상으로 우리 조카를 꼬셨나 했더니 무슨 소도둑놈처럼 생겨가지고서는.”
“고모!”
“고모도 귀 있다, 얘.”
소리를 빽 지르는 서예린 작가를 태연한 모습으로 무시한다.
“이 PD 사정은 얼추 들었어요. 고생이겠더군요.”
“제게 과분한 배우 분들을 주선해주신 점,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개를 푹 숙였음에도 마뜩찮은 모습이다.
내가 뭘 했다고.
“잘 되길 바래요.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쪽이 지금 만들고 있는 드라마는 좋아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예.”
그야 그렇다.
사람 사는 냄새라는 무형의 요소도 사십 년을 쫓으면 하나의 철학이 된다.
그리고 서수현 작가는 그걸 실제로 해오고 해낸 인물이다.
지금의 나와는 양극단에 서 있을 수밖에 없겠지.
“각본을 보고 눈을 의심했어요. 이런 엉망진창인 스토리를 진심으로 만들고 있는 건가, 하고.”
서예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응?”
“각본은 제가 쓴 거예요. 꾸짖으실 말씀이 있다면 PD 오빠 말고 저한테 해 주세요!”
“······.”
유지아가 눈을 질끈 감고 나섰다. 녀석을 본 서수현 작가가 순간 입을 닫았다.
생각보다 훨씬 어린 용모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아니, 그게 아닌 거 같은데.]‘예?’
[서예린이도 되게 놀란 표정이잖아.]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서수현 작가가 말했다.
“···이현석 PD님.”
“예, 작가님.”
“이 아이에게 작가료는 지급했나요?”
“예. 일단 10회분을 먼저 선지급했습니다.”
본인은 마다했었지만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싶어 바로 넣어버렸다.
극작가를 꿈꾸기만 했지 얼추 얼마나 버는지는 전혀 몰랐던 유지아는 어느 날 통장에 거액이 찍혀 있자 무슨 일인가 기겁을 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모양이다.
참 미련하다고 할지, 뭐라고 할지.
“그런데 여자애를 어떻게 저러고 다니게 놔둬요?”
“······?”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서예린 작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지아야! 돈 받으면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입고 싶은 거 다 입으랬잖아! 그래야 글이 나온다고! 왜 아직도 상거지꼴을 하고 다녀!”
“···상거지꼴은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뺨을 긁적인 유지아가 배시시 웃었다.
“드라마가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낭비하기가 좀 그렇더라구요. 애초에 받은 돈의 10분지 1만으로도 두 달을 사는데······.”
“사람 꼴을 하고 사는 건 낭비라고 안 불러!”
비명을 지른 서예린 작가가 홱 시선을 돌렸다.
“이 PD님, 잘못 봤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해요?!”
“어, 음······.”
“지아 지금 저희가 데려갈게요. 괜찮죠?!”
“예······.”
‘아니오’라고 말했다간 그대로 나를 잡아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렇게 폭풍 같은 기세로 작가 셋이 떠났다.
나는 한동안 멀거니 서 있었다.
옆의 유령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내가 물었다.
‘···선배님, 그렇게 심했습니까?’
[글쎄다, 모르겠네. 옷이 좀 낡긴 했어도 깔끔하게 차려입고는 다녔잖냐. 그리고 저런 게 오히려 고풍스러워서 멋지지.]‘그렇죠?’
[그렇지.]최근들어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한 나와 선배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나 스태프들도 뭐라고 하지 않았고요.’
[···뭐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사이긴 하지. 젊은 애한테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입고 다니냐고 하면 시비 거는 거 같잖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물었다.
‘···여자애 옷 좀 아세요?’
[아무래도 우린 글른 거 같으니 매장 직원한테나 물어보자.]그리고 사흘 뒤.
유지아가 “외부인은 출입 금지입니다!” 하고 외치는 민재 녀석에게 가로막혀 허둥지둥하는 헤프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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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한유미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 반면 이설은 담담한 무표정이다.
「어째서 그런 행동만 골라서 하는 거야?」
「글쎄, 도리어 나는 네가 어째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묻고 싶은걸.」
느긋하게 뻗어간 손이 턱을 잡는다.
「효율과 비효율 중에 후자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 난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야 도태되는 게 당연하지」
「너······!」
「하지만, 이상하네.네 그런 행동.」
무표정이 서서히 물든다.
대야 안에 담긴 물 안에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리듯, 나지막한 파동과 함께 표정이 느릿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꽤 흥미로워.」
끈적하고 달라붙는 것 같은 한 마디.
끝내는 조소도 무엇도 아닌 어중간한 반쪽 웃음만이 입가에 남는다.
[······.]“···컷!”
내가 외쳤다.
스태프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설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한유미에게도 작게 목례했다.
하지만 여주인공 역인 한유미는 미동조차 없다.
“유미 씨?”
“···예? 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한유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서는 꾸벅꾸벅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이 나는 슬쩍 뒤쪽을 보았다.
‘왜 이번엔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알면서 물어보지 마라. 맞는다.]‘하하.’
[저거, 완전히 괴물이구만.]김철 선배가 혀를 찼다.
[저게 지금 막 연기 시작한 신인이라고 누가 믿겠어.]‘그러게요. 예전에도 괜찮긴 했는데 더한 것 같아요. 배역이 잘 맞나.’
나는 시선을 돌렸다.
유지아가 자리를 떠나는 이설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본다.
또 저러는군.
“···오빠.”
“왜.”
“중후반부 대본··· 살짝 바꿔도 될까요?”
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