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51)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작가를 일종의 슈퍼 갑으로 여기곤 한다.
제멋대로 원고를 써서 넘긴다. 자신의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퇴짜를 놓고 강짜를 부린다. 그런 게 대개 생각되는 괴팍한 원로 작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원고를 제멋대로 쓴다는 건 조금 지나친 오해다.
모름지기 촬영에는 시공간과 예산의 한계가 있고, 출연하는 배우도 정해져 있다.
따라서 최대한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그런 연기를 주문하는 한편으로는 대본 역시 거기에 맞게 가다듬는 것이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극작가들 역시 그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김경숙은 엄밀히 말해 정말로 제멋대로 굴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톤을 올려보지요. 좀 더 말괄량이인 느낌으로··· 이쪽 성격으로 가능할까?”
“아니, 역시 좀 아닌 것 같아. 아, 여기 이미지로 가보는 게 어때요?”
그녀는 간만에 신이 나 있었다.
보통은 배우의 인상이나 톤을 고려해 대사를 정돈하던 것이, 그야말로 어떤 주문을 해도 소화해내는 배우가 있고 보자 창작욕이 끝도 없이 넘쳐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본은 계속 수정되었고, 수정된 만큼 씬이 나아지는 체감이 드니 작가에게 있어서는 꿈과 같은 환경이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자 배우를 스토리에 딸린 시종 정도로 여기던 김경숙도 그런 자세를 고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메모장을 넘겨볼 때마다 그녀는 감탄을 거듭했다.
“여기에 적힌 인물들, 전부 실존하는 사람들이죠?”
“일단은요.”
“대단하네, 정말로.”
저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진다. 어떤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재능이라니.
마치 빙의라도 한 것 같이 연기하는 모양새를 보면 지나치게 경이로운 나머지 오싹한 느낌마저 들곤 했다. 이런 배우가 그간 존재했던가?
이설이 부정했다.
“관찰한 것만으로 되지는 않아요. 직접 그 사람이 되어보아야 하거든요.”
“물론 그렇겠지요. 보통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닐 테고.”
“···그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지만요.”
말을 흐리는 이설을 본 김경숙의 얼굴이 푸근했다.
그녀는 본래 말을 흐리거나 똑바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수현조차 눈앞의 상대와 합을 맞춘다면 풀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정도의 배우가 있으면 유지아인가 그 아이가 성공한 것도 당연하겠지.’
자신에 못잖은 결과를 내놓은 이유를 찾자 까마득한 후배에 대한 묘한 적대감도 옅어져 갔다. 재차 의욕을 다지고 이를 갈고 있는 쪽과는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그렇게 김경숙과 이설이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반면, 정확히 반대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쪽도 있었다.
멀찍이서 최대웅이 한숨을 푹 쉬고 있다.
“이봐요, 감독 양반.”
“말씀하시지요.”
“내가 최대한 제작에 관해서는 뭐라고 안 하려고 했지만··· 암만 그래도 그 인간은 아닌 거 아뇨?”
『로켓맨』의 샤이.
방금 전 앞으로 한솥밥을 먹을 후배를 만나고, 그 솜씨를 일견하고 난 최대웅은 그야말로 끔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바퀴벌레가 섞인 밥이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이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란 말입니다.”
『연구일지』 오디션의 발연기는 본 적이 있다. 하지만 1년 가까운 기간이 있었으니 충분히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이현석이 어깨를 으쓱인다.
“샤이 씨야말로 이 기획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연기의 연자도 못하는 놈을 가지고 핵심은 무슨! 도리어 퇴화한 거 아닙니까, 저거?”
최대웅이 기가 차다는 듯 노성을 터뜨렸다. 어지간한 강심장도 찔끔 놀랄 만한 인상이며 목소리다. 그 곽태영도 이렇게 나오면 조금 동요하곤 하는 게 예사였다.
하지만 이현석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도리어 빙그레 웃는 인상의 박력에 묘한 위압감을 느낀 최대웅 쪽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태도를 바꿨다.
“아니, 이 감독도 그놈이 저기 이설이가 잡아놓은 분위기 깡그리 말아먹는 거 봤잖아요? 요즘 연기 잘 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노맙니까?”
다시 말해, 부여잡고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캐스팅 확정된 것도 아니니 갈아치웁시다. KDS 쪽 투자에 눈치 보이면 내가 사재라도 털 테니까······.”
“흐음.”
그리고 이현석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반응이 나온 이상 더더욱 샤이 씨를 뺄 수가 없겠습니다.”
“뭔 반응입니까, 그건 또!”
최대웅이 사정사정하는 광경을 본 김경숙이 한숨을 쉰다.
최대웅도 어지간한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봐온 이현석은 그보다 배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예전, 이설을 데려오는 대가로 이현석은 샤이의 캐스팅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을 요청했다. 거기에 최대웅까지 추가되었으니 이득은 어지간히 본 셈이었다.
그리고 이현석의 그런 행보와 유명우를 밀어붙여 뽑았던 등의 지난 행적은 그녀에게 일종의 믿음을 만들어주었다.
‘드라마를 말아먹을 작정이 아닌 다음에야 뭔가 생각이 있겠지. 나에게도 말하지 않는 건 괘씸하지만······.’
정말 말아먹을 작정일까를 고려하지 않는 시점에서 흔한 확증편향이라 할 만 했다.
“후후.”
고개를 돌리니 이설이 티격태격하는 광경에 싱긋 웃는 모습이 보였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영 표정에 맥아리가 없는 그녀였지만 이현석에게 시선을 둘 때는 약간은 웃음이 있는 편이었다. 뭐, 희미한 정도였고 금방 가시곤 했지만.
다만 그런 이설의 표정이 크게 격동할 때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일정이 바쁠 텐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헤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입술이 내려앉는 모습을 본 김경숙 작가의 시선이 회의실에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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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웅이 내 얼굴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뒤에선 김철 선배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제기랄, 현석아! 그 힙찔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수해야 한다!]‘다 아는데다 도움도 안 되는 소리를 뭘 그리 하십니까?’
나는 애써 표정을 굳혔다. 최대웅과 이설을 받아들인 이상 샤이는 내 비장의 카드와 마찬가지였다. 그것마저 내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연기력을 보고도 캐스팅한 근거를 댈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되는 대로 우기고 있던 중 찾아온 강아라는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해준 셈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강아라가 얼굴을 비치자 최대웅은 영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물러났다. 까마득한 연예계 후배 앞에서 계속 그러기는 좀 뭐했던 모양이다.
···그런 것치고는 저기에 이설이 있기는 한데.
“어서 오십시오. 일정이 바쁠 텐데 미안합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벌써 네 번째다 보니 강아라는 익숙한 얼굴로 대본을 받아들었다.
예전,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강아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러니까, 제게 대본을 평가해보라는 말씀이세요? 아시다시피 전 완전 문외한인데······.”
“감상을 이야기해달라는 겁니다. 이쪽에 젊은 사람이 없다보니 그쪽 시각이 필요해서요.”
당시의 강아라는 거기에 꼭 자신을 부를 필요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어째선지 이설 쪽을 흘끗 보고는 수긍했다.
물론 나와 김철 선배가 바라는 건 당연히도 조금 다른 관점이다.
“너무 대중적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그냥 느낀 바를 이야기해주시면 됩니다.”
“네!”
지난 세 번의 막장도는 나쁘지 않은 수준.
하지만 최근에는 대본에 대격변이 일어난 상황이다.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원고를 넘기는 강아라를 보며 김철 선배가 꿀꺽 침을 삼킨다. 천천히 읽어나가던 강아라의 표정이 순간 변한다.
“어······.”
점점 요상한 표정이 되더니만 끝내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다.
“그게, 저······.”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내 말에도 한참을 눈치를 보던 강아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개가요.”
“전개가?”
“음··· 너무 막장스러운 게 아닌가 싶은데요.”
“······!!”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참은 뒤 물었다.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어느 정도라니··· 열이면 열 다 그렇다고 말할 거라고 생각해요.”
[완벽해!!]예상치 못한 얼굴로 멍해져 있던 김철 선배가 순간 노성을 터뜨렸다.
눈치를 보는 강아라와 달리 선배는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축구선수나 된 양 마구잡이로 어퍼컷을 날리고 있다.
나는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잘 알겠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구일지 후반부에 그 정도의 정확도를 발휘한 강아라다. 그녀의 보증을 얻은 이상 이제는 GO 싸인을 내리는 일만 남은 셈이다.
“아뇨······.”
흥분한 우리 둘과 달리 강아라는 이걸로 괜찮은 걸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불행히도 그녀가 얼마나 굉장한 일을 해주었는지 아는 이는 나와 김철 선배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나.
나는 뭔가 보답할 수 있는 게 없을지 고민에 잠겼다.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강아라가 눈을 깜박였다.
“그, 아직인데요.”
“괜찮으시면ㅡ”
어차피 입맛도 잘 아는 상황이니 적당히 비싼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겠다 싶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꾹 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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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곽태영 감독은 MBS의 한 CP와 논의를 주고받고 있었다.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자재와 설비가 생각보다 풍족하군요.”
“원래는 승인이 나서 주인이 따로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동결 상태지만요.”
“흠.”
어쨌거나 뭐가 됐든 많은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스태프는 모자란 느낌이긴 하군요.”
“그건··· 외부에서 끌어오셔야 할 겁니다. 이쪽은 여유가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아서요.”
CP가 면목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채로 시작하는 게 당연하던 천만 감독 입장에선 영 익숙지 않을 일이지만 곽태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던 즈음이었다.
순간 곽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복도를 지나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한껏 고개를 숙인 모습.
“···저 사람은?”
“아, 외부 협력 직원입니다. 한때는 외주 제작사에서 피디 노릇을 했는데 그만두고는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다시 말해 무능해서 쫓겨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곽태영은 어째선지 그런 그에게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건 어떤 종류의 직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름은 뭐라고 합니까?”
“아, 확실히, 방······.”
한참을 고민하던 CP가 간신히 이름을 떠올려냈다.
“방을찬이라고 하더군요.”
“······대왕오징어.”
“예?”
곽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과 대화를 해봐야겠습니다.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다고 했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