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53)
“제목을 정해야 하지 않겠나요?”
김경숙 작가가 내게 이야기를 꺼낸 건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 다음날이었다.
“언제까지 가제로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전 작가님께서 정하실 줄 알았는데요.”
나는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장장 삼십 년 가까운 기간 동안 김경숙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남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이번은 스스로도 혼을 담았다고 할 정도의 원고가 아닌가.
김 작가가 빙그레 웃었다.
“이 피디가 정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흠.”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뒤에 있던 유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어제 실제 촬영 들어간 걸 보고서는 신뢰가 생긴 모양이지.]‘제가 뭘 했다고요?’
김철 선배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현석아, 넌 네가 연구일지 촬영 중에 이도나를 어떻게 취급했다고 생각하냐?]‘어떻게냐니, 그냥 평범했지 않습니까? 조금 너무 풀어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냐.]김철 선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됐다.]‘······?’
나는 더욱 의아해졌지만 김철 선배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제목이라고 하면 나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간을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은 본래부터 서예린 작가가 지은 이름이고 『연극처럼 살다』에 이르러서는 대충 붙인 가제가 진짜 제목이 된 케이스다.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최대웅이 제안했다.
“‘삼세번’이 어떨까요?”
“예?”
“제목 말입니다. 남주인공 인격이 세 개이니 세 번 돌아봐야 하다는 걸루다가. 아, 이 피디님의 세 번째 작품이라는 의미도 넣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연기하는 것도 말이지요ㅡ
덧붙인 말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어감은 나쁘지 않았다. 김경숙 작가도 동의했다. 그래서 내 세 번째 신작의 이름은 ‘삼세번’이 되었다.
그렇게 세 번째로 겪는 제작과정은 실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첫 작품은 예산이 부족했다. 두 번째는 막장을 추구할 환경이 부족했다. 따라서 둘 모두가 갖춰진 지금 순항하지 않는 게 이상할 터였다.
“대체 왜 못 하시는 겁니까, 최 배우님? 『마법사가 사는 방법』처럼 표정 가져가다가 『기본 영문법』에서 하셨듯 분위기 잡으시고, 『히어로 시그널』에서 하셨듯 몸으로 마무리하시면 되잖습니까? 다 예전에 연기하셨던 거 아닙니까?”
“···뜨그랄, 내가 그때 미쳤었지.”
하지만 순항하고 있는 만큼 여유가 있자 곽태영 쪽의 사정에 은근히 신경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아와 서예린 작가는 최근 들어 거의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이도나는 나를 십년 묵은 원수를 보는 양 노려보곤 했다.
···어떻게 되어먹은 성질머린지 원.
“들리는 바로는 이 피디님 기획과 거의 같은 노선이라고 합니다.”
오지호 CP가 소식을 전했다.
“고된 시집살이 끝에 불합리한 일을 겪고 쫓겨난 여자가 새 인연을 만나 복수를 하는 거죠.”
“···뭐, 안 그런 드라마가 더 드물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양쪽 모두 막장드라마를 표방한 바에야 말이다. 예전 『연극처럼』도 초반에는 그랬고.
“그렇긴 하지요.”
내가 애써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하자 오 CP가 귀 뒤쪽을 긁적인다.
“뭐, 곽태영 감독은 반전이나 씬스틸러를 즐겨 기용하는 사람은 아니니 별 건 없을 겁니다. 유지아 작가님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말인즉슨 상호간에 정면 힘싸움을 택한 셈이었다. 그것이 내 기분을 더욱 무겁게 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맥주를 꺼내 속을 달랬다. 김철 선배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뭐냐, 현석아? 저번까지만 해도 네 상대가 안 된다고 자신만만해하더니?]“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음?]“곽태영 감독이 무언가 특이한 수를 두면 제게 길할 터이지만, 지금처럼 뒤로 물러나 힘싸움에 들어가면 쉬이 승부가 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쨌거나 상대에는 지아와 그 방을찬이 있는 겁니다. 그 둘의 막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나 저는 곽 감독이 그 둘을 제대로 다룰 리 없다고 보았습니다.”
김철 선배가 납득한 기색이 되었다.
“직접 끌고 가려고 할 테니까 말이지?”
“그렇습니다.”
영화감독은 대개 자신이 작가의 보조에 그치는 경우가 흔한 PD의 위치를 참아내지 못한다. 하물며 그 작가가 어리기까지 하다면 더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곽태영은 나와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게 된 모양이었다.
내가 맥주 캔을 쥔 채 말을 이었다.
“현재 국내에 막장드라마를 쓰는 작가는 많지만 결국 그 정상에 있는 건 둘입니다. 김경숙 작가에게는 연륜이 있다면 지아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막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동격이라 할 만 합니다. ”
『연극처럼 살다』가 엉망진창으로 꼬여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 지아와 계속 같이 갔을 것이다.
대본이 동격이라면 결국은 연출에서 승부가 갈리게 되는 게 당연지사.
“곽태영 감독은 제 상대가 못 되나 방을찬 피디는 미지수입니다. 조언을 새겨듣는다면 최소한 실책은 범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여상한 수단으로는 통하지 않을 터다.
김철 선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뭔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아뇨. 이번만큼은 정말로 정석적으로 가겠습니다. 진짜배기 정석이요.”
내가 웃었다.
“선배님의 힘도 빌리고 싶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단번에 막장도 90퍼센트를 달성한다.
나는 조곤조곤 설득했다. 이야기를 들은 김철 선배 역시 점점 표정이 풀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던 중이었다. 선배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현석아.]“뭡니까?”
[국내 막장드라마 작가의 정상이 그 둘이라면 피디의 정상은 누구냐? 방을찬이?]내가 고개를 저었다.
“경시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실적이 없는 원 히트 원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장연철이?]“곧 뼈다귀만 남을 작자지요.”
[그럼······.]김철 선배는 이어 몇 사람의 이름을 열거했지만 나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내 선배가 지친 어조로 말했다.
[씨부랄, 그럼 누구란 말이야?]내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진정한 막장을 추구하는 이는 선배님과 저 외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김철 선배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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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세번』의 1화 방영을 코앞에 둔 제작발표회 날.
기자들이 몰린 가운데 단상에 배우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표정의 최대웅, 무표정한 이설, 싱글거리는 샤이ㅡ 그리고 여러 중견배우들과 이현석.
기자들의 카메라는 이설과 최대웅 이상으로 이현석을 찾아 움직였다. 화제성면으로나, 화면에 들어오는 임팩트 면으로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현석이 마이크를 잡았다. 보통은 방송홍보팀에서 따로 사회자를 보내지만 아무래도 직접 맡을 모양이었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예,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삼세번』의 피디를 맡은 이현석입니다. 지금 이게 여러 곳으로 생중계가 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좀 긴장이 됩니다.”
– 긴장했단다ㅋㅋ
– 긴장한 놈이 있으면 씹어 먹을 것 같은 표정인데?
– 이번에도 정신 나간 물건이겠지?
– 이현석이 정신 나가지 않은 적이 있었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정신없이 채팅창이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적당히 스토리 개요와 방영일자를 고지한 이현석이 말했다.
“원래는 이즈음에 하이라이트 씬을 보여드려야 할 텐데 이 부분은 좀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아직 완성이 덜 된 겁니까?”
이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드라마는 딱히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장면이 없습니다.”
“그··· 모든 씬이 하이라이트다, 이런 의미인가요?”
“아뇨,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
이현석은 흐르는 침묵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 드라마는 굉장히 굴곡 없이 흘러갈 겁니다. 제가 연출한 지난 두 작품에 있었던 초상적인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을 테고, 일견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고요.”
“그 점을 이해하신 채로 시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개소리에 기자들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없어도 있다고 포장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지금껏 결과에서의 반전과 놀라움을 중시한 만큼 이번에는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드라마가 될 예정입니다.”
“극의 중심이 되는 다중인격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 드린 바가 있지만 김경숙 작가님과 저는 가능한 한 느긋하게 어우러진 박자를 추구했으며······.”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에 기자들은 메모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있기 바빴다.
그야말로 의미불명의 제작발표회를 접한 기자들은 다음날, 곽태영 감독이 발표하는 MBS의 『영원의 시대』에 몰렸다. 영 아니다 싶어도 비교와 대비로 얼마든지 재미있는 씬을 살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곽태영에 이르러서는 한술 더 떴다.
“어제 이현석 감독님이 어우러진 박자를 추구했다고 하셨는데, 저희는 무박자를 추구했습니다.”
“예?”
“그야말로 한치 앞도 예상치 못할 엉망진창인 물건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야말로 저도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기자들은 숫제 황당한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곽태영이 빙그레 웃었다.
“직접 보고 느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제 대학생이 된 최미나는 여전히 유지아 팬카페의 운영을 맡고 있었다. 『로켓맨』 쪽은 탈덕했지만.
그녀의 주장으로는 『로켓맨』이 젊은 시절의 일탈이라면 유지아 쪽은 평생을 같이 갈 사이라는 모양이었다.
– 지아 작가님이 이현석 드라마 떡발랐으면 좋겠다!
ㄴ 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ㄴ 못할 건 또 뭔데요? 지금은 적인데.
ㄴ 적?? 되게 일차원적이시네요! 이현석 피디 없었으면 유 작가님이 지금 있을 수나 있었겠어요?
아무튼 그 팬카페는 최근 일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간 유지아의 팬카페는 이현석의 팬카페도 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결국 『연극처럼』 시리즈는 유지아의 세계관이었으니까.
더해 작년부터 유지아가 올리기 시작한 근황보고에 이현석의 언급이 조금씩 늘어가던 것 역시 그런 경향을 더욱 키웠다.
따라서 둘의 행보가 갈라졌을 때 팬카페 역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 ‘대왕오징어’의 범인이 합류했다고 했을 때는 더했다.
– 지아야 정신차려ㅠㅠ 걔는 아니야, 진짜!
ㄴ 유 작가님이 댁 친구에요?
ㄴ 친구 맞는데요. 어제도 둘이 같이 놀러갔음!
ㄴ 영자님, 어그로 추방좀요;
ㄴ 걔가 영자임
ㄴ 네??
“이제 결판이 나겠지.”
그렇게 흘러흘러온 오늘, 최미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석 피디님도 노인네보다는 지아 쪽이 훨씬 유망하다는 걸 알아야 해!”
9시. 곽태영의 『영원의 시대』가 먼저 방영을 시작했다.
참고로 오늘은 최미나의 시험날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