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54)
“시작이군요.”
[···음.]담담한 심정인 채 TV로 눈을 돌렸다.
나는 집에 있었다.
보통 첫 방송이라면 주조정실에서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시청률 추이를 지켜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순수한 시청자의 입장으로 완성도를 평가하고 싶었다.
9시에 앞서 방영한 곽태영의 『영원의 시대』를 미리 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이번 작품에는 외계인도 없고 공룡도 없다. 모험적인 시도도, 뒤통수를 후려치는 장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비로소 순수한 내 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된 셈이다.
인트로 씬이 나왔다. 샤이와 ‘로켓맨’ 멤버들의 락이라기보단 메탈에 가까운 풍의 배경음악이 밑에 깔린다. 다시 들어도 나쁘지 않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니 이제는 던져지는 주사위를 볼 차례였다.
[이 빌어먹을 1화를 만들기 위해 한 달을 소모했지.]김철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난 솔직히 네가 돌았다고 생각한다.]“현재시제군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자식아.]“···전에 선배님께 설명은 충분히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시간에 대해선 말했지만 시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잖냐.] [음.]나는 뺨을 긁적였다.
흔히 촬영은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진다. 물론 특정 장소에서 몰아서 해야 한다거나, 다른 여건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뒤바뀔 수도 있지만 리스크가 따른다.
앞뒤가 뒤죽박죽이 되면 배우의 감정선도 뒤죽박죽이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나를 그걸 감안하고도 일부러 촬영을 역순으로 구성했다. 자연스레 원인 편 – 즉 1화의 촬영을 맨 뒤로 밀리게 만들었다.
이제 방영될 1화는 그렇게 한 달 전에 시작되어 얼마 전에야 완성된 물건이다.
기분파인 주제에 효율주의자인 김철 선배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이 지랄을 할 필요가 있었냐?]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선배님, 막장이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거창하게 가는구만.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냐?]“그러시다니 제가 말씀드리지요.”
코웃음을 치는 선배를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개연성과 현실성이 부족하고, 등장인물의 사고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해 스토리가 뻔한 클리셰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이목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설정이 남발되니 이 모두를 종합하여 막장드라마라 부릅니다.”
[그렇게 잘 아는 녀석이 왜 못 만들고 있냐?]“그 모든 걸 그냥 가져다 쓰기만 하면 단순히 재미없는 드라마가 되니까요.”
[오······.]이죽거리던 김철 선배는 의외로 진지한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따라서 흔히 막장이라 뭉뚱그리더라도 각자의 강점과 특징은 다릅니다. 그걸 최대한 활용해야 하고요.”
가령, 지아의 경우엔 사람이 도저히 예상치 못할 황당하고 기가 찬 전개를 이어가는 데 능하다.
지금은 아직 미숙하지만 절정에 이르면 멀쩡한 등장인물이 복선도 없이 길 가던 깡패에게 맞아죽거나, 절망적인 가난을 연출하던 등장인물이 아무 의미도 없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한다.
반복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이.
[···그런데도 사람들이 봤다고?]“그게 유지아란 작가의 재능이니까요.”
계속 보는 게 바보 같아질 정도의 정신 나간 사건들을 흡입력 있게 풀어내는 솜씨는 가히 천재적인 영역에 있다.
반면.
“김경숙 작가는 경험은 풍부해도 전형적인 노력형입니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위치죠.”
일단 답답하게 꼬인다. 풀리나 했더니 다시 꼬인다. 주변 인물이 끼어들어 또다시 꼬아대며 고구마를 퍼 먹인다.
전통적인 막장드라마라 하면 당연히 이쪽에 가깝다.
“오래 전부터 이런 드라마의 주 시청자층은 욕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필요한 걸 준 셈이죠. 게다가 생활의 루틴이 정해져 있기까지 하니 쉬이 시청층에서 탈락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목이 한계까지 막힌 상황에서 카타르시스가 터지면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임팩트야말로 이런 전통적인 막장드라마가 계속 먹히는 이유다.
바꿔 말하자면,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신세대들이 늘어가면서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막장드라마라도 성향은 이렇게나 다르다.
“따라서 이쪽의 강점을 최대로 높이고 저쪽의 단점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시기의 속공이야말로 최고의 계책이라 할 만 합니다.”
[···그게 1화라는 거냐?]“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지아라도 초반부터 임팩트를 남발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슬로우 스타터라고 해도 되겠지.
대표적인 케이스가 『연극처럼 살다』 후 맡았던 단막극 『같은 세상』이다.
방을찬이라는 PD의 재능도 있지만, 결국은 지아의 정수가 모조리 들어간 물건임에도 호흡이 짧다보니 필연적으로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같은 구조인 이상, 결국 1화에서는 시어머니가 얼마나 며느리를 맛깔나게 구박하고 머리채를 잡아대느냐가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김경숙 작가는 거기서 질 정도의 짬이 아닙니다.”
결국 시작이 똑같다면 더욱 자극적인 물건이 승리하는 것이 막장드라마 매치.
물론 그 승리는 소소할 것이다.
하지만 내 계획은 그걸 어마어마한 격차로 발전시켜 단숨에 승부를 결하는 것이었다.
[1화부터 최대한도의 한방을 먹인다. 이 해법이 과연 잘 먹힐지 모르겠군.]김철 선배가 심드렁한 모습으로 턱을 괴었다.
[또 망할 테지, 어차피.]#
– 이만한 씬을 통째로 다찌마와리(=컷 없는 롱테이크)로 가겠다고요?
– ···시어머니가 며느리 구박하는 씬을 말입니까?
– ···한 달 동안 말이지요?
– 그렇습니다. 거기 다 적혀있을 텐데 자꾸 물어보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야 살면서 들은 소리 중에 가장 개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지.
최대웅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양 고개를 저었다. 스태프 한 명이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최 배우님? 피곤하세요?”
“아뇨, 아닙니다.”
최대웅이 헛기침을 했다.
“이 피디님이랑 김 작가님도 집에 가셨는데 저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자니 영 바보 같아서 말입니다.”
“그분들이 이상하신 거죠.”
스태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김 작가님은 그렇다 쳐도 이현석 피디님은 참 보통 강심장이 아니신 것 같아요. 볼 필요도 없다, 이거니.”
집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는 본인이 듣는다면 영 억울할 오해였다.
그걸 모를 최대웅 역시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석은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범상한 인간은 아니었다.
최대웅은 기본적으로 뻔한 걸 싫어하고 독특하거나 재미있는 걸 좋아한다. 이 바닥에 좀 있으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현석은 그의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긴 했지만, 사실 생각한 이상의 미치광이였다.
– 저기, 이렇게까지 할 의미가 있습니까? 난이도에 비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입니다.
–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 그게 대체 뭡니까?
–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 천하에 이 필요성을 이해할 만한 이는 저와 귀신이 된 김철 감독뿐일 테니까요.
– ······.
당시의 최대웅은 말문이 막혔다. 암만 봐도 농담이 아닌 표정이라 더더욱 그랬다.
이현석이 시선을 돌렸다.
– 물론 본인이 못하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야 없겠습니다만.
– 해볼게요.
이설은 심플하게 대답했다. 기가 막혔던 최대웅은 실제 촬영하는 장면을 보고는 말 그대로 질려버리고 말았다.
···설마 이제 나한테도 저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시작입니다!”
스태프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최대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이 주조정실로 달려가는 스태프를 향했다.
#
『삼세번』의 1화는 정말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그저 시댁에 들어간 며느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다루는 것이 전부였다.
“으아아······.”
하지만 최미나는 숨이 막혔다.
가슴을 퍽퍽 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얼마 전, 이현석은 ‘굴곡이 없는’ 드라마라고 했다. 그 말은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야 끝도 없는 낙하곡선이었으니 당연했다.
최미나는 이런 물건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저건 사탄의 뜻을 돕는 자가 만든 물건이던지 아니면 TV의 모습을 한 사탄일 것이다!
「밥은 먹었니? 안 먹었다고? 오,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니?」
「오늘은 먹었니? 혼자서 참 게걸스럽게도 먹었구나.」
「너희 사돈댁은 경우도 없니? 선물이 이게 뭐야.」
「그렇다고 돈지랄을 해? 천박하게시리······.」
그간 수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되어온 평범하다면 평범한 대사들.
하지만 어째선지 속이 터질 것만 같다.
장면이 끊기질 않는다. 컷이 없다. 도통 쉬어갈 틈을 주질 않는다. 줌인, 줌아웃과 이동도 황소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릿하다.
시청자가 분노할 만한 상황이면 카메라의 회전은 일부러라는 듯 더욱 답답해졌다.
최미나는 카메라가 시청자를 괴롭히려고 하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만 보고 싶다. 당장에라도 시선을 떼고 싶다. 그럼 그만 보면 된다. 지당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여주인공이 밟힌다. 눈에서 귀화가 타오르는 것이 보인다.
터져라, 터져! 외치는 순간 가라앉는다. 두 배는 답답해진다. 반복된다. 답답함이 쌓인다. 쌓이고 쌓여서 당장에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으아아아! 저 씨발년!!”
눅눅하고 딱딱한 생라면을 부숴서 스프를 뿌려먹는 기분이다.
입이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아프고 피가 나는데 그래도 먹는 걸 그만둘 수가 없다. 그만뒀다가는 그간 마비되었던 매운 맛이 일시에 몰려들어 고통이 배가될 거라는 일종의 확신이 든다.
“찔러! 그걸로 찔러버리라고, 이 병신 같은 년아!”
여주인공이 식칼을 들고 고개를 숙이는 사이 최미나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진정한 막장드라마란 마치 자동차 운전대와 같아 선량한 사람도 얼마든지 지옥에서 올라온 욕쟁이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여주인공은 찌르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최미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모조리 뽑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으아아아!”
#
[바보 같은··· 그런··· 설마······!]나는 줄곧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순간이 오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날아갈 것 같을지, 후련할지, 기뻐 날뛸지.
『’삼세번’ 1화의 방영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를 집계합니다······.』
어느 쪽도 아니었다.
『완료되었습니다. 평균시청률 17.3%, 시청자 중 해당 드라마를 막장이라 생각하는 비율은 92%입니다.』
그저 당연하게 이루어질 일이 이루어졌구나 하는 만족감만이 충만했다.
애초에 이제 시작이 아닌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막장도 90%를 넘겨 궁극의 막장드라마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이에 대한 부분 보상이 주어집니다!』
『승리조건 달성을 위한 모든 시청률 수치 제한이 감소했습니다.』
김철 선배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일어나 있는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김철이 이현석인지 이현석이 김철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진짜냐···? 우리한테 정말로 이게 가능했던 거냐······?]김철 선배가 멍하니 되뇌이던 와중 메시지가 다시금 떠올랐다.
『시청률, 막장도 양쪽의 부분 보상을 모두 달성한 것에 대한 아주 놀랍고도 자비로운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뭔가 불길한 사족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