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59)
MBS 사장 원광훈의 일정표는 빽빽하다.
같은 3대 공중파의 대표, 즉 KBC의 안기식과 SBC의 최도정의 경우 모두 능력을 인정받아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올라간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원광훈은 순수한 정치력으로 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한 인맥도, 파벌도,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하는 선의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법. 원광훈은 자기가 나름대로 훌륭한 노력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그간 그에 걸맞는 결실을 거둬왔다.
특히 최근에 그 곽태영 감독을 안방극장에 끌어들인 쾌거를 올린 것은 그의 주가를 순식간에 더욱 밀어 올렸다. ‘윗선’이 흐뭇해한 것은 물론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순조롭게 가면 성공적으로 정계에 발을 담글 수 있을 지도 모른다ㅡ 원광훈은 그렇게 꿈에 부풀어 있었다.
딱 저번 주까지는.
– ···위원장님 심기가 영 편치 않으십니다.
원광훈이 들고 있는 수화기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떻게든 손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님.
“음.”
원광훈 사장이 침음을 흘렸다.
위원장이라 함은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로 구성된 MBS 경영평가소위원회의 대표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다시 외부 인사를 모아 경영평가단을 꾸리는데 이들의 조언은 이사회에 영향을 끼쳐 사실상 사장을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다.
즉, 간단히 말해 지금 원광훈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몇 개월간 그에게 순풍이 되어주었던 인물이었다.
– 곽태영 감독 건을 너무 밀다보니 역풍이 너무 강합니다. 이번 주는, 그··· 좀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원광훈은 머리를 짚을 뿐 말이 없었다.
저번 주, 처음으로 방영된 『영원의 시대』 1화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전개를 선보였다.
시집살이에 열불이 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박치기를 하고, 레슬링 기술을 날린다. 이 유례없는 전개는 경악한 방심위가 곧장 유례없는 카드를 꺼내들게 만들었다.
깜짝 놀란 원광훈 사장이 찾아가자 – 오라가라 소환하기는 뭐한 위치였으므로 – 곽태영 감독은 이렇게 반응했다.
“조금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역치가 높아졌으니 다음 화부턴 무난한 전개로 노선을 바꿔볼 생각입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원광훈은 이 말을 믿었다.
보통이면 그리 순진하게 굴었을 리가 없겠지만 상대는 그 곽태영이 아닌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적이 있는 살아있는 전설을 두고 계속 의심하는 게 되레 이상한 일이었다.
원광훈 사장은 밑에 커버를 지시했고, MBS측은 필요했던 포석이라고 주변을 달래며 언론플레이에 나섰다.
윗선 역시 충분히 안심시킨 건 물론이었다.
“이현석을 보십시오. 『연극처럼 살다』 1화에서는 신혼여행 도중 차가 폭발하고, 『연구일지 속 보석함』 첫 화에서는 공룡에게 남주인공이 먹혔습니다. 하지만 모두 흥행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흠, 확실히 곽 감독이 이현석의 방식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말을 꺼낸 적은 있었지요.”
“작가진도 이현석 쪽이고··· 요즘은 그런 게 유행인가?”
훌륭한 예가 있었던 터라 이는 그럭저럭 먹혀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을 껐다 싶어 안심하던 찰나, 불행히도 이번 주의 『영원의 시대』는 원광훈의 뒤통수를 더욱 후려치고야 말았다.
「···죄송해요, 어머님. 제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그래. 용서하마.」
「네? 정말이세요, 어머님?」
「다만 조건이 있어.」
「···성진 씨와 이혼하고 이 집에서 나가라는 거면 저는 하지 않겠어요.」
「아니, 네가 걸었던 그, 워냐. 격투기? 그걸 나도 배우고 싶은데.」
「······네?」
그렇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다니는 레슬링 체육관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점점 재미를 느끼고, 그간 발견하지 못해 묻혔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끝내는 재미삼아 대회에 출전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여차여차해 끝내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다.
– ···???
– ???????
– 어··· 저기요?
아무도 이 정신 나간 전개를 이해하지 못했다.
동시기 SBC의 『삼세번』에서는 시어머니가 음식이 목에 걸려 죽는 심히 맛이 간 상황이 벌어졌으나 그 임팩트조차 조금 가려질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코믹물, 시트콤이라고 하기에는 쓸데없이 진지했다. 당장 작중 등장하는 챔피언 벨트조차 소품이 아니라 어디서 진짜를 빌려왔다는 모양이었다.
실로 쓸데없는 디테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곽태영 감독 초기작 중에 『금메달과 은메달』 생각나더군요. 단막극이라고 생각하면 참 잘 만든 것 같은데······.
“제기랄, 그딴 스토리로 잘 만들어서 뭐하나!”
전술 단위의 성공이 전략 단위의 오판을 커버할 수 없는 것처럼 드라마 『영원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자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그냥 헛웃음을 흘렸다.
세간에서는 사실 곽태영이 죽고 클론인 곽영태가 자리를 이어받았다느니,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느니, 사실 MBS를 안쪽에서 붕괴시키려는 자객이라느니 하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뭐, 궁지에 몰린 원광훈이 생각하기에 마지막은 딱히 틀린 소리도 아닌 것 같았다.
– ···곽 감독이 일부러 저러는 걸까요?
“설마. 그 양반은 김철과 마찬가지로 천상 제작자야. 다른 생각을 할 위인이 아니지.”
원광훈이 단언했다. 사실 곽태영은 그 정도로 알기 쉬운 인물상이었다.
“제 딴에는 정말 진지하게 뭔가 해볼 생각일 거야.”
이현석을 연구한다고 했으니 작정하고 벤치마킹해 일을 벌인다. 곽태영답다면 곽태영다운 일이긴 했다.
다만 한 가지 오산이 있다면 이현석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건 이현석밖에 없다는 것이겠지.
어쩌면 그 존재는 일종의 돌연변이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순간이었다.
문득 원광훈 사장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혹시··· 설마?
단순히 퍼즐조각 하나였던 그 생각은 이내 상황을 먹고 순식간에 자라났다.
말이 멎자 수화기가 의아한 어조를 토해냈다.
– ···사장님?
“이봐, 어쩌면 말이야. 그 자식이 노린 게 아니겠나?”
– 그 자식이라뇨?
“이현석이 말이야.
원광훈이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영원의 시대』는 곽태영을 제외하면 모두 그쪽 녀석들이지. 곽태영에게도 얼마든지 바람은 넣을 수 있어. 망쳐놓을 생각이면 얼마든지 망쳐놓을 수 있지 않겠나?”
적어도 원광훈으로서는 곽태영쯤 되는 인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런 물건을 만들었다는 것보다는 다른 의도가 섞였다는 게 설득력이 있게 보였다.
– 설마하니 일부러 망치라고 지시했을 리가······.
“간접적으로 유도할 수는 있었겠지. 통제가 되지 않는 유지아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는 일찍이 보여준 적이 있고, 심지어 그 때 담당 피디인 방 뭐라는 놈도 붙었다지 않나?”
물론 방을찬을 뽑아 측근에 앉힌 건 곽태영 본인이었다.
–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부하는 여전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 유지아랑 서예린은 『연극처럼』 시리즈를 굴리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재고, 이도나는 그쪽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최고 레벨의 캐시카우 아닙니까? 일부러 커리어에 마이너스를 만드는 건 합리적이지가······.
“그럼 이현석이 그 놈은 왜 『연극처럼』 시리즈가 절정인 지금 입봉 PD 따위한테 바톤을 넘기고 뒤로 물러났지? 자넨 그게 합리적인 결정으로 보이나?”
– 그건······.
부하가 목소리를 줄였다. 원광훈이 광대뼈 부근을 씰룩거렸다.
“지금 만들고 있는 건 또 어떻고? 1화에서 그렇게 어그로를 끌어놓고서는 2화에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하게 죽여 버렸어. 말이 되나? 세 살 배기도 그런 구성은 안 해.”
슬프게도 이현석과 김경숙은 순식간에 세 살 배기보다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부하도 설득력이 있다 싶었는지 비로소 진지한 어조가 되었다.
– ···그럼, 지금 위즈톤 전체가 짜고 저러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어째서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놈은 우리와 원한관계가 있으니까.”
– 장연철 피디 말입니까? 하지만······.
“그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챘겠지.”
일찍이 원광훈 사장의 입장에서 이현석은 영 애매한 존재였다.
KBC에서 하도 깽판을 친 바람에 방송문화진흥회, 나아가 방통위 쪽 간부들은 그를 마땅찮게 보고 있었지만 마땅히 끌어올 근거가 없었다.
원광훈은 그런 이현석을 찍어내는 게 본인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조금 욕심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실적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찍어낼 때 찍어내더라도 적당히 써먹다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연철이 자네만 믿겠네.”
“예! 맡겨 주십시오!”
그렇기에 이미 악연이 깊던 장연철 PD를 부추겼던 것이다.
장연철이 찍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도 좋고, 반대로 역공을 당한다면 그를 치워주는 성의를 보이면서 연을 맺는다. 그리고는 사탕발림으로 천천히 속을 파먹으면 된다ㅡ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번 기획에서 이현석 본인이 회사의 핵심 인원들을 파견하는 성의를 보인 걸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전제가 완전히 뒤집혔다.
원광훈이 이를 갈았다. 설마하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곽태영 감독에게 간섭을 할까요?
“멍청한 소리 말아. 충무로 전체를 적으로 돌릴 셈인가?”
이 수법의 비열한 점은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곽태영은 충무로에서 저예산 영화부터 천천히 실적을 쌓아온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이쪽이 곽태영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이미지를 줘 영화계와 척을 진다면 그 때야말로 원광훈의 사장 자리는 끝장이다.
“제기랄!”
모든 정황이 완벽했다. 심증이 이 정도로 모이고보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원광훈은 더 참아내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뱀 같은 녀석 같으니! 녀석과 손을 잡는 게 아니었어!”
부하는 굳이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이현석 혼자 벌인 짓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않겠나.”
원광훈이 이를 드러냈다.
“이런 짓거리를 하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는 오만한 작자가 딱 하나 있지.”
마치 우주시대의 독재자가 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과 어조였다.
“최도정······!”
훌륭한 헛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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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SBC 최도정 사장은 오늘도 드라마국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붙잡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제기랄, 이현석이 이 녀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구만.”
물론 『삼세번』의 기가 찬 전개에 대한 불만이었다.
『영원의 시대』의 기가 찬 전개에 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삼세번』 쪽의 막장성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실적이나 없는 놈이어야 모가지나 날리지······.”
“하하.”
오지호 CP가 멋쩍게 웃던 중 전화기가 울렸다. 최도정은 심드렁한 얼굴로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 저, 사장님··· MBS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목소리에 최도정 사장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똑바로 말해봐. 무슨 연락을 말하는 거야?”
– 저, 그것이··· 진행되던 정보 및 인적자원 공유를 모두 종료하겠다는 통보입니다.
“뭐? 왜?”
– 그게,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응당한 과정이라고만.
눈을 끔벅이던 최도정 사장이 이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미친놈은 또 왜 불난 데다 부채질이야?”
실로 지당한 반응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