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64)
“도대체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주연 매니저가 신경질을 냈다.
“대체 네가 이도나 엄마 결혼식엔 왜 가! 그쪽이 너 대놓고 눈엣가시로 보는 거 몰라서 그래?!”
그것도 혼자서ㅡ 강주연은 끝도 없이 올라가려는 어조를 애써 끌어내렸다.
몇 시간 전, 이설이 없어진 걸 깨달은 강주연은 깜짝 놀랐다.
연락이 닿지 않자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주변에 발품을 팔고, 이리저리 수소문을 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상황을 파악하고 데리러 온 게 고작 몇 분 전의 일이었다.
– 예? 모르셨나요?
그리고 그 정보를 제공한 건 위즈톤의 일개 직원이었다.
매니저가 되어서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말투에 강주연의 불쾌감은 하늘 끝까지 올라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가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듣는 거야? 다 저를 위한 일인데.
“듣고 있니?!”
“네.”
대답만 좋았다. 이설은 늘 그렇듯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일단 저런 태도가 되면 어르고 달래든 윽박지르든 이쪽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건 경험으로 익히 아는 바다. 쇠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강주연도 이번만큼은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그래도 선을 넘었다.
“설마 이도나한테 의리 지키자는 건 아닌 거 같고, 보나마나 이현석 그 인간이 간다니까 쫄레쫄레 쫓아간 거지?”
“······.”
이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강주연이 그 변화를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너나 아빠나 왜 그 인간에 껌뻑 죽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이번만큼은 실적도 안 좋잖아?”
최근 5화간 『삼세번』의 시청률은 어찌어찌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평판은 하락일색이었다. 사실 시어머니의 급사부터는 어떻게 포장할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진짜배기로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인물 – 곽태영 – 에게 묻히기는 했지만 주변에서는 이현석 역시 이번에는 길을 잃은 게 틀림없다고 떠들어댔다.
어찌어찌 유지되고 있는 시청률 역시 애매한 평가를 받는 동시간대 작품들이 종영되고 새 경쟁작이 들어오면 장담할 수 없으리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그리고 강주연의 아버지, KDS 엔터테인먼트의 강영철 대표는 로켓맨 샤이의 출연에 더해 『삼세번』에 꽤 많은 투자를 감행했었다.
강주연은 저번에 만났을 때 그 사실을 두고 대놓고 비꼬았다.
“거 보세요. 이현석이면 다 되는 거 아니잖아요? 그 인간도 거품 어지간히 낀 축이라니까요?”
널리 알려진 격언이 증명하듯 결국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다.
유지아와 서예린이라는 원석을 발굴한 건 놀랍긴 하지만 김경숙이라는 거물을 마음대로 다루려고 한 건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이었다는 게 강주연의 생각이었다. 저렇게 이도 저도 아닌 게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그 반응에 강영철은 되레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넌 최근에 이현석이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있는데요? 애초에 지금 제 담당 배우가 누군데.”
“더 좋지 않구나. 그럼 네 눈이 옹이구멍이라는 거니.”
한 방 먹은 강주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강영철은 이현석의 얼굴에서 어떤 징조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놈은 분명히 카드를 숨기고 있어. 『연극처럼』 15화나 『연구일지』의 변곡점처럼 장에 들어가기 좋은 타이밍을 노리고 있겠지.”
“···글쎄요. 전 아무 생각 없던 것 같던데요.”
어떤 명감독 유령이 들으면 실로 혜안이라고 탄복할 법한 시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명감독이 아닌 강영철은 딸의 무지함에 실망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현석이는 원래가 뻔히 보이는 단핑 삼색으로 읽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일단 자패를 내뱉고 나중에 물들이거나 적도라를 던지고 보통 수패를 들고 있는 정도의 낚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놈이지.”
“그놈의 마작 얘기를 나 말고 누가 알아듣는다고······.”
“그걸 모르면 내 뒤는 이을 수 없다, 주연아.”
아무튼 그의 이현석에 대한 믿음은 굳건해보였다.
그래 뭐··· 그간의 실적이 있으니 사업적으로 접근하는 강영철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설의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연극처럼』으로 네가 확 떴으니 은혜를 느낄 수는 있어.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은 존재감도 없는 엑스트라로 끝났잖아?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강주연이 천천히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런 엉망진창 스토리야. 너 이미지 관리 안 할 거야?”
이상적으로는 『연극처럼 살다』 촬영이 끝난 직후, 못해도 『연구일지』가 종영한 후에는 다른 쪽에 발을 담갔어야 했다는 게 강주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강영철이 ‘배워보라’고 보낸 현 소속사는 최악이었다. 말이 좋아 선량한 사람이고 배우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지 당장 뻔히 보이는 상황을 외면하는 건 낙제점이 아닌가?
간신히 떠서는 출연작품을 잘못 택해 몰락한 배우들이 얼마나 많던가? 멀찍이는 『컷스로트 아일랜드』의 지나 데이비스가 있고 가까이는 『TTL 소녀』로 떴다 한방에 간 성냥팔이 소녀가 있다.
그것이 꼭 남의 일이 아닐진대 왜 자진해서 나쁜 선택지를 골라가는지 강주연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언니 말씀대로 곽태영 감독님하고 같이 갔으면 됐을까요?”
“아니, 꼭 그러라는 건 아니었고······.”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강주연도 말문이 막혔다.
『삼세번』이 심각하다면 『영원의 시대』는 처참한 것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이도나의 커리어에 역대급 망작으로 남으리라는 건 안 봐도 뻔했다.
강주연이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이현석 말고 다른 데도 좀 보고 살자 이거야. 애초에 2년 전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알게 된 사람한테 뭘 그리 집착을 하는 거야?”
“아뇨. 그 전에 알았는데요.”
“뭐?”
강주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설마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어?”
“그건 아니지만요.”
이설이 빙그레 웃었다. 꽤 간만에 보는 순수한 종류의 웃음이다.
하지만 강주연이 가만히 노려보자 미소를 거두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옛날에 제가 KBC에서 엑스트라로 들어갔던 드라마 기억하세요?”
“KBC라면··· 『허공산책』 말이야?”
“네.”
“그건 완전히 망했었잖아. 촬영장 분위기는 좋았지만······.”
강주연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 그녀는 자신이 발굴한 이설의 비주얼을 믿었고, 어떻게든 세간에 노출만 시킨다면 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건이 좋지 않은 엑스트라 역이라도 공중파만 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뭐, 결론은 당연히도 드라마가 쫄딱 망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그 때 이현석 감독님도 조연출로 참여하셨거든요.”
“그래. 그 인간도 그럴 때가 있었겠지.”
지금은 그 철가면 같은 얼굴로 리테이크를 죽어라 굴리는 모습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강주연은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때 처음 본 거야?”
“네.”
“얘기도 했고?”
“한 번 만요.”
“언제?”
“왜, 촬영한지 얼마 지났을 때 회식을 했잖아요? 시청률이 안 나와서 침울한 분위기로.”
“···그리고 보니 그랬었지.”
모두가 우울한 분위기였던 건 기억한다. 기대치가 높진 않았지만 거기에 비해서도 처참할 정도로 망한 드라마였다.
입봉작이었던 피디는 만취해서는 펑펑 울기까지 했는데, 어지간한 강주연도 심히 안쓰러워질 수밖에 없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설은 고개를 저었다.
“전 당시에는 촬영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하지만 솔직히 왜 슬퍼하는지는 이해가 안 갔어요.”
“뭐? 왜?”
“그럴 게 타협했었잖아요.”
이설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피디님은 연기도 이거면 되겠지, 하고 적당히 타협했어요. 연출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하고 넘어갔고요.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던 건 그렇게 갈등을 빚지 않으려고 전부 대충 넘겼기 때문이에요.”
“······.”
“그렇게 타협을 반복한 끝에 당연한 결과가 나온 거잖아요? 그런데 왜들 그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일단 다들 위로하고 침울해하니까 저도 그런 척을 하긴 했지만요.”
강주연이 침음성을 냈다. 당시에 그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때 감독님을 봤어요.”
“그래······.”
“마치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보고 있더라고요.”
강주연이 눈을 깜박였다.
“쓰레기?”
“본인은 나중에 말도 안 된다고 부정했지만요. 아무튼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
강주연은 이현석을 떠올렸다. 평온한 표정을 지어도 영 험악해 보이는 얼굴에 이설이 말한 것 같은 표정을 더해보았다.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이설이 살포시 웃었다.
“인상도 그런데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솔직히 많이 무서웠어요. 사람도 못되게 보였고요. 하필 옆자리라 제가 움츠러들어 있는데 흘끗 보고는 그러시더라고요.”
사이다 먹을래?
이설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현석과 이설의 첫 만남이었다.
이때까지는 뭐, 그저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에, 제가 방송국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있잖아요?”
“그래, 고생이었지. 찾은 게 편집실 근처였지? 하여간에······.”
“네. 거기서 다시 감독님을 만났어요.”
“···만났다고?”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본 거지만요.”
이설이 한참 길을 헤매다가 도착한 곳은 작은 편집실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 편집실과 장비가 생기며 사실상 낡은 것들을 임시로 버려둔, 말하자면 창고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현석은 그 어둑한 곳에 혼자 있었다. 워낙 풍채가 좋다보니 살짝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이 훤히 보였다.
이설은 호기심에 문틈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기색을 살폈다.
이현석은 화면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표시된 건 이미 방영이 끝난 지 오래된 드라마였다.
“혹시 9화 기억하세요?”
“아··· 개중에서도 평가가 최악이었지. 피디도 없던 화 취급하고 얼른 잊어버리려고 했고.”
“그렇죠. 그런 물건이었어요.”
하지만, 이현석은 그런 걸 천천히, 신중하게 가다듬고 있었다. 이설은 천천히 이어지는 작업을 바라보았다.
씬의 순서를 바꾸고.
배치하는 방식을 바꾸고.
간격을 줄이고.
보다 미세하게 자르고.
사운드의 라이팅을 키우고.
톤을 더해 양감을 살려내고ㅡ
이설은 당시 포스트 프로덕션, 소위 편집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현석의 그 작업에 어느 정도로 혼이 들어가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연습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현석은 드라마를 쌀알 하나까지 다시 빚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미 나가서 끝나버리고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데이터를, 그저 우직하게.
이설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나중에 듣기로는, 그냥 어중간한 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는 모양이에요.”
그 후로도 이현석은 일이 없을 때면 늘 그곳에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 멀쩡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촬영 과정이, 소스가 문제였으므로 후처리를 빡세게 한다고 뭐가 되는 수준도 아니었고.
하지만 이현석은 그렇게 했다.
강주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게 멋지게 보였다는 거구나. 하지만······.”
“멋지다고요?”
이설은 드물게 킥킥대고 웃었다.
“전 거기다 대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는데요.”
“···뭐?”
“가만히 지켜보던 중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거든요. 당시에 아버지 일이나··· 여러모로 한계에 몰려있었던 시기라.”
“······.”
강주연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이설은 농담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딴 짓을 해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쓸모없는 짓은 쓸모없는 짓이다. 나를 언젠가 알아줄 거라는 기대는 허사일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ㅡ 뭐 그야말로 생각나는 대로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뭐, 하고 이설은 뺨을 긁적였다.
강주연은 지금껏 이설이 한 번도 감정적으로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었고, 사실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깜박거리다가 물었다.
“···그래서, 그 인간은 뭐라고 했는데?”
“가만히 절 바라보다가 그러더라고요. 배가 고픈 모양이라고.”
“뭐?”
“배가 고프면 화가 난댔어요. 그리고는 제 팔을 잡고 성큼성큼 끌고 갔고요. 저는 깜짝 놀라서 뭐 하는 짓이냐고 고함을 질러댔고 말이죠.”
“······.”
이쯤 되면 정말로 질 나쁜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미지와 괴리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적어도 강주연이 아는 이설은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
“그리고는 데려간 게 하필이면 허름한 순대국집인 거예요.”
하지만 이설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제가 황당해져 있으니까 어디서 칫솔하고 가글을 사오더라고요. 아직 시간 많으니까 실컷 먹고 이 닦고 배 꺼트리고 편한 마음으로 오후 촬영 들어가라고.”
“······.”
“사실 저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줄 알았어요.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 말만 하고 계산을 한 뒤에 가버리더라고요.”
멍해져 있던 중 국밥이 나왔다.
이설은 황당한 심정으로 보글보글 끓는 국물을 바라보았다. 그냥 일어설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술만 뜨자 하고 입을 댔다.
그리고 그대로 전부 먹어치웠다.
이상하게도 그러고 나자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다 먹고 일어서면서 이설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엮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