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68)
“그, 이현석 피디님. 이설 씨가 하신 말씀은.”
“···뭐, 오버가 좀 심하긴 하지만 제 멘토이자 목표가 김철 감독인 건 사실입니다.”
이현석이 마지못해 내놓은 답에 기자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제아무리 이현석이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고는 해도 김철과 비교하자면 달과 반딧불 수준으로 차이가 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호언에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상대가 이현석이니 양념을 더 치는 건 힘들어도 키워드만으로도 논쟁을 부르고 액세스 숫자를 늘릴 건 보지 않아도 훤했다.
하지만 그런 동료들과 달리 실눈 기자는 뱀처럼 눈을 빛냈다.
‘멍청한 자식들. 이현석의 수작질에 넘어가다니.’
그는 이설이 들어오며 이어진 일련의 대화는 이미 예정되었던 게 분명하다고 보고 있었다.
연기가 그럴듯하긴 했지만 베테랑 기자인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이설 성격 모르나? 암만 봐도 위화감이 넘치는 얘기잖아.’
그간 이설은 영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말이 없고 조용하다는 평판이었지만 KBC 사태가 있은 후에는 잠시 밝고 수다스러워졌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부류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실눈 기자의 생각은 달랐다. 다시 말해, 이설은 일상생활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밝은 태도를 유지했던 건 사정상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방금 전의 태도도 따로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 분명했다.
‘드라마가 물어뜯기기 전에 자기를 먼저 재료로 던져주겠다는 거겠지. 하늘 위에 있는 김철을 끌어들이면 욕은 좀 먹겠지만 지금 이현석이 위세를 생각하면 큰 문제는 아니야.’
김철과 비교되면 필연적으로 지금 드라마가 아니라 『연극처럼』과 『연구일지』를 끌어와 비교하게 된다. 실제로 연출법 면에서는 김철과 조금 닮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나온 적이 있고.
그러면 설령 『삼세번』이 망하더라도 위세 자체는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연예계의 위세는 관심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듣던 대로 곰 같이 생긴 주제에 교활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군!’
하지만 실눈 기자는 속지 않았다. 그것이 이현석의 오산일 터였다.
다른 기자들이 어떻게 기사를 나눠가질지 논의하는 와중에도 실눈 기자는 촬영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른 기자들이 쭉정이를 가지고 기뻐할 때 그는 죽창을 찌를 작정이었다.
“14번 씬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이설 양, 준비하세요.”
이내 준비가 끝났는지 하나둘 점검을 마친 이현석이 입을 열었다.
“시어머니가 죽은 후 여주인공은 비난과 백안시로 여러 모로 한계에 몰려있습니다. 그 심정을 최대한 드러내주셔야 합니다.”
“······.”
침묵이 흘렀다.
못들은 척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이현석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준비해라.”
“네.”
이설은 기다렸다는 듯 대본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연기가 분명하다고 실눈 기자는 자신을 애써 다잡았다.
이설이 내려놓은 대본은 몇 번이고 읽은 것처럼 구깃구깃했지만 정작 종이는 새하얬다. 메모도 없고 밑줄도 없었다.
실눈 기자는 그걸 슬그머니 사진으로 찍었다.
이설이 카메라 앞에 서자 이현석과 대화를 나누던 김경숙 작가가 메가폰을 건네받았다.
“214번, 45번, 112번, 89번 차례대로 갈 수 있나요?”
“해볼게요.”
이설은 한 번 시선을 내렸다 들고는 수긍했다. 뜬금없는 번호 나열에 기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건? 씬 번호인가?”
“아까 14번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네 개 연속촬영이 어딨어.”
“그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머잖아 알 수 있었다.
이설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했나?”
한 기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카메라를 든 사이, 표정이 스르륵 움직였다.
대박을 친 배우치고는 예능 등으로 주가를 높이는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연구일지』 때는 끝까지 눈에 띄지 않아 원 히트 원더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듣던 배우.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기를 보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맛있어.
행복해.
행복한 만큼 죽이고 싶어.
아니, 죽고 싶어ㅡ
이설은 대사를 치지 않았다. 그저 표정과 움직임만으로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을 연기했다.
어떠한 표정을 보았는가 했더니 사라지고, 또 다른 표정을 보았는가 했더니 역으로 나타났다.
하나가 넷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넷이 똑같은 가면을 쓰고 하나를 연기하는 것 같은 모습.
드라마 촬영이라기 보단 경탄할 수준의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짜 미친 사람인 거 같은데······.”
한 기자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욕이 아니라 칭찬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배기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저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실눈 기자조차 눈앞의 장면에 무어라 쓴 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다중인격.
얼핏 막장스런 소재를 굳이 꺼내든 이유는 이거였는가. 연극처럼 15화처럼 여기서 뒤집으려는 건가ㅡ
그렇게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던 순간이었다.
“컷.”
NG를 낸 이현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영 애매한 표정이었다.
“조금 바꿔서 가겠습니다.”
“네.”
기자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재차 연기를 지켜보던 이현석은 다시금 NG를 냈다. 그리고는 뒤를 보며 스태프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의외의 인물의 이름이 나왔다.
“샤이 씨, 지금 들어가시랍니다!”
“넵!”
샤이는 보무도 당당하게 촬영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도중 기자들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자들 역시 엉겁결에 따라 숙였다.
“···그리고 보면 샤이도 여기 나왔었죠? 까맣게 잊고 있었네.”
“최대웅 배우님은 간간히 씬이 있었는데 저쪽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기자들은 조금 시원찮은 기색이 되어 이설과 나란히 선 샤이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빠져드는 연기를 본 입장에서 그 샤이가 들어오니 분위기가 깨진 기분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구색 맞추기로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을까요?”
“이현석 피디가 저 연기 NG 내고 넣은 거니 뭔가 생각이 있겠지. 몇 달간 그래도 좀 늘었을 거 아니야.”
그렇게 기자들이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샤이가 입을 열었다.
「오. 이거. 형수님이시군요. 여긴. 웬일이십니까?」
“······.”
초중고 국어시간에나 볼법한 놀라운 국어책 읽기에 좌중의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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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이설의 스크린 지배력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누가 들어와도 끌고갈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샤이의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범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
샤이의 연기를 본 기자들은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대로 눈을 후벼 파고 싶었다. 혹은 가슴에서 우러난 갑작스러우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진실한 폭력충동에 사로잡혔다.
저런 연기가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당장 초등학교 학예회의 에이스를 데려와도 저거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저건 연기에 대한, 아니, 차라리 온 세상에 대한 모독이었다!
주변의 반응 역시 기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거나 힘들 것 같으면 슬쩍 눈을 돌렸다.
“흠.”
그런 천편일률적인 반응 속, 이현석이 메가폰을 들었다.
“컷. 잘 하셨습니다. 다음 갑시다.”
“예!”
“···네.”
오케이가 나왔다. 이설은 묵묵히, 샤이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스태프들의 회복은 빨랐다. 한 번 눈을 질끈 감거나 한숨을 쉰 뒤 익숙한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지금 우리가 뭘 잘못 들었나?
“저, 저기, 이현석 피디님!”
한 기자가 촬영장의 배치가 바뀌는 틈을 타 허겁지겁 움직였다. 그는 실눈 기자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씬, 오케이입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장면이었지요?”
···어디가?
“그, 이설 씨 혼자 연기하시던 장면은.”
“음. 좀 아쉬웠지요. 이제 좀 박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빙그레 웃는 모습에 기자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방금 장면 따로 찍으시는 것 같던데?”
“예? 아, 예······.”
실눈 기자는 움찔해 눈치를 보았지만 이현석은 딱히 무어라 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도리어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기사를 내실 때 샤이 씨의 연기력을 중점적으로 다뤄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쪽이 재미있을 것 같고.”
“······.”
그러니까, 드라마를 얼른 말아먹어 달라고?
아무리 봐도 그런 뜻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어려우시겠습니까?”
“아뇨, 그······.”
어려울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쪽이 기자로서는 조회수를 확보하기에 용이한 수겠지.
문제는 이현석 본인이었다. 이쯤 되자 실눈 기자도 눈앞의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현생 인류와 같은 종류의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실눈 기자는 잠시 이현석과 눈을 마주쳤다. 여태껏 봐온 중에 가장 진실된 표정이었다.
사실 이 인간이야말로 벌칸 출신 외계인인 게 아닐까?
실눈 기자는 이내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잘 됐군요.”
이현석이 흐뭇하게 웃었다.
“멋진 기사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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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끝난 뒤 나와 김철 선배는 흐뭇하게 웃었다.
[타이밍이 좋았군.]“예. 오지호 CP가 간만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장의 카드인 샤이가 투입되는 이상 그 파급효과를 최대한 키워야 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와중 찾아온 기자들, 심지어 현장 취재는 내게 있어 실로 적절한 기회였다.
[그 녀석들, 죄다 네가 돌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더라.]“뭐, 선배님과 비견할 만한 사람이 저 아니겠습니까.”
[흐흐흐.]김철 선배가 재차 낄낄댔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아무리 지아와 곽태영이라도 이 순수한 연기력의 차이는 뒤집을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자신했다. 샤이는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진 병기였다.
게다가 곽태영 감독은 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행복의 와중에 있었다. 몹시 축하할 만한 일이었지만 불행히도 얼빠진 정신력으로는 살벌한 막장드라마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반격의 봉화를 올릴 때가 온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 그 첫 번째 퍼즐이 도착했다.
“이 피디님. 『연예투데이』 쪽 기사가 나왔습니다.”
“한 번 봅시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어디보자, 『삼세번』의 기사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