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72)
“우리와 같은 제작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대개 하나입니다. 자신이 괜찮게 느낀 연출이 과연 대중에게도 통할까.”
곽태영 감독은 자신의 추측을 안기식 사장에 이어 아내에게도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영상 자체는 얼마든지 독특하게 뽑아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가 멋지다고 감탄할 만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 시도할 수 있지요.”
“네.”
“하지만 당연히도 수많은 영상을 보고 단련된 한 제작자의 눈과 일반적인 대중들의 시각은 많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걸 실험하고 알 방도가 없다.
수많은 교훈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망작들이 태어나는 이유다.
그렇게 망작이라 불리는 『삼세번』에 평상시 타인의 제작물에 지나치다시피 무관심하던 김철이 입김을 넣었다.
곽태영으로선 그 사정을 하나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칸에 도전하기 위해 이현석 피디님을 꾀어 실험작을 만들고 있다는 거군요.”
아내는 온화한 인물이었지만 여러모로 악연이 있는 김철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비열한 짓이네요.”
“···증거라곤 제 추측뿐인 상황인데 믿어주시는 겁니까?”
“당신은 지난 두 편에 김철 그 사람이 손을 댔다고 확신하고 있잖아요.”
아내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당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어요.”
“···고맙습니다.”
둘은 한동안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간 『삼세번』의 스타일이 이현석 피디답지 않다는 말은 계속 나왔어요. 작가의 차이라기에는 스토리 외쪽 문제였는데 김철 그 사람의 짓이라면 앞뒤는 맞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어쩌면 이 감독의 능력은 현재로서도 저보다 한참 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이번엔 겸양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소리에 무어라 말하려는 아내를 보며 곽태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껏 이현석 감독이 지난 두 작품에서 보여준 한 방처럼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위해서 쓸데없는 부분에 집착하고 있다고. 하지만 반대였던 겁니다.”
“반대라니요?”
“기획의 근본인 김철의 의견 자체가 부당하고 엉망진창이었다. 그걸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 최대한 퀄리티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곽태영의 어조는 무거웠다.
“어떻게든 타고난 능력으로 그걸 소화하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들어맞습니다.”
의외로 어찌어찌 궤는 맞는 이야기였다.
그 부당하고 엉망진창인 요구가 궁극의 막장드라마라고 본다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김철이 모든 기획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도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전제가 올바른데도 어째선지 이유 없는 악의가 김철을 덮쳤다.
“믿을 수가 없는 악행입니다. 대체 어째서 『파랑새』는 그런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던 것인지······!”
곽태영이 이를 악물었다.
본래 온화한 그는 분노를 크게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이면 안에서는 이미 열화와 같이 타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삼세번』의 시청률은 1화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건 가히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전작은 모두 시청률 40퍼센트를 넘겼으니까요.”
“그건 전부 한 시리즈니 사실상 전체를 입봉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감독은 입봉작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고 세계에 발을 디딘 겁니다. 일찍이 국내에서 나온 적이 없던 위업입니다.”
그 시리즈를 같이 연출한 두 작가는 지금 곽태영과 같이 일하고 있다. 재능의 편린을 느끼긴 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었다.
즉 시리즈의 흥행은 오롯이 이현석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수많은 노력을 거듭 쌓아와 간신히 지금의 경지에 이른 곽태영으로서는 그야말로 경탄밖에 나오지 않는 재능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김철 본인마저 뛰어넘을 잠재력이 있는 인재.
“그런 인재를 자신의 사욕을 위해 이용하다니, 창작자의 이름을 대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야 할 만행입니다······!”
곽태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김철이 들었다면 “이용당하고 있는 게 누구냐, 이 새끼야!” 하고 발광하며 변호사를 불렀을 법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여기엔 유령이 없었고, 김철은 본래가 죽일 놈이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던 중 아내가 달래듯 입을 열었다.
“아직까진 전부 추측일 뿐이에요. 우선 이현석 피디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겠지요. 한 번 약속을 잡아볼 요량입니다.”
곽태영이 한숨을 쉬었다.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태껏 김철이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본인이 숨기려 하고 있는 이상 밝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드러낸다 하더라도 의미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김철 정도의 인물이 후배에게 ‘조언’을 해준 걸 가지고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바꿔 말하자면 그것까지 철저히 고려했을 김철의 간악한 속내에 곽태영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위즈톤 쪽 분들과 얘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작가 분들은 여러모로 이 감독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혹여 도나한테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있겠군요.”
말끝을 흐리는 남편의 뜻을 읽어낸 이도나의 이모가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가 눈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는 솔직히 상상이 안 되네요. 다짜고짜 기자회견 열어서 욕설을 퍼붓는 정도면 양반이겠지만······.”
곽태영은 그게 양반이면 심각한 건 어떤 건지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제정신으로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런 성격으로 자랐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
번지수를 따져보면 외조카 이상 딸 미만으로 대해야 할 애매한 위치의 사이. 곽태영은 침묵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반면 아내의 태도는 적극적이었다.
“이제 당신도 무관한 사이가 아니에요. 뭔가 아니다 싶으면 따끔하게 이야기해주셨으면 해요.”
“저, 그건······.”
암만 그래도 무리한 요구 아니냐. 한 마디 하려는 입을 아내가 막았다.
“도나가 겉이야 잘 꾸미고 다닐지 몰라도 내실은 제가 보기엔 사춘기 시절과 비교해 발전이 없어요.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호의를 표현해본 적이 없으니 태도가 저 모양인 거고요.”
“으음.”
“여유가 생기고 일이 잘 풀리면 자연히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물렀던 모양이에요.”
말에는 열의가 넘쳤다.
곽태영으로서도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저번에 식장에서의 태도를 보고는 저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확신했어요. 주변이 죄다 적인데 바보같이 틱틱대고나 있으니 원······!”
“적이라고요?”
“네. 제일 어려보이는 애가 강적이더라고요. 장해물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표정인 게.”
“······?”
곽태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아내가 재차 채근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아내는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참, 그리고 보면 오늘 도나는 뭘 한다고 해요? 오늘 한 번 들르라니까 바쁘다고 하던데.”
“아, 후배를 만난다더군요.”
“어머, 에어리즈 막내 아가씨요? 그리고 보면 드물게 친해졌다고 들은 것 같은데.”
드디어 그 아이도 휴일날 같이 나갈 사람이 생긴 건가 반색하는 모습에 곽태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삼세번 쪽 주연인 이설 양이라고 합니다.”
“······.”
그 말에 어째선지 아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표정이 기묘하다.
곽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없길 바래야겠네요.”
아내가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현석 피디님은 언제 만나뵐 생각이세요?”
“아직 생각중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가능하면 저도 같이 뵈려고 해요.”
어··· 음?
곽태영이 눈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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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이도나는 출입문에서도 보이는 자세로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눈만 흘끗 움직여 이쪽을 보더니만 여전히 거만한 태도인 채 이쪽으로 오라고 턱짓을 한다.
이설은 순순히 따르면서도 혹시 사람들이 드나드는 동안 줄곧 저러고 있었던 걸까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뵙네요, 선배님.”
“그래.”
이도나는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나는 늘 마시던 걸로. 너는 뭘로 할래?”
“음, 홍차로 부탁드릴게요. 쇼데르로.”
“···쇼데르?”
“스톡홀름이요.”
이도나는 스톡홀름 증후군이 대체 뭔 상관인가 싶었다.
“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지만 종업원은 이해한 모양이었으므로 애써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입맛이 썼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겉멋만 들어서는.’
방금 전 품위 있게 ‘늘 마시던 걸로’라고 말하기 위해 혼자서 여길 몇 번이나 왔었던가.
이도나가 애꿎은 불만을 곱씹던 사이 이설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배우로서는 당연한 몸가짐인데도 어째 그 모습조차 눈꼴이 시려웠다.
자연히 평소보다 태도도 뾰족해졌다.
“영 기분이 상한 표정이네. 내가 부른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설이 빙그레 웃었다.
“전 선배님을 무척 좋아하는데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진짠데.”
“······.”
이설은 살짝 풀이 죽은 모습이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떤 흉내를 내고 있는 게 아니라 꽤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태도다.
이도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다잡았다.
“인터뷰 봤어.”
“그, 어떤 인터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가 그 인간이 김철 정도는 우습게 때려잡을 거라고 말한 헛소리.”
“아아.”
이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헛소린가요?”
“···진심이야?”
“감독님은 지금껏 하고자 하신 건 전부 해내셨는걸요.”
이설이 빙긋 웃었다.
“김철 감독님을 뛰어넘는다는 얘기도 예외가 될 순 없겠죠. 저도 부족하나마 그 때까지 곁에서 도울 생각이에요.”
“······.”
이도나는 끓어오르는 열불을 애써 억눌렀다. 설령 그렇게 믿더라도 그걸 대중한테 떠들어서 좋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걸 지적하려고 했지만 이도나의 입에서 나온 건 어째 전혀 딴소리였다.
“그 인간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언제?”
“비밀이에요.”
“너······.”
“그런 표정 지으셔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죄송해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어떻게 저리 뺨따귀를 날려주고 싶을 수가 있을까.
이도나는 재차 눈앞의 상대가 자신의 천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고개를 든 이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래서··· 절 부르신 이유는 그것뿐인가요?”
“아니.”
이도나가 입을 삐뚜름하게 떴다.
“충고나 하나 하려고.”
“충고요?”
“요즘 무슨 바람이 불어서 태도가 변한 건지는 몰라도, 넌 지금 그 사람한테 방해밖에 안 돼.”
“······.”
생글거리던 이설의 표정이 지우개를 놀린 듯 스르륵 지워졌다.
이도나는 거기에 움찔한 걸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