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75)
곽태영은 원고를 쥔 채 고민에 잠겼다.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하지만 방향성이 어긋나도 너무 어긋난 상황이었다. 곽태영은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심하다가 최대한 돌려 말해보기로 했다.
“혹 옛날 사람 중에 로버트 모지스를 아십니까?”
“···현재의 뉴욕을 만든 사람 아닌가요? 미스터 빌더.”
“맞습니다.”
서예린의 대답에 곽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요.”
“업적도 많지만 실정은 더 많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적들은 – 실제로 공직에 오른 적은 없지만 – 그가 대형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비합법적인 수단을 썼을 때 기회로 여겨 맹공을 가했다지요.”
아주 철저하게 준비되고 벼려진 한 방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왜죠?”
“이미 때가 6월이라 다들 시원한 공원이 생긴다는데 까짓 것 알 게 뭐야, 하는 분위기였거든요.”
“······.”
지금 공원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서예린도 잘 알았다. 유지아 역시 행간의 의미는 잘 몰라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챌 눈치는 되었다.
곽태영은 어려운 얼굴로 원고를 덮었다.
“솔직히 말해 완성도가 높고··· 개인적으로는 만들어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미 그 전까지의, 그, 뭐라고 할까. 방방 뛰는 전개에 익숙해져 있어요.”
“···그건.”
“여기까지 와서 다시 직구라니,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 아닙니까?”
두 작가는 입을 닫았다. 반론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이 변화는 극적 완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 아주 개인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
유지아는 고개를 숙였고 서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감독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폐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절 설득하실 생각은 없으시고요?”
“···예.”
“흠.”
곽태영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평소라면 쉬이 물리쳤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김철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처로 명성을 얻고 있기는 하지만 곽태영 역시 타협하지 않아야 할 곳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 어떤 진실이 그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이건 혹시 이현석 감독의 『삼세번』을 의식한 변경입니까?”
“예? 예······.”
서예린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말한 건 사심이었지만 곽태영의 듣는 귀는 달랐다.
두 작가는 이현석과 같은 회사 소속이며, 입봉과 함께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온 인물이다. 그런 인물들이 이 타이밍에 급격한 노선 변경을 주문했다라.
생각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저쪽은 언제나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김철이 들으면 “그딴 거 없어, 새끼야!” 하고 가슴을 칠 장면이었지만 본인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이현석 역시 이쪽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양쪽 모두 존재치도 않는 ‘한 방’을 경계하는 실로 바보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곽태영은 생각 끝에 약간 타협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럼 우선 일정을 당겨보지요.”
“예?”
“우선 사이드 에피소드로 넣고 반응을 보겠습니다. 괜찮다면 본편의 진행을 바꿔보는 것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눈을 깜박이던 서예린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렇게 이후의 전개를 크게 가를 분기점이 생기던 시각,
이현석은 일을 떠넘긴 후배와 만나고 있었다.
#
“···저기, 선배님?”
“왜.”
“저, 이설 씨한테 뭔가 큰 잘못이라도 했나요?”
“글쎄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귀하신 분이 이렇게 누추한 촬영장에 왕림하셨으니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한창 바쁠 때 아니냐?”
“좀, 장난치지 마세요, 선배님! 죄다 저한테 떠넘기시고는!”
진저리를 치는 정수아를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현재 벌칸 시리즈 완결편을 맡고 있는 정수아는 매일이 울상이었다. 아직 기획 단계에 불과한데도 머리가 한가득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글쎄, 솔직히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작 과정이야 처음이니 난항이겠지만 기획이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 아닌가?
스토리는 지아가 얼추 짜둔 얼개가 있었고, 배경이나 기타 설정은 일본의 시라카와 사이토가 검수를 받고 신나게 써댄 물건이 몇 권이나 있었다.
만들고 싶은, 자기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만 따오면 될 것을 뭘 그리 고민하고 있는지 원.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쉽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건 선배님 같은 분이나······!”
정수아는 목소리를 높이려다 다시 몸을 움찔 떨며 눈치를 보았다.
나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대, 대체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예요? 와서 이유라도 좀 말해달라고 해주시면 안 돼요?”
“본인은 노려보는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선을 한 번도 안 떼는데요? 당장 꺼지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요?!”
“착각이야.”
“저게요?!”
정수아가 하도 믿지 못하는 구석이길래 나는 직접 이설을 불렀다.
질문을 듣자 참으로 맞는 말이라는 듯 연거푸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그냥 보는 거예요.”
“······.”
정수아는 백퍼센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따질 만한 배짱도 못 되었다.
멀리서도 부담스러웠는데 가까이서도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노출되자 녀석은 더 이상 참아내지 못했다. 어물어물 몇 마디 하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꽁무니를 빼는 모습에서 시선을 돌린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말이다.”
“···감독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시비를 안 거니 쫓아보내는 게?”
이설은 대답하지 않고 쪼그라들어 고개를 숙였다.
“민폐라면 안 할게요.”
“···그냥 해라, 해.”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이건 핑계라도 댈 수 있으니 차라리 낫다. 이도나니 강아라니 만나는 사람마다 싸움을 걸어대는 거보다는 낫겠지.
“인간 관찰도 좋다만 연기에도 집중해줘라. 지아와 서 작가님이 최근 기세가 좋다더라. 묵직한 게 올 거야.”
“묵직한 거.”
“이도나 씨도 요즘 의욕이 넘치는 모양이고.”
“이도나.”
“뒤에 선배를 붙여야지.”
“네.”
이설이 눈을 작게 감았다 떴다. 눈이 묘하게 빛나고 있다.
···음, 경험상 이럴 때면 내게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없었는데.
“걱정 마세요. 있는 힘을 다할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적당히······.”
“죽을 힘을 다할게요.”
“···죽지는 말고.”
그런 대화가 이루어지던 찰나였다.
정수아에 이어 촬영장에 꽤 반가운 인물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날 발견하고는 씩 웃으며 외쳤다.
“이현석 피디님! 우리 대표님 계십니까!”
“아니, 지호 씨가 여긴 웬일이십니까?”
깜짝 놀란 나는 곧장 홍지호와 얼싸안고 어깨를 두드렸다.
“귀국은 다음 주 예정 아니었습니까?”
“일본 쪽 일정이 조금 빨리 끝났습니다. 보고를 못 받으셨나 봐요? 서운하게시리.”
“이거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서.”
“정말 실망입니다. 저희가 보통 사입니까?”
홍지호가 비련의 남주인공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연기력에 마스크까지 겹치니 어떻게 받아볼 분위기도 아니다.
나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반년 전, 『연구일지』 촬영이 끝난 뒤 홍지호는 일본 쪽 일정이 잡혀 곧장 출국했다.
연구일지에서 비중이 없다고 투덜대기 바쁘던 홍지호지만 아무래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컸던 모양이었다. 마지막 영상통화에서는 전에 없는 인기라고 입이 함지박만해져 있었다.
그 이도나의 어머니뻘 되는 인물의 결혼식에도 참여하지 못할 정도니 어지간히 바쁘긴 했던 모양이다.
이도나는 없는 게 낫다고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뒤로 적잖이 들볶았을 건 뻔해 보였다.
홍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환은 제일 비싼 걸로 보냈는데 말이죠.”
“축의금을 많이 넣었어야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하하.”
재차 나를 얼싸안던 홍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아, 이설 씨도 계셨군요. 그 녀석이랑 한판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설은 드물게도 멍한 표정이었다.
놀랐다고 할까, 심각하다고 할까, 지금껏 생각도 못한 어떤 종류의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홍지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그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었겠지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
멍하던 이설의 표정이 스르륵 변했다.
“어··· 저기요?”
“이설 씨?”
“작작 해라.”
노골적인 시선에 쩔쩔매는 홍지호를 보고 나는 이설의 입에 초콜릿을 우겨넣었다.
···음.
더 타박을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거참 누가 키웠는지 먹는 거 하나는 복스럽다니까.
하지만 이쯤 되면 슬슬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대체가 어지간한 기행이어야 말이지.
[가만 안 두면 어쩔건데? 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잖냐.]‘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야겠지요.’
[알 만한 사람?]부모 외에 다른 친지가 있던가, 하고 김철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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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걸 눈치 챈 김철 선배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저도 꽤 간만이라서요.”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전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뭐야? 이 코딱지만한 골목길은.]나는 주차장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허물어지고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작은 공영주차장을 하나 찾아내 다시 먼 길을 돌아왔다.
[···이 낡다 못해 허물어지는 건물에 오려고 그 생고생을 한 거냐?]“뭐, 그렇죠.”
카페, 『헐록 숌즈』.
나는 암만 봐도 스펠링을 헷갈린 것 같은 낡은 팻말을 흘끗 보고는 문을 열었다.
“예, 몇 명이신가요?”
턱을 괴고 천장에 붙은 작은 브라운관 TV를 보고 있던 주인이 시선을 돌렸다.
길게 하품을 하고 있던 얼굴이 나를 보더니만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내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누나.”
“······.”
“뭐야, 손님 처음 봐?”
“···세월이 서럽구나.”
“뭐?”
“집 나간 여우가 곰이 되어 돌아왔으니 어이할꼬, 어이할꼬.”
과장 섞인 탄식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잘 생긴 곰도 있나.
“그래, 웬일이니? 김철에 필적하는 명감독이 될 때까지는 올 생각이 없다더니.”
나는 옆을 슬쩍 보고 헛기침을 했다.
“···그건 설이한테 한 얘기잖아. 본인이랑 만났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
“하여간에 입만 살아서는. 기껏 기타 싸게 구해줬더니 어린애 핑계로 한 달 만에 팔아넘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니까.”
“그거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이야?”
“나 죽을 때까지.”
노골적으로 하품을 하며 원두가 든 통을 꺼낸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보나마나 설이지?”
“일단 주문이나 받아. 나 손님이거든?”
“손놈이겠지.”
나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여전히 커피를 얕보고 있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맛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