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91)
일산제작센터, 촬영이 끝난 뒤의 편집실.
나와 김철 선배는 늘 그렇듯 벽에 부딪친 와중이었다.
슬프게도 김철 선배는 내 참신한 아이디어를 수용할 생각 없이 오로지 거부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설이가 사실 대지모신과 접선하고 있었고, 지구에 대빙하기가 오는 걸 막으려는 최대웅 씨와 외신(外神)을 토벌할 여행을 떠난다는 안도 접어두겠습니다.”
[아니, 그걸 안 접어두면 어쩔 건데. 작가 설득할 자신 있냐?]나는 이거야 원,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김경숙 작가님은 제법 호의적이셨습니다만.”
[···뭐?]“다만 최종적으로 시댁을 외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조건은 있었습니다. 사실 그 두 개에 별 차이는 없다더군요.”
[그 나이대 여자들에게 있어 시댁이란 무엇일까······.]철학적인 고민이었다.
어쨌거나 김철 선배가 계속 강짜를 부리는 통에 나는 다시금 노트에 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다섯 개나 되는 안이 전부 파국을 맞은 셈이었다.
나는 슬픈 얼굴로 폐기된 시놉시스들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어떻게 이토록 이렇게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끔찍한 건 너지, 이 자식아.]김철 선배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나마 마지막 게 낫지, 그 전것들은 아예 배경이 바뀌어 버리잖냐!]“지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패턴은『다크 시티』에서 꽤 인상 깊지 않았습니까?”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SF에서 좀 벗어나자, 현석아. 보니까 그 바닥이 막장도 올리기엔 영 좋지 않더라. 너도 익히 경험해봤잖냐?]“음······.”
나는 침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랬다.
지난 두 차례, 내 완벽하고 꼼꼼한 계획이 실패로 귀결된 까닭은 아마 장르의 탓도 없지 않을 터였다.
결국 SF란 장르와 나는 잘 맞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하더라지.]“제기랄, 그러는 선배님도 어깃장만 놓지 마시고 아이디어 좀 꺼내주시지 그러십니까?”
[내가? 뭔 수로?]“옛말에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도 읊는다지 않습니까?”
[난 그냥 서당고양이 할랜다. 그쪽이 더 귀엽고.]“······.”
고양이는 무슨, 하마겠지.
뭐, 그렇게 오늘도 평소와 같은 소득 없는 대화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문득 노크와 함께 문이 덜컥 열렸다. 편집실 쪽 스태프 한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현석 피디님!”
“무슨 일입니까?”
혹시나 대화가 들렸을까 싶어 슬쩍 휴대폰을 귀에 댔다. 하지만 스태프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태도가 아니었다.
“저,『인생캠프』의 MC를 맡으신 분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캠프』? 어째서요?”
“그것이······.”
묘하게 버벅이는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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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캠프』의 MC들은 아주 유명한 이들은 아니어도 제법 낯이 익은 면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라 그런지 하는 말이 꽤 이해하기 어려웠다.
“음, 그러니까··· 뭘 하러 오셨다고요?”
“큰절로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절이라고요?”
“예.”
“······?”
“······??”
나와 그들은 한동안 마주보며 의아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MC들은 서로 마주본 후 아직 못 들으셨나, 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그것이······.”
그렇게 낮에 있던 『인생캠프』 촬영의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황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김철 선배에 이르러서는 배는 더한 표정이었다.
내 표정을 어떻게 읽었는지 MC들은 살짝 기가 죽은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일단 편집은 들어가겠지만 방청객들도 있으니······.”
“그, 솔직히 농담이 좀 괴상하긴 했··· 아뇨, 저희가 제때 못 받아서 일을 망쳤으니 저희 잘못이지요!”
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허둥지둥 말이 빨라진 걸로 봐서는 아마 다들 나를 배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음.
하지만 뭐, 이 경우엔 대충 들어도 이 사람들이 피해자였다. 우리의 이도나 씨가 뭘 하려고 했는지는 뻔했다.
나는 머리를 짚지 않을 수 없었다.
‘맙소사, 미수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설마하니 여기까지 하나. 전국구로 그런 걸 떠벌려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김철 선배의 나직한 목소리가 묵직했다.
[···현석아.]‘압니다. 이도나 씨한테는 당장 답을 드려야겠습니다.’
잠깐 저쪽이 머리가 식을 때까지 미뤄둘 생각이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 상황을 커버해준 설이에게는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라겠지.
나는 살짝 켕기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예, 일단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 그럼.”
“사과 받아들이겠으니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MC들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할까, 기껏 소환된 대악마 바알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반응들이다.
윈포라도 줘야 하나.
“그···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심스런 질문에 나는 최대한 호의적인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요. 이렇게 오셔서 사과까지 하셨는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이제 와서 그깟 절을 받아서 뭐 한다고요?”
“······.”
그러자 MC들은 어째선지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더니 뭐든 시켜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이 괜찮다고 해도 보여주는 호의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으나 역시 켕기는 감정이 더 컸다.
“아니, 그래도.”
“아닙니다, 하하.”
“그래도 그것이.”
“하하, 뭘요.”
저쪽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이도나, 즉 우리 쪽이 나쁘다는 걸 안다.
그런 애매한 상황에서 이어지던 실랑이는 문득 내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이며 잠시 중단되었다.
모름지기 현자란 천시(天時)를 헤아려 인사(人事)를 조정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혹여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개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는 걸 보니 또 불안한데······.]나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눈앞의 면면들을 훑었다.
아주 뜨진 못했어도 각자 개그맨으로서 적잖은 위치를 쌓아올린 이들이다. 즉, 시청자들이 이 사람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스르륵 퍼즐이 맞춰졌다.
“저······?”
나는 빙그레 웃었다.
“생각해보니 지나친 사양은 도리어 비례라고 했지요. 정히 그러시다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 예. 말씀하시지요.”
어째선지 뻣뻣하게 굳은 MC들에게 내가 요청했다.
“혹시 『삼세번』에 까메오··· 아니, 조연으로 출연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MC들이 눈을 깜박이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김철 선배가 이마를 꾹꾹 눌렀다.
#
“아으으··· 진짜 죽겠네.”
같은 시각, 강주연은 일을 하다 말고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그야말로 온몸의 에너지가 몽땅 소진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옆에 있던 실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건넸다.
그리고 보면 이설이 또 변덕을 부려서 분위기가 살얼음판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좀 쉬지 그래? 내가 대신할 테니.”
“됐어요. 설이 일은 제가 다 해야죠.”
강주연의 단호한 거절에 실장은 혀를 쯧쯧 찼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강 매니저 일을 너무 무식하게 하는 거 아니야?”
“뭐라고요?”
“아니,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어차피 설이는 이런 오퍼들 죄다 내던질 거 아니야.”
“그건······.”
“어차피 버려질 거 그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잖아?”
강주연은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태연스레 대꾸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설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해 둬서 나쁠 건 없겠죠.”
“······.”
그러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무식하다는 건데 말이지.
실장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일로 시선을 돌렸다. 강주연 역시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원샷하고는 언제 엎어졌었냐는 듯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동안 업무에 집중하던 실장은 재차 강주연을 흘끗 살폈다. 꼴에 삼년차라고 슬슬 조금은 업계 사람다운 티가 났다.
실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과론이지만 그쪽 말대로 두고 보는 게 맞았는지도 모르겠군.’
사실, 본래라면 강주연은 예전 KBC 시상식 사태 때 당시 경질되었어야 했다.
본래FMC 엔터테인먼트는 대기업형 연예기획사에 반발한 이들이 모여 세운 회사이며, 때문에 자유롭고 소속 연예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모토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사태 당시의 반응은 어지간히 뜨거운 것이었다.
“본인이 캐스팅했다고 자기 인형처럼 다루는 꼬라지가 말이 됩니까?”
“차라리 제가 입후보하겠습니다!”
“이현석 피디 덕에 설이 띄워놓고서는 귀신같이 갈아타려고 들어요? 그 녀석한텐 상도덕이라는 게 없답니까?!”
그야말로 비난의 폭풍우.
그런 일방적인 질타의 기세를 꺾은 건, 의외로 장본인인 이현석이었다.
“저··· 강주연 매니저에 대한 처벌은.”
“알아서 하십시오. 저로서는 별 사감은 없습니다.”
“예?!”
“일단 본인은 배우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취한 행동이었을 테니까요.”
“······.”
“여러모로 헛다리를 짚고 있기는 하지만 강 매니저만큼 자기 배우를 위하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뭐, 안전기어만 좀 붙여둔다면 말입니다만.”
이현석으로서는 이설의 아버지 건을 처리한 이상 강주연이 더 삽질할 일은 없다고 보았기에 내릴 수 있었던 판단이었다.
이 일화가 입소문을 타고 다른 소속사에 있던 박진태 실장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는 걸 생각하면 현 위즈톤 엔터테인먼트의 설립과도 연관이 없지 않은 사건이기도 했다.
“대인배인 척 굴기는······!”
물론 강주연 본인의 적의는 눈곱만큼도 옅어지지 않았지만.
뭐, 그래도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강주연은 명백히 성장했다고 할 만 했다.
···아, 그리고 보면 조금 이상한 게 있었다.
“강 매니저.”
“또 뭔가요?”
“그리고 보면 요즘은 설이 아버지 얘기를 안 하네?”
강주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교도소에 있잖아요.”
“아니, 있더라도 원래 강 매니저라면 면회를 가게 하네 어쩌네 할 것 같아서.”
“······.”
매니저는 일하기 싫죠? 하고 실장을 째려보았다. 실장은 아니 뭐,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강주연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영 좋지 않은 기분으로 한 시간 넘게 차를 몰고 보니 지친 기분이 앞서기도 했다.
“뭐, 별 건 아니고요.”
“아니고?”
“제가 설이를 맨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딱 직감했거든요.”
“뭘?”
“얘는 삶에 별로 미련이 없는 애구나, 하고.”
“······.”
실장은 뜻하지 않은 방향성에 조금 당황했다.
“실장님이 물어보신 얘기거든요?”
강주연이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옛날에 아버··· KDS에서 자살한 연예인이 하나 있었어요. 전 그러니까··· 팬이었고.”
“···『셜록』?”
“잘 아시네요. 별로 이름도 없었는데.”
“······.”
“전 그 사람이 죽기 사흘 전에 사인회에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본 표정하고 설이 표정이 좀, 많이 비슷하더라고요.”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에 강주연이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아뇨, 뭐! 그렇게 심각한 얘기는 아니에요. 그 때 설이는 아직 어리기도 하고, 멀쩡하게 살아오진 않은 것 같으니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얼굴 팔리고 돈 들어오면 금세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어긋난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의 강주연은 매니저로서 조금 초조해졌다. 그 때 저지른 실책의 상당수는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었다.
글쎄, 아마 이설의 아버지가 지금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억지로라도 연을 이어보려 시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지금에 와선 그럴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겠지만요.”
그 말에 실장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이현석 피디지?”
“뭐, 눈치도 채시겠죠. 본인이 숨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니.”
강주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마세요. 아직 때가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실장이 문득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직? 너 안 막을 셈이야?!”
“제가 왜요? 낚아왔음 낚아왔지.”
“아니 왜냐니······.”
“전 제 첫 배우를 위해서라면 뭐든 준비해주겠다고 다짐했었거든요? 그건 그 북극곰 같은 양반이라도 예외는 아니에요.”
북극곰.
이현석과는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한 이미지다. 불곰이라면 모를까.
반사적으로 곰을 떠올리다 정신을 차린 실장이 허둥지둥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야. 상식적으로 설이 지금 한참 잘 나가는 중에 스캔들 터지면······!”
“전 설이 스캔들 한두 번에 날아갈 애로 키우지 않았어요.”
“···글쎄다, 아마 설이는 너한테 키워진 적 없다고 할 거 같은데.”
강주연의 표정은 담담했고 실장은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
이 녀석 성장한 거 맞나? 반대로 퇴화한 거 아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