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92)
강주연과 실장의 말씨름은 한동안 이어졌다.
아니,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도리어 점점 불이 붙었다. 둘이서 야근을 뛰고 있던 만큼 말릴 이도 없었다.
“아니, 강 매니저 원래 이현석 피디 무진장 싫어했잖아.”
“지금도 싫어요! 하지만 자기 사감하고 분리시킬 수 있는 게 일류잖아요.”
“일류는 얼어죽을······.”
실장은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말인즉슨 개소리를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암만 그래도 아이돌 비슷한 이미지로 팔아야 할 3년차 배우를 연애질 하라고 들이미는 매니저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애초에 유부녀도 멜로 찍는 세상 아니에요? 낡아 빠진 소리 하시기는.”
“그래서 설이 유부녀 만들겠다고?”
“미쳤어요?!”
뭐, 당연히도 입장은 평행선일 수밖에 없었다.
FMC가 여러 면에서 참 관대한 사풍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스캔들은 당연히 예외에 속하는 부류였다. 어느 회사든 망하는 건 싫으니까.
하지만 강주연이 바락바락 들이받으면 대적할 사람이 없던 건 늘 있던 일이었고, 실장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정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설이 데리고 독립해버릴 줄 아세요!”
“하, 계약기간이 얼마가 남았는데? 위약금 얼마 떨어질 줄 알고나 그래?”
“제가 다 내면 그만이죠!”
“네가?”
“못 할 것 같아요?”
“······.”
그 흉험한 기세에는 실장도 조금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강주연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그렇더라도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강주연은 늘 그렇듯 진심일 테고, 이설도 이 경우는 당연히 제 매니저의 편을 들 것이다.
더해 이설이 지금까지 번 수입은 이름값에 비하자면 많진 않아도 위약금 정도는 충분히 부담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스캔들 무섭다고 실시간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배우를 놓아버린다는 건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결국은 실장이 한 발 물러섰다.
“알았다, 알았어. 한동안 입 다물고 있을테니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얘기하자.”
“···네.”
가열찬 논쟁이 끝나고 어색한 침묵만이 남았다.
머리에 스팀이 빠진 강주연은 멋쩍은 태도로 사람이 살아야 배우 짓도 하는 거예요, 하고 꿍얼거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인지가 끼워진 작은 액자였다. 유려한 필체의 알파벳으로 사인이 되어 있다.
실장은 직감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조금 숙연해졌다.
“그게 그?”
“네.”
벌써 십여 년 전 자살했다는 『셜록』의 사인. 아무래도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하던 실장은 문득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앞이 왜 H야? 그럼 셜록이 아니라 헐록이잖아?”
“글쎄요, 이것 하나만 그렇게 했더라고요.”
“왜?”
“모르죠.”
강주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워낙 나사가 빠져있던 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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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실장에게 판정승을 거둔 강주연은 업무를 마치고 일어섰다. 별 의미는 없겠지만 들어온 제안들 중 괜찮은 걸 골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상사의 앞에서는 그렇게 큰소리를 땅땅 치긴 했지만 사실 그녀로서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참, 설이한테 온종일 말 한 번 제대로 못 붙인 주제에 뭐라는 건지.”
처음 데려올 때부터 만만찮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녀가 데려온 배우님은 생각보다 훨씬 문제가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가 대기업인 KDS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님이니만큼 강주연이 보아온 케이스는 적잖은 것이었고, 그녀는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뭐,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성격인 주제에 기분파, 돈이나 인지도에도 관심이 없고 연기 올인······.”
심지어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남자. 사심이 한가득이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의 프로필, 그런데 정작 연기력은 타고난 수준을 넘어 압도적이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있을까.
세상은 언제나 이럴 리가 없는 일뿐이다.
“···뭐, 그래도 데려온 내가 돕지 누가 돕겠어.”
예전, 강영철 대표는 딸에게 ‘매니지먼트의 본질은 대상자가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다소 겉멋이 든 표현이었고 당연히도 제정신이었던 본인은 연애사업까지 의미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하지만 강주연은 뭐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또 틀어박히지나 않았을지 모르겠네.”
영 불안한 심정으로 숙소에 도착했다. 의외로 거실 불은 켜져 있었다.
“아, 언니. 어서 오세요.”
그리고 이설은 휴대폰을 든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또다시 한바탕 씨름할 각오를 했던 강주연은 살짝 당황했다.
“어··· 안 잤어?”
“전화 받고 있었거든요.”
“전화? 누구한테?”
“감독님이요. 제게 직접 전화하신 건 처음이거든요.”
아, 그러셔.
강주연은 짜게 식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사람 하나 잡을 기세더만.
이설은 강주연의 그런 태도를 모르는 건지, 알고도 무시하는 건지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뭐라 그러셨는지 아세요? 저한테 고생했다고, 큰일 안 터지게 수습해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래.”
“이거 이도나 선배님께도 별 흥미 없다는 뜻 아닐까요?”
“글쎄다.”
맥이 탁 풀린 강주연은 적당히 대답하고는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뭐예요?”
“국밥 포장해왔어. 어차피 밥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와아.”
강주연은 가져온 서류다발은 가방 깊숙이 밀어놓고는 냄비를 들었다. 얼굴에 절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뭐, 배알이 꼴리긴 해도 어쩌겠나. 이렇게 태도가 뻔한데.
북극곰이 뭘 좋아하더라······.
#
촬영 전, 돌아다니며 준비사항을 점검하던 나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뭡니까?”
“아, 이설 씨 매니저가 가져온 선물입니다. 피디님께 전해드리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스태프의 대답에 나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글쎄, 그 강주연이 선물이라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더욱 요상한 건 품목이었다.
[어째서 콜라일까?]‘그러게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일단 세 박스나 되는 양이라 일단 스태프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카메라 동선 꼬이기 십상일 테니 배선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스태프들이 움직였다.
조금 한가해진 나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늘어선 진용들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인생캠프』의 MC들은 벌써 최대웅과 친목 다지기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최대웅 선배님!”
“선배는 뭔 선배여, 나랑 그짝들이랑 노는 물이 아예 다른데.”
“어··· 음.”
“대체 여긴 뭔 생각으로 기어들 왔어요?”
“아뇨, 그, 이현석 피디님이······.”
“나도 그 양반 이해하는 건 포기한지 오래긴 한데 댁들은 거기에 왜 콜을 했냐고. 정줄들 놨어요? 연기가 우스워보여?”
잘 들리진 않아도 보이는 걸 봐서는 정다운 대화가 오가고 있겠지.
훈훈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내 옆의 김철 선배는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생각대로 잘 될까?]“잘 되고말고요. 지금이야말로 반환점입니다.”
나는 자신했다.
“사실 저희 『삼세번』은 지난 10화간 진행된 스토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야 그렇지. 시어머니가 애 괴롭히다가 급사하고, 이젠 다른 사람들이 대신 괴롭히고 있는 게 다잖냐.]김철 선배가 혀를 찼다.
[도대체가 그걸로 이래저래 열 편을 끌었다는 거 자체가 믿기질 않아.]“후우.”
벌써 삼 년째를 맞이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순진한 시각에 나는 고개를 저을 도리밖에 없었다.
우선, 심심하면 일일 100부를 질질 끌어가며 찍는 막장드라마 업계에 있어 그런 건 대수로운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ㅡ
“선배님, 지난 10화간 진행된 스토리가 없는 건 저희의 경쟁작인 『영원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뭐?]눈을 끔벅이던 김철 선배가 기가 찬 표정이 되었다.
[아니, 우린 몰라도 걔네는 절대 아니지.]“맙소사, 그러니까 아직도 선배님께서 막장을 보는 눈이 없으시다는 겁니다.”
나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간 곽태영 감독의 『영원의 시대』는 일견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보인다.
시어머니가 레슬링 선수로 데뷔하고, 챔피언을 차지하고, 그 챔피언 벨트가 테러를 막을 수 있는 열쇠인줄 알았지만 사실 아니었던 탓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리그가 폐지되었다.
시어머니는 실의에 빠져 근손실이 와 바싹 마르나 며느리의 도움으로 재기한다.
그리고 지난주에 그 며느리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와 배신감에 몸을 떤다.
[···들을수록 더더욱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만.]“속으면 안 됩니다. 막장드라마 루틴으로 보자면 똑같이 극초반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경숙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출생의 비밀이 나오지 않은 전통적 막장은 휘슬조차 불지 않은 마라톤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삼세번』과 『영원의 시대』에는 아직 실종됐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등장하지도 않았고, 형편 좋게 식물인간이 되었거나 특정 기억만 상실한 인물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반부의 상징인, 아킬레스건이 될 만한 정보가 들었으나 아무도 복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 화마다 주인이 바뀌는 USB도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은 초반부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 음··· 그러냐.]김철 선배는 이 빈틈없는 논리에 납득한 듯 보였다.
“이제 중반에 들어가면 조연의 중요성이 크게 오르게 될 겁니다.”
[조연?]“그렇습니다. 모름지기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조연들에게는 미학이 있습니다.”
내가 설명했다.
“가령, 막장드라마에 경찰은 의당 도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패해서 뇌물을 받거나 아예 무능해야 하지요.”
[···그래.]“중요한 비밀이 알려질 뻔한 순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방해가 들어와야 하며, 코믹한 캐릭터는 본인들은 재미있는 척 굴어도 시청자들의 혈압을 올려놔야 합니다.”
“······.”
“즉, 있어도 짜증나도 없어도 짜증나는 것이야말로 막장드라마의 조역의 이상입니다.”
어째선지 잠시 침묵하던 선배가 물었다.
[그래서, 저 개그맨들을 그 자리에 넣겠다고?]“바로 그겁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어떤 전문가가 말하길 막장드라마를 막장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은 지나치게 몰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걸 깨는 것이야말로 묘수가 될 것이다.
스토리상 짜증나고 열불나는 조연들, 그들이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이라고 할 만한 개그맨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분위기가 깨지고, 거지같은 연기에 욕을 하다 보면 극이 얼마나 황당하게 굴러가는지 눈에 들어오겠지.]“바로 보셨습니다.”
극의 숨통을 쥐고 있는 이들이 그렇다면 제아무리 이설이 날고 기어도 커버가 가능할 리가 없다.
그야말로 완봉이 가능한 신의 한수.
“어떻습니까, 제 생각이?”
[···뭐, 항상 이론은 괜찮았지. 이론은.]“걱정 마십시오. 오늘 촬영은 제때 끝내고 이도나 씨를 찾아갈 테니.”
[음······.]내 말에 김철 선배는 어째선지 미적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아, 감독님.”
어느샌가 분장을 마친 이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째선지 생글생글 웃고 있다.
지금껏 거의 본 적이 없는, 기묘하리만큼 환한 미소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컨디션 좋아 보인다?”
내가 얼떨떨하게 받자 얼굴은 더욱 환해졌다.
“그럼요. 최고에요.”
“······.”
“절호조에요.”
“······그러냐.”
나는 부풀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달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변하는 것은 없다. 모름지기 배우가 전술이라면 감독은 전략 전반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인 셈이다.
세상에 전술이 전략을 이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겠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