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
002 –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일단 좀 정리를 해보자.]귀신 – 김철 선배가 말했다.
[일단 넌 방금 교통사고로 죽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죽기 일보직전이지. 여기까진 알겠지?]“옙.”
[그리고 죽기 직전에 주마등처럼 생각한 게······.]“꼭 궁극의 막장 드라마를 한 편 뽑아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뒈지기 직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냐!]김철 선배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꽤나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혈질이고 욕쟁이인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잘못한 것 없이 이러고 있자니 억울하긴 하지만 모름지기 거장일수록 성격이 괴팍한 것은 당연하지 않던가.
[지금은 내가 아니라 어떤 놈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거다.]김철 선배가 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래서. 왜 그··· 뭐시기냐, 씨부랄 놈의 걸 만들고 싶은 건데?]“음··· 좀 길어져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지. 오히려 긴게 나아.]“알겠습니다.”
내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 얘기를 하려면 우선 제가 어제 마누라랑 싸운 일부터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제 마누라는 평범한 주부로 드라마를 무척 좋아합니다. 요즘에야 재방송은 물론 VOD로 다 챙겨볼 수 있는데 꼭 본방사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괴상한 성격이지요. 예전에는 하루에 하는 드라마가 몇 개 안 되어서 괜찮았는데 요즘은 방영되는 드라마의 숫자가 부쩍 늘어나 제 채널 점유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중파만 해도 대단해서 7시에서 8시까지 MBS와 SBC, 8시부터 9시까지 KBC. 다시 30분을 MBS가 채가고, 이후부터는 기합이 팍 들어간 메인메뉴인 10시 드라마가······.”
[그만해라, 망할 놈아.]김철 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뭔 죄를 지어서··· 후우, 직접 읽는 게 낫겠군.]“······?”
[머리 대봐.]김철 선배의 손이 내 정수리에 얹혔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마치 비디오 플레이어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듯 눈앞의 장면이 스르륵 밀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을 밀려간 끝에 보이는 장면은 어제, 아내와 싸운 날이었다.
곧 되감기에서 재생 상태로 이행한 것처럼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몸은 멋대로 움직였고 입도 멋대로 말을 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가만히 광경을 감상해야 했다.
신선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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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가 요즘 드라마는 뭐 하나 볼 만한 게 없다니까.”
WS··· 웨이스트숏으로 눈앞에서 아내가 투덜거리고 있다.
“가끔 정신줄 놓고 보다보면 말야. 내가 무슨 드라마를 보고 있나 헷갈려.”
“저런, 치매가 오려나.”
“······.”
대놓고 눈을 흘기는 모양새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내는 크게 콧방귀를 한 번 뀌고 말을 이었다.
“왜, 드라마가 죄다 똑같잖아. 여주인공이 호구짓하고, 막 짜증나게 당하고, 막 복수한다고 말은 청산유순데 결국 또 당하기만 하잖아. 아, 진짜. 대체 왜 이렇게 짜증나게 만들지.”
“시청률이 나오니까.”
“그러니까 왜 이런 드라마가 시청률이 나오냔 말야.”
“대한민국에 잠재적인 마조히스트들이 많나 보지.”
나는 평소처럼 적당히 흘려들으며 대답했다.
“패턴도 똑같아. 뭐 어릴 때는 잘 살다가 부모가 죽거나 실종되고 나쁜 년이나 그 엄마가 재산 빼돌려. 실종된 부모는 또 꼭 나중에 다시 찾는데 뭔 죄다 기억상실이나 정신병 생겨서 나쁜 년이 찾으러 다니고 감금해두고 그런다니까.”
“글쎄.”
“어린애도 꼭 엮이면 짜증나는데 꼭 남의 애 키워주고 뺏기던가 지 애 뺏겨서 찾으러 다니던가야. 거기에 꼭 납치까지 껴서 아주 미치겠다니까.”
“흠.”
“그리고 또······.”
마구잡이로 불평을 늘어놓는 아내에게 나는 굳이 ‘그러면 안 보면 되잖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정작 그럭저럭 짜임새와 개연성이 있는 괜찮은 드라마를 방영할 때면 왠지 재미없다며 안 보는 신기한 모순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물론 내가 똑똑해서는 아니었다. 전부 해봤다가 괜히 성질을 긁는 바람에 한동안 식탁이 부실해진 경험을 겪어본 까닭이었다.
그리고, 뭐, 굳이 저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제작진들의 고충에 대해 변명해주지도 않았다.
30대가 넘어 맞선으로 만난 아내는 잠시나마 방송국에서 일했던 내 경력에 대해 알지 못했고, 나 역시 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한참동안 드라마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던 아내는 이번에는 화면에 나온 여배우를 두고 씹기 시작했다.
“이설 저 년이나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 어쩌면 연기를 해도 저렇게 재수가 없을까. 캐릭터도 다 똑같애. 청순가련한 척······.”
“······.”
“저번에 토크박스(아내는 90년대 서뭐시기쇼 이래로 모든 토크쇼를 토크박스라고 불렀다) 나와서는 순진한 척 무진장 하더만 눈꼴사나워서 원. 보나마나 발라당 까졌을 거.”
음-
‘나’는 최대한 듣지 않으려 노력하며 작게 침음성을 삼킨다.
난 결국 실패한다는 걸 알지만.
#
씬이 바뀐다.
다음날, 회사.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자 사람들은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가방을 든 배달원들을 따라 젊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밖에서 식사를 하려는 이들은 느긋하게 겉옷을 몸에 걸친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의 열창. 그 속에 한 녀석이 슬쩍 흐름에 역주해 내게 다가왔다.
“이 과장님. 중식 안하십니까?”
“먹어야지.”
“약속 없으시면 저랑 같이 나가시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얼굴은 순식간에 능글맞게 변했다. 녀석은 그대로 아래에 쭈그리고 앉더니만 이어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매형, 어제 또 싸우셨죠?”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사실상의 수긍에 녀석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제 누나와 매형이 싸웠다는데 눈앞에서 킬킬대고 있는 이 유일한 처남이라는 놈은 제 누이와 결혼하기 한참 전부터 나와 같은 팀 소속이었다.
워낙에 남매간 사이가 나빠 결혼식 당일까지도 결혼하는 상대가 제 상사인 줄 몰랐다는 꽤나 기막힌 사연의 소유자기도 했다.
“네 누나가 다 일러바쳤냐?”
“아아뇨. 하지만 평소엔 웬수랍시고 찾지도 않는 남동생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여섯 통씩이나 찍혔으면 뻔한 거 아닙니까?”
“···싸우긴 뭘. 그냥 하도 시끄럽게 떠들길래 좀 조용히 하고 자자고 한 마디 한 거지.”
“그 정도면 속 좁은 누님한테는 1주일치 씹을 거리는 되겠는뎁쇼.”
미우나 고우나 오랫동안 같이 지내며 쌓인 남매로서의 감인지 처남의 예상은 내 계산과 엇비슷하게 일치했다.
눈치를 보던 처남이 슬쩍 떠보기에 들어갔다.
“뭔 얘기를 그리 하셨는데요?”
“그냥. 뭐, 네 누나 드라마 좋아하니까 같이 보다가 이런저런 얘기 나온 거지.”
“아······.”
제 누이와 달리 내가 한때 방송국에 있었고 그 경력이 썩 좋지 못하게 끝났다는 것을 아는 처남은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런 반응을 노린 것이기도 했다.
나는 짐짓 혀를 차며 말했다.
“오늘은 기어들어가 봤자 냉수 한잔 안 나올 테니 걱정이다.”
“에이, 뭘 그러십니까 매형. 좋은 기회니까 저랑 밤새 달리시면 되죠. 제가 배웅까지 해드리고 누나가 지랄하면 싹 다 커버하겠습니다!”
“큰 소리는.”
반사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슬몃 마음이 움직였다. 나이를 먹어가며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게 되어가니 술을 제대로 마셔본지도 제법 오래였다.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정 식구들이 끼면 아내도 조금쯤은 온건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나는 처남의 어깨를 툭 쳤다.
“오냐, 오늘 밤은 달리자.”
“하하, 맡겨주십쇼.”
처남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런데 밤은 밤이고 일단 점심밥이 문제지. 어떻게 할래?”
내가 외투를 챙기자 쪼그려 앉아있던 처남도 얼른 일어서서 따라붙었다.
“저어기 파출소 있는 사거리에 순대국집 새로 개업했던데 거기 어떻습니까?”
“괜찮지.”
그렇게 걸어나가던 와중이었다.
어쩐지 입구 쪽 민원창구가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졌다. 처남이 작게 혀를 찼다.
“또 악성 민원인 하나 들어왔나 봅니다.”
“흠.”
“상담관들 다 자리 비워서 애들밖에 없을텐데··· 가서 도와줄까요?”
“놔둬. 맨날 남한테 떠맡기는 게 버릇이 되면 쓰나. 걔네도 경험을 해봐야지.”
“······.”
처남은 찝찝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재촉하자 마지못해 따라붙었다.
하지만 입구에 다다르자 나도 처남도 곧 생각했던 상황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처럼 고함을 치며 항의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웅성거리면서도 흔한 고함과 괴성을 찾아볼 수 없는 묘한 분위기.
약간 의아했지만 굳이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신경 끄고 나가려는 내 팔을 처남이 꽉 붙들었다.
돌아보았다.
“뭐, 왜.”
“매형. 저기··· 저, 저분 말입니다.”
“저분?”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는다.
나도 눈살을 찌푸린 채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제각기 떠들면서도 시선은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선들이 집중되어 모인 곳에는 여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주변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운데 가만히 고개를 숙인 모양새가 괴리되어 보였다. 좋게 보면 소담하고 수줍은 태도였고 나쁘게 보면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그리고 뭐, 아무래도 좋지만 꽤나 익숙한 얼굴이기도 했다.
깜짝 놀란 처남이 속삭였다.
“매형. 혹시 쟤 배우 이설 아닙니까?”
“···그런 것 같구만.”
고개를 끄덕이자 처남은 손으로 눈을 쓱쓱 비볐다.
“와 씨발, 진짜 존나 예쁘네. 여긴 뭐 하러 왔을까요?”
“공공기관에 뭐 하러 왔겠냐? 볼일 보러 왔겠지.”
나는 처남의 어깨를 툭 치며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녀석은 당연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헤 벌린 게 그야말로 완전히 넋이 나간 꼬라지였다.
결국 나는 혀를 쯧 차고 슬쩍 시선을 피해 몸을 옮겼다. 홀로 딱 문을 나서려는 차에 뒤에서 처남이 내 팔을 붙잡았다.
“뭘 팔까지 잡냐.”
“안 잡으면 도망치실 거잖아요.”
“······.”
돌아보니 처남이 아니었다.
처남은 한 다섯 걸음쯤 뒤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야말로 목덜미에 코 박을 만한 거리에 이설이 서 있었다.
“어머, 감독님. 여기서 뵙다니 별일이네요.”
그야말로 숨결이 느껴질 만한 위치에서 이설은 여느 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국어책을 읽었다. 참으로 국민배우다운 연기력이 아닐 수 없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민원인들의 놀란 눈빛과 민원실 애들의 경악에 찬 시선이었다. 특히나 처남의 입은 뭉크의 절규를 연상케 하듯 떡 벌어졌다. 심히 병신 같았다.
나는 잡힌 팔을 빼려고 움직였지만 이설은 다른 한 손을 불러 매달리듯이 달라붙으며 막아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퍽이나 별일이다, 꼬맹아.”
툭 내뱉자 이설은 작게 웃었다.
거기에 반해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