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07)
본격적으로 김경숙의 인터뷰가 나간 뒤, 크든 작든 그녀를 알고 있는 인물 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비교적 나이대가 있는 계층에서 더욱 심했다. 왜인고 하니 김경숙 작가의 전성기는 대개 그들의 젊은 시절과 맞물려 있었고, 때문에 다들 그녀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런 사람이 실적이야 있기로서니 새파란 애송이인 PD를 침이 마르도록 치켜세우다니.
“설마 그 김경숙이……
“대체 뭔 바람이 불었대? 콧대만은 서수현 뺨치던 사람이.”
이런 반응은 방송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전, 이현석이 막 김경숙을 끌어들이겠다고 발표했을 당시 적잖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개중 일부는 우려를 넘어 대놓고 비웃곤 했다.
“흐흐, 최악의 조합 아니야? 각자 자기 할 말만 할 것 같은데.”
“뭐, 결론은 두 가지겠지. 이현석 그 애송이가 얌전히 김 작가 성질에 맞춰주던지, 아니면 냅다 싸우고 파탄이 나던지.”
“에미상이니 골든글로브니 너무 띄워주니까 주제를 모르는 거라니까!”
이현석이 성공을 거뒀기로서니 유지아와 서예린 모두 신인, 혹은 그와 다를 바 없던 작가다. 그런 고만고만한 상대와 합을 맞추던 주제에 갑작스레 그 김경숙을 끌어들이겠다는 건 그들이 보기엔 무리수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뭐, 아무래도 불과 3년 만에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아올린 애송이에 대한 질투도 없지는 않았을 테고.
이쪽 역시 나이대와 지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심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아랫사람들은 짬과 서열 아래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간 이현석 피디 행보를 보면 또 모르지 않을까요? 김경숙 작가도 욕심을 내는 것 같고.”
“흐흐, 아서라. 네가 햇병아리라 김 작가 성질을모르는 모양인데 이현석 할애비가와도 안돼.”
“뭣도 모르면 좀 짜져 있어, 이 자식아. 이 바닥이 논리와 순리로 돌아가는 줄 알아?”
“하여간에 요즘 애들은 세상을 몰라서……”
간혹 조심스레 이의를 제기한 이들은 갖은 면박을 당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뭐, 상황이 뒤집히자 그 당시 위풍당당하던 이들은 모두 헛기침과 함께 손바닥을 뒤집었다
“나는 저럴 줄 알고 있었지.”
“뭐, 이현석이 걸물은 걸물인 모양이야.”
“……”
젊은 후배들이 가재눈을 뜨는 것과는 별개로 이는 그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뭐, 그렇게 사방에서 입방아를 찧고 있는 와중 가장 놀라고 있는 이는 따로 있었다.
때는 새벽 2시. 거실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본 조카는 또인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잠도 안 자고 돌려보는 거야?”
“한 번만 더 보려고.”
“그 말 벌써 다섯 번째인 거 알아?”
“……”
조카, 서예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 옆에 앉았다.
평소라면 곧장 조카에게 눈을 돌렸을 서수현 작가지만 지금이 TV에 시선이 못 박혀 있었다. 아마 오늘도 밤올 샐 요량이겠지.
최근『삼세번』의 방영 날짜가되면 늘 반복되는일이었다.
서예린 역시 타박도 하고 성질도 부려봤지만 별반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최근은 반쯤 포기한 상태 였다.
고모의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조카는 염려가 앞서지 않을수 없었다.
“좀 가서 자. 라이벌시되고 있는 건 나랑 지아인데 왜 고모가 난리야?”
“얘, 여기 저기서 서수현에 버금가느니 서수현 못지 않느니 하고 있는데 신경이 안쓰이겠니?”
“고모 예전에 그런 소리 나오면 코웃음치고 무시했잖아. 누굴 가져다 붙여, 하고.”
침묵이 돌아왔다. 서예린은 재차 한숨을 쉬었다.
고모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뭐니뭐니해도 그녀 역시 얼마 전에 유지아를 상대로 경험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아직이라고, 한참 멀었다고 얕잡아보던 상대가 순식간에 턱까지 치받아오르는 느낌. 아차 하면 그대로 위아래가 역전될 것 같은 어떤 강렬한 위기감.
고모 서수현에게서 엿보이는 건 그런 감정의 흔적이었다.
VOD가끝났다. 서수현은 여섯 번째로 되감기 버튼을 누르며 툭 내뱉었다.
“…김경숙 그 여자가 피디를 참 잘 만났어. 피디 덕에 장면이 사네.”
“고모 얼마 전까지 이 피디님도 무시했었잖아. 몇 년쯤 더 지나면 같이 작업해볼 만할지도모르겠 다고.”
“……”
다시금 침묵.
서수현이란 작가는 자기복제의 끝판왕이라고 야유를 받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사는 이야기’가 드라마의 본질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특이한 설정, 복잡한 배경,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무대 뒤편 등은 평가절하되게 마련이며, 벌칸 시리즈는 그야말로 그 대표라고 할 만한 작품군이었다.
하지만 『삼세번』에는 그런 게 없었다.
김경숙의 원래 스타일을 표방하던 스토리는 최근 갑작스러울 정도로 깊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온 모든 게 복선이 되어 출렁거리며 한치 앞을 예상치 못하게 만들고 있다.
‘또 이거구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서수현의 입장에서는 가히 컬쳐쇼크에 가까운 변화였다.
저번에 김경숙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쓴소리를 내뱉은 게 무색해질 정도의 서늘한 감각. 결국 세 시까지 한 번 더 본 서수현 작가가 물었다.
“…최근 너네 대표님 만난적 있어?”
“아니.”
“혹시 만나면은 시간되면 한 번 찾아오라고… 아니, 빌 때 알려주면 내가 찾아가겠다고 전해주려무나.”
“……”
평온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살짝 몸이 달은 어조라는 걸 조카는 기민하게 눈치챘다.
“고모는 언제가 괜찮은데?”
“나야할일 없는늙은이 아니니. 당장 내일이라도상관없지.”
“…그래.”
명절 때마다 반쯤 문전박대 당하면서도 계속 찾아오는 다른 피디들이 들으면 기겁을 하겠네, 하고 서예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내일은 안돼. 지아가 만나러 가거든.”
그 말에 서수현이 눈썹올 추켜올렸다.
“유지아 작가가? 무슨일로?”
“글쎄… 무슨 승부를 하겠다던데 잘은 모르겠어”
“…….”
“…왜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봐?’
#
다음날 서울, 목동.
아는 사람은 아는 오래 된 레스토랑 앞에서 두 여자가 가만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
“…….”
과연, 이렇게 나오셨나.
이설과 유지아는 동시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각자 나름의 결심을 마친 후 온 참이었고, 상대가 그 이현석인 이상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은 품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애초에 1대 1대면 자체가 성사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 둘은 썩 편한사이도 아니지 않던가.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마지못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온 이현석이 씩 웃었다.
“서로 간만에 보는거지?”
“오빠.”
평소라면 간만의 만남에 싱글벙글 웃었을 유지아지만 암만 그래도 이 사태에는 살짝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 최미나에게 부탁해서까지 열심히 준비하고 온 게 허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설이씨가 오신다는 말씀은 없었잖아요.”
이설의 표정 역시 비슷했다. 하지만 이 기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혹은 알고도 무시하는지 이현석은 어깨만 으쓱일 따름이었다.
“뭐, 따로따로 보자면 우선순위를 둬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도.”
“친목 다지는 셈 쳐줘라. 너희들은 내 입장에서 보면 비슷한 관계인데 그간 사이가 영 어색한 게 신경이 쓰였으니까.”
“……”
비슷한 관계. 딸혹은 조카 같은.
숨겨진 뉘앙스를 느낀 둘은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현석은 늘 그렇듯 느긋한 표정이었다.
“자, 들어가자. 여긴 옛날엔 경양식집이었는데 업종 변경을 한후로도 맛이 꽤 괜찮아.”
“…네.”
“아.”
발걸음을 옮기려던 이현석이 순간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고 눈썹을 좁혔다.
지아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훑어보는 모습에 움찔했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뭐니뭐니해도 오늘 차리고 온 물건에는 친구의 땀과 눈물이 서려있었던 것이다.
처음 상의했을 때 친구 최미나는 살짝 난색을 표했다.
-어른스럽게 보이는코디? 음… 아무래도 지아 너는한계가 있지 않을까.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풀이 죽지 마!
-어디보자… 일단 오버핏 말고 일자핏으로 가자. 패턴 복잡한 걸로 가면 유치해보이니까. 좋아, 이런 식으로 심플하게 횐 셔츠랑 밑단트인 슬랙스만 입어줘도… 좀 아니네, 이거.
-역시 답은 신발이지! 구두만 스틸레토 킬힐 딱 뽑아주면 누구라도… 아니, 그만두자. 미안.
뭘 해도 엄마 걸 주워 입은 것 같은 모양새에 최미나는 몇 시간동안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야 간신히 타협 가능한 조합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친구의 고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뭔 소리야. 옷보다 열 배는 중요한 게 머리랑 메이크업이거든?!
그렇게 지나기를 얼추 나흘.
오늘의 유지아는 라인을 살리는 목폴라에 진한 색상의 스커트, 그리고 검정색 앵클부츠를 신고 있었다.
큰맘 먹고 비싼 스카프와 가죽 가방도 하나 샀고, 머리에는 열심히 컬을 넣었으며 반쯤 민낯으로 다니던 얼굴도 브라운 톤의 섀딩과 블러셔를 포함해 여러모로 인상을 진하게 했다.
다모아놓고 보니 가히 변신이 따로 없었다. 요정 노릇을 한 최미나 역시 땀을훔치며 흡족함을 감 추지 못했다.
-이쫌되면 어디에서 어려 보인다는소린 안 들을 거야!
-…고마워.
-친구끼린 이런 거에 고마워하는 거 아냐.
그렇게 들인 노력을 평가받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현석은 어째선지 점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고,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못한 지아는 점점 조마조마해졌다.
뷰러를 너무 많이 씹었나? 톤도조금 밝게 하는 게 나았을까? 너무 어설프게 힘을준걸지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이 씨가 온다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자제했을 텐데……
한동안 가만히 안색을 살피는 모습. 그에 따라 지아의 초조함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끝내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눈올 질끈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이현석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올 열었다.
“지아야.”
“네, 넷!”
지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마주쳤다. 뭐가 문제인진 몰라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장렬하게 전사하자는 생각이었다.
이현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낯빛이 좀 어두운 것 같은데 어디 안 좋은 거냐?”
“……몰라요.”
유지아는 처음으로 눈앞의 오빠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지아야.”
“…왜 그러세요?”
“진짜어디 안좋은거 아니지?”
뭐지.
내가 대체 뭘 했다는 거지.
지아에게서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짜증스런 표정에 나는 조금 풀이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이설 역시 알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달가운 듯한, 하지만 그보다 안쓰러움이 더한 것 같은 묘한 표정이다.
내 옆에 있는 유령도 비슷한 종류의 표정을 짓고 있길래 슬쩍 물어보았다.
‘왜 이런 분위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선배님?,
[…현석아.]‘예.’
[네 마누라랑 소원해진 거 말이다. 어쩌면 네 탓도 좀 있는 게…….]‘???’
[아니, 아니다.]김철 선배는 말이 헛나왔다는 듯 얼른 입을 닫았다.
식사는 그런 영 불편하고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