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1)
021 – 소일거리(2)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유미가 헉헉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후우.”
이설 역시 드물게도 약간 지친 표정이다.
하기사 촬영장 안의 스태프들도 누구 하나 피로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표정들은 밝았다.
“기가 막힌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거야 나갈 때 반응이 기대되는구만.”
조영철 촬영감독이 껄껄 웃었다.
촬영장의 들뜬 분위기와는 반대로 김철 선배는 조금 저어한 표정이다.
[이거 씬이 좀, 너무 끝내주게 뽑혔는데?]‘그러게요. 설이가 포텐이 제대로 터졌습니다.’
[···괜찮겠냐?]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막장드라마라고 좋은 씬 하나쯤 없으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하긴 그렇지.]김철 선배도 수긍했다.
제아무리 연기가 훌륭하다고 해도 각본의 막장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냥 막장이냐 명품 막장이냐 하는 수준으로 갈릴 뿐이지.
‘도리어 시청률이 기대되는군요. 이 정도 임팩트면 이거 나갈 때쯤에는 SBC는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꿈도 크시구만.]툴툴거리는 선배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설 쪽을 응시했다.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며 나름 친해졌는지 한유미와 담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종종 작게 웃기도 했다.
예전과 비교하면 참 흐뭇한 광경이었다.
김철 선배가 혀를 찼다.
[또 딸내미 보는 표정이구만. 유지아에 이은 둘째냐?]‘나이로 따지면 설이가 맏이겠죠.’
[아무튼.]‘뭐, 따지고 보면 제가 지금 여기서 흐뭇해할 수 있는 건 10년 뒤의 저 녀석이 절 찾아와준 덕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좀 유해질 밖에요.’
당시 이설이 내게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시금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럼 지금의 회귀도 없었겠지.
[······.]선배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쟤가 널 안 찾아왔으면 사고도 안 나지 않았겠냐?]‘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뭐,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나는 편하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갚을 이유가 생기니까.
오늘 이설의 연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더 간을 볼 틈은 없을 것 같다.
‘선배님.’
[왜.]‘소일거리나 하나 하려고 하는데 혹시 경찰 쪽에 아시는 분 안 계십니까?’
#
일요일 저녁 9시.
그룹 『에어리즈』의 세 동생들은 오늘도 옹기종기 모여앉아 『연극처럼 살다』의 본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드물게도 이영신 매니저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동안은 찾아볼 수 없었던 금지물품 – 노트북도 한 대 있었다.
“알았지? 평소대로 팬카페만 보는 거야. 다른 거 보면 혼날 줄 알아.”
“알았대도 그래!”
아라가 잽싸게 마우스를 가로챘다.
반쯤 정전 상태던 에어리즈의 팬카페는 『연극처럼 살다』 방영 후 사람이 제법 늘어 활발해져 있었다.
매니저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앞에서 세 소녀가 노트북에 시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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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나잇!
▶어제자 『연극처럼』 지금 봤습니다. 평상운전이네요.
▶KBC는 와르다를 살려내라!
▶근데 이광진이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꼭 필요한가요?
뭐 하나 나오는 거 없이 전혀 쓸모없는 맥거핀인 거 같은데.
→ 외계인 정도가 아니면 고작 반년으로 천문, 지리에 통달하신 갓-유미님의 상대로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 외계인 설정이라도 없으면 이설님께서 자기 친구한테 걸맞지 않는다고 진작에 팽하셨을듯
→ 그냥 머리를 텅 비우고 연출 따라가세요. 뇌를 중탕하는 기분으로. 그래야 재밌습니다.
▶한지원 캐릭터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요?
무슨 여주한테 하나 남은 옛날 친구가 능력도 있고 지위도 있고, 돈도 있고. 심지어 예쁘기까지 하죠? 거기다 퍼주는 이유는 또 그게 뭔가요? 자기가 있는 데까지 올라오길 기다린다니. 무슨 쌍팔년도 스포츠 만화도 아니고;
→ 대부분은 버그입니다.
→ 이 연속극을 보면서 아직도 개연성으로 태클을 거는 가엾고 딱한 사람이 존재한다니······.
→ 한지원은 대신 머리가 맛이 갔으니 그러려니 보면 됩니다.
→ 예멘 드랍(소곤)
→ 예쁘면 용서됨
→ 제발 한국인이면 에어리즈 유미 응원합시다!
▶작가 누군지 아직도 밝혀진 거 없나요?
이 정도의 막장 내공이 무명일 리가 없는데 진짜 신기할 정도로 정보가 없네요.
→ 누군가 필명 숨기고 쓰고 있다에 한표.
→ 최소 50대 예상합니다.
→ 제 삼촌이 KBC 근무해서 아는데 여고생이라던데요.
╙ 재미없어요.
╙ ㅉㅉ
╙ 한심······.
▶『연극처럼』 이현석 PD님 짤 가져왔어요~
(사진)
양복에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시네요~
→ ···마피아?
→ 마피아라기보단 따거?
→ 중절모 쓰고 시가 하나 물면 그림 나오겠는데요.
→ 와, 이건 영화 쪽 김철 저리가라 할 정도의 인상파신데;
→ 그리고보면 김철 감독은 아직도 잠적 상태죠? 살아는 있는지 원······.
▶스밍인증합니다.
▶본방 30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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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우리 그룹 팬카페가 아니라 『연극처럼 살다』 팬카페같은데.”
한동안 훑어보던 아라가 투덜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유미를 제외하면 다른 세 멤버보다 이설에 대한 언급량이 더 많을 정도다.
주리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태도인 반면 아라와 은솔은 다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인원수가 적었는데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배가 넘으니 당연하지.”
이영신 매니저가 애써 냉엄하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거의가 드라마 보고 들어온 거야. 그걸 붙잡아둘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너희 하기에 달린 거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더 열심히 해야······.”
“알았어, 알았다고.”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자 아라가 넌더리를 내며 말을 끊었다.
이영신 매니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라도, 다른 멤버들도 이미 넌더리를 낼 자격이 있을 정도로 노력을 해왔다는 건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세상엔 노력만으론 안 되는 일도 있었을 뿐이다.
데뷔 4년차 무명 아이돌 그룹 에어리즈.
그러니 간신히 가져온 이번 천운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이 이현석 감독님이구나.”
아라가 페이지를 뒤로 돌려 이현석의 사진을 띄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일단 은인은 은인이니만큼 주리와 은솔이 사진 속에서 애써 장점을 찾았다.
“그··· 굉장히 급이 높은 빌런 같으시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게 차도남같아서 간지가 확······.”
그리고 전혀 장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동시에 입을 닫았다.
침묵이 흐르는 와중 아라가 툭 내뱉었다.
“뭐, 유미 언니 말대로 나름 잘 생기긴 했네. 조금 재수는 없지만.”
시선이 집중되었다.
“······?”
“······???”
“···왜들 그런 눈으로 봐?”
#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려나?」
「······.」
화면 안의 한지원이 빙긋 웃으며 평가했다.
정하늘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시선을 푼다.
「다행이네. 예멘 다음엔 시리아나 소말리아 같은 곳도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에이,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진 안 하지. 친구를 너무 못 믿는 거 아니니?」
가만히 노려보는 시선을 피하며 한지원이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인다.
「뭐, 그래도, 좋은 만남도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주로 남자 관련으로.」
「···무슨 소리야?」
「그냥 해본 말이야.」
한지원이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준비도 됐고, 시작할까?」
「뭘?」
「복수지 뭐야.」
동네 마실이나 나가자고 하는 듯한 여상한 말투.
정하늘이 눈을 깜박였다.
「네 시어머니, 시동생 하나, 시누이 둘. 전부 조사가 끝났어.」
한지원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현재 그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어떤 걸 빼앗겼을 때 가장 절규하게 될지.」
「······.」
「왜 그래?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하니?」
「···아니.」
정하늘의 흔들리던 표정이 이내 차게 굳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그리고 스토리는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예전 유지아의 숙모 최숙기의 이름으로 실증되었던, 미친 듯이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의 시작이었다.
“아.”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세 소녀는 스탭롤이 나올 때 즈음에야 이미 한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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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촬영이 끝날 무렵이 되자 내가 손뼉을 쳤다.
“자, 요새 시청률 추이도 좋고 하니 삼겹살이나 한 번 구웁시다. 참가하기 어려우신 분 계십니까?”
내가 말하는 회식은 말 그대로 밥 신나게 먹고 헤어지자는 뜻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찍 들어가봐야 한다는 사람들은 눈치 보지 않고 얘기했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격려해 돌려보냈다.
“아, 이설 씨랑 유미 씨는 강제참갑니다. 고생하신 주역이니까.”
“예?”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일이 있으십니까?”
“그, 그런 건 아닌데요······.”
한유미가 우물거렸다.
딱히 일이 있다기보다는 평상시 회식 참가에 관대하던 내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게 얼떨떨한 기색이다.
“이설 씨도 괜찮으시죠?”
“네.”
다행히도 이설 역시 평소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회식 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한유미와 이설의 먹방 대결이 벌어졌다.
한유미가 적당히 먹고 눈을 질끈 감고 내려놓으려고 하면 맞은편에서 이설이 복스럽게 우걱우걱 먹는다. 그리고 거기에 흔들린 한유미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드는 악순환이다.
“유미야, 너 얼마나 지금 얼마나 먹었는줄 알아? 대체 어쩌려고 그래?”
타박을 하는 에어리즈의 이영신 매니저와 달리 이설의 옆에 자리한 강주연 매니저는 다 내려놓고 포기한 표정이다.
그렇게 자리가 무르익을 와중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보고는 슬쩍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전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판 까신 양반이 먼저 자리를 뜬다는 게 말이 되나?”
“우우!”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야유를 “나중에 벌충하겠다”고 고개를 숙여가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이냐?]“네.”
택시를 타고 한참을 가 도착한 곳은 가파른 언덕길 중턱이었다.
나중에는 재개발로 싹 밀고 나름 괜찮은 상권이 형성됐지만 아직은 초라한 달동네 수준.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 올라간 끝에, 나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거 누구요?”
머잖아 초로의 남자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살짝 취한 듯 얼굴이 벌겋다.
그는 양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제기랄! 그깟 돈 삼천 금방 갚는다고 해도 그래! 이제 돈 나올 구멍이 있다니까!”
“하하, 뭔가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얼른 문을 닫으려는 남자를 붙잡고 명함을 건넸다. 씨근덕대며 받아든 남자의 표정이 의아해진다.
“KBC PD 이현석······?”
“예.”
“그런 분이 여기는 왜?”
내가 웃었다.
나는 항상 이 남자와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이설 씨 아버님 되시죠? 인사 한번 드리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