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2)
022 – 소일거리(3)
남자는 으잉? 하는 표정으로 명함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보니 우리 설이 담당이셨구만! 아니, 어떻게 알고··· 어서 들어오쇼!”
[···담당?]김철 선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남자는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래, 내 거기에 들어간다고 할 때는 걱정이 참 많았는데, 어디, 연습은 잘 합니까? 말썽은 안 부리고요?”
“예,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하하, 모두 그··· 뭐시기냐, 피디님께서 잘 돌봐주신 덕분이죠. 앞으로도 잘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가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고 김철 선배는 눈살을 찌푸린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이 양반은?]‘이 남자는 소속사 매니저와 방송국 PD의 차이조차 제대로 모르는 겁니다, 선배님.’
[뭐? 세상에 그런 머저리가 어딨어?]있다는 게 놀라운 점이란 말이지.
아마 배우가 직접 소속되는 극단 비슷한 시스템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단순히 무지함을 떠나 제 딸이 하는 일인데도.
방 안에 들어서니 치우지 않은 소주병들이 마구잡이로 뒹굴고 있었다. 곳곳에는 먹다 남은 음식물과 쓰레기들이 널부러져 파리가 들끓는다.
[여긴······.]‘설이가 자란 곳입니다.’
[······.]김철 선배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가 쓱쓱 손을 비비며 멋쩍게 웃었다.
“이거, 집이 영 지저분해서··· 일단, 앉으십쇼!”
어디선가 낡은 방석과 함께 소주와 골뱅이 캔을 하나 꺼내온다. 제가 먹다 남은 과자도 함께다.
“음··· 술은 좀.”
“에이, 젊은 양반이 뭘 모르시는구만. 뭐든 이렇게 알코올이 딱 들어가야 얘기가 되는 법이지! 자자, 쭉 들이키십쇼.”
“그럼 제 쪽에서 먼저 한 잔 드리겠습니다. 연세가 있으시니.”
“캬, 주도를 아시는구만!”
나는 적당히 술을 들이키며 남자에게도 연신 술을 권했다.
안 그래도 얼근히 취한 기색이었던 남자는 술이 몇 순 돌자 더욱 말이 많아졌다.
“세상에, 놀랐지 뭡니까. 몇 년을 제 아비 얼굴 한 번 안 보러온 딸내미가 딱, 테레비를 트니까 나오는 겁니다! 어이가 없어서 원.”
“어이쿠, 그것 참 당황스러우셨겠습니다.”
“암요, 참 너무한 딸내미 아닙니까? 암만 이렇게 살아도 키워주고 입혀준 사람이 누군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 그래도 어이가 없어 찾아가려던 참에 딱 피디님이 와주신 겁니다. 참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나는 계속 맞장구를 쳐주며 웃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설이 전보다 이름이 알려지는 게 이르다 싶어 빠르게 움직인 게 주효했다.
남자와 내가 쓸데없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김철 선배가 가만히 물었다.
내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설이는 다른 아이돌이나 배우들처럼 스타에 대한 꿈을 꾸며 이쪽에 발을 들인 게 아닙니다, 선배님.’
타고난 재능을 보면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이다.
어릴 적 이설의 모친은 집을 나가버렸다. 눈앞의 부친은 술을 마시고 상습적으로 폭행을 자행했다.
어린 시절의 이설은 그런, 꽤 흔한 막장 드라마스런 환경에서 자랐다.
유지아랑은 꽤 좋은 경쟁이 되겠지.
‘나중에 강주연 실장에게 듣기로는 FNC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을 때 대뜸 이렇게 물었다더군요. 숙식 제공 되냐고. 얼떨결에 된다고 하니 덜컥 수락했다고 합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따라가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인지를 모를 녀석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몰려있었다는 뜻이겠지.
지금도 이설의 몸 곳곳에는 아직도 맞고 찢어져서 생긴 크고 작은 흉터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중에 성공한 후에도 그걸 다 없애지는 못했다.
나는 그 흉터를 만든 장본인과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남자가 비로소 슬그머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크흠, 그리고 보니 설이가, 그··· 지금 돈 좀 만지고 있겠지요?”
“글쎄요,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에헤이, 아주 10시 테레비에 얼굴 딱 박아넣고 다니더구만 무슨 말씀을······.”
“출연료라는 게 그렇게 바로바로 지급되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데뷔하는 데 드는 돈도 어지간하니 그걸 다 제하고 나서야 정산이 될 겁니다. 아직 까마득하죠.”
남자는 조금 심통이 난 기색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바뀌었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히죽 웃는다.
“피디님.”
“뭡니까.”
“우리 설이, 예쁘지 않습니까?”
“······.”
흠.
또 무슨 신선한 개소리를 하려는 걸까.
나는 웃는 낯으로 잔을 비웠다. 뭐든 너그럽게 웃어넘겨줄 요량이었다.
이 인간과 이렇게 마주앉을 수 있는 것도 나름 회귀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최대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저도 알 건 다 압니다. 연예계 일이 뭐 쉽겠습니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남자는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손을 모아 입에 대고서는 짐짓 속삭이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설이 스폰은 누굽니까? 돈 많은 재벌? 아니면 어디 의원님?”
“······.”
웃고 있던 내 표정에 저도 모르게 금이 갔다.
“걍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십쇼. 저는 그런 거에 관대한 사람입니다. 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적당히 챙겨주시면 나중에 소송하거나 그런 치사한 짓 안 합니다.”
“그냥, 뭐. 설이 정도 외모면 아무래도 좀 높으신 양반들도 관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 대신 김철 선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남자는 비죽 웃었다.
“어차피 버린 몸이잖습니까? 작정하고 여기저기 연을 맺어서 자금을 확 땡겨서리······!”
[세상에 자기 딸을 데리고 포주 노릇을 하려고 해? 이런 인간말종 새끼! 야, 현석아! 이런 말을 듣고만 있냐?!]그러게.
생각해보니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컥!”
남자가 날았다.
별로 시원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냥 군 시절 당연하게 내려온 할당량을 당연하게 해치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할당량은 영 줄어들 것 같지가 않았다.
[잘 한다!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라! 팔다리를 아작을 내!]우르르.
김철 선배의 응원과 함께 뒤쪽에서 뭔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정하십시오!”
“야, 막아! 멈추시게 해!”
자꾸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잘 안 됐다. 나는 그제야 누군가가 나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가 서서히 식었다.
땅을 구르던 남자가 고함을 쳤다.
“이 자식···! 대체 뭐하는 놈이야!”
“방송국 피딥니다.”
“내가 널 가만 둘 거 같아? 고소할 거야! 폭행죄로 고소할 거라고!”
“고소라··· 하시든 말든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일단 주변을 좀 보시는 게 어떨까요?”
만취한 남자는 실컷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앉아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뭐. 자연히도 얼이 빠지고 말았다.
경찰 하나도 곰보다 무서울 판에 일곱 명이나 있는 거다. 당연한 일이겠지.
그중 형사 한 명이 나섰다. 강태호라는 이름의 강력계 형사다.
그는 우선 내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큰 건수를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형사님. 이쪽이야말로 먼저 만나보겠다는 억지스런 요구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너털웃음을 짓고는 시선을 돌린 형사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이원장 씨.”
“뭐, 뭐야?”
“당신을 상습특수절도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인사불성인 남자에게 수갑이 채워졌다.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는 사이 벙쪄있던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으르렁거렸다.
“뭐야, 이 새끼들아! 엄한 사람 잡지 마! 증거 있어? 있냐고!”
“암요. 여기 이분 덕에 이미 전부 확보된 상탭니다. 자세한 건 서에 가셔서 얘기하시면 되겠습니다.”
“뭐······?”
남자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
난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형사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반칙처럼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 회귀자 특권을 여기에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쓰겠는가?
나는 몇 년 뒤에야 밝혀질 녀석의 범행수법과 증거를 샅샅이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죄질이 나빠 빼도 박도 못하게 10년 나올 거다.
학대죄를 추가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뭐.
경찰들이 내게 인사를 건네고 얼이 빠진 남자를 끌고 나갔다.
“제가 술 한번 사겠습니다.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윗선에는, 뭐. 저 작자가 좀 심하게 저항했다고 해두겠습니다.”
강태호 형사도 눈을 찡긋하고는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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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근히 올라온 취기로 골목길을 걸었다.
[···그나저나 굳이 네가 이렇게 몰래 움직일 필요가 있었냐? 그냥 소속사 쪽에 말을 하면 충분할 것을.]선배가 불퉁하게 말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선배님, 혹시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기억하십니까?’
김철 선배가 눈을 끔벅였다.
[SBC에서 하던 예능 프로그램 말이냐?]‘정확히는 한 1년 뒤에 할 프로그램입니다만··· 네.’
[이혼이나 뭐 그런 걸로 자식 오랫동안 못 본 부모가 찾고 사과하는 그거? 그게 지금이랑 뭔 상관··· 으음.]선배는 눈치챈 듯 말을 줄였다.
‘뭐, 익히 짐작하셨겠듯이 미래에 강주연 실장··· 현 강주연 매니저는 설이와 저 인간쓰레기의 ‘화해’를 주선했습니다.’
내가 웃었다.
과연 머릿속에 꽃밭도 모자라 정원쯤은 가꾸는 인간이나 생각할 법한 짓거리다.
강주연은 악인은 아니지만 그래서 훨씬 더 질이 나쁜 종류의 인간이었다.
‘포장은 꽤 잘 되어서 계산대로 설이는 인지도를 많이 높였습니다. 뭐, 그리고 동시에 저치에게 목줄도 잡혔고요.’
저 쓰레기가 이설이 번 돈을 얼마나 흥청망청 써댔는지,
그걸 할 수 없게 되자 제 딸내미에게 무슨 끔찍한 협박질을 하고 얼마나 더러운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4년간 기생충처럼 붙어있던 그는 막판에 경찰에 연행되면서 다시 한 번 딸에게 나쁜 소문을 덧붙여주었다.
그걸 죄다 견디고 날아오른 걸 보면 이설도 참 어지간한 녀석이지만.
[···그래서 오늘 콕 집어서 빼놓은 게군. 이설하고 강주연이 둘 다.]‘언제 접촉할지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뭐, 설이 본인은 모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 녀석이 봉사활동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저번에도 말씀드렸듯 죽은 제가 회귀할 수 있었던 건 따지고 보면 그 녀석 덕이니까요. 은혜 갚는 셈 치죠.’
[흥. 나한테는 웬수란 소리다만··· 네 녀석도 참 번거로운 성격이다.]선배는 툴툴거리긴 했지만 이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제 어깨를 두드릴 정도의 힘이 있으시면 같이 그 자식 눈이나 찔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씨부랄, 좋은 분위기로 끝내려는데 꼭 그렇게 토를 달아야겠냐?]#
「대체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너 따위 천박한 게······!」
「표정관리 하셔야죠, 아가씨.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계시면 사람들이 누가 천하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감히, 감히······!」
화면 속에서 뒷목을 잡고 쓰러진 시어머니를 부축하며 시누이가 이를 악문다. 반면 올케는 여유롭고 냉막한 표정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정하늘이 느릿하게 다가가 귀에 속삭인다.
「벌써부터 이를 악물면 곤란해요. 당신들은 철저하게 파멸해줘야 하니까. 죽은 승호 씨의 몫만큼.」
“······.”
화면 속에 보이는 장면만큼이나 호화로운 거실.
큼지막한 98인치 텔레비전으로 VOD를 돌려보고 있던 묘령의 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부들부들 떠는 화면 속 여자의 모습만큼이나 그녀의 눈썹도 꿈틀거리고 있다.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의 화면에는 신문기사들이 빗금치듯 떠올라 있었다.
– 통쾌한 막장극의 힘? KBC 『연극처럼 살다』 10화 시청률 13% 돌파 이변!
– KBC 『연극처럼 살다』 13.1%, SBC 『내 딸의 아들내미』 13.4%와 간발의 차··· MBS 『이슥한 달』은 18%대 유지.
– ‘이도나 매직’도 끝물? 시청률 하락 끝에 규정속도 내버린 폭주기관차에 덜미를 잡히다!
한동안 기사를 보던 여자는 ‘끝물’이란 단어를 보고는 끝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팽개쳤다.
몇 바퀴 구른 휴대폰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매니저가 조심스레 말했다.
“···도나야, 그거 바꾼지 3일 된 거다.”
“새 거 사면 되잖아! 지금 내가 이깟 백만원짜리 물건에 일희일비하게 생겼어?!”
“······.”
그깟 물건을 세 개 사면 월급이 마이너스가 되는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도나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대체 뭐야! 그냥 흔한 막장드라마잖아! 어떻게 저딴 게 날 물 먹일 수가 있냐고!”
“그냥 흔한 막장이라기엔 좀 여러모로··· 대단하지.”
“뭐야?”
“아니. 그냥 그렇다고.”
이도나의 성난 시선에 매니저는 얼른 꼬리를 내렸다.
“거 틀린 소리 아니구만 뭘 그래. 대단하니까 떴지.”
이도나가 씩씩대고 있는 와중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이도나가 불타는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실장님, 지금 불난 데 부채질하러 오셨어요?!”
탑급 여배우의 성화에도 박진태 실장은 느긋한 표정이다.
“까놓고 막장, 막장 한다만 저쯤 되면 인정해줘야지.”
“뭐예요?”
“개연성이고 뭐고 죄다 내던지고 고속도로 미친듯이 내달리는 맛. 캬, 템포가 무슨 알레그로 비바체 프레스토급이여. 나도 별 생각 없이 틀었다가 그만 정주행했잖냐.”
“실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