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21)
조금 지난 예전의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MBS 드라마국의 10년차 PD이자 이현석과 몇 차례 악연을 맺어온 장본인, 장연철 PD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아무도 없는 사석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심히 굴욕적인 태도였다.
“제가잠시 미쳤던 것 같습니다!”
“……”
“다시는하지 않겠으니 부디 고소 건만은 취하해 주시면……!”
평상시 그의 자존심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상황은 그 정도로 심각했다. 이제 와서는 방송국에서 목이 날아가냐 마냐의 차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요……”
절을 받는 입장인 서수현 작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눈에 담긴 경멸감만큼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그럼 인정하는 거군요? 나팔수들 동원해서 우리 예린이 찍어내려고든 거.”
“…예.”
“어째 대답이 마지못한느낌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장연철은 이를 갈며 재차 머리를 찧었다.
일찍이 장연철은 『연구일지 속 보석함』이 방영되던 시절, 친한 기자 등을 동원해 드라마를 비난하고, 작가인 서예린을 갖은 수단으로 깎아내린 적이 있었다.
다행히 『연구일지』는 그 과정을 넘겨 호평을 받긴 했지만 제 조카를 끔찍이도 아끼는 서수현 작가가 그걸 놔둘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일단 위험이 닥치자 철저히 뒤를 봐줄 것처럼 굴던 MBS 원광훈 사장은 도마뱀 꼬리 자르듯 그를 내던졌다.
결국 의지할곳 하나 없어진 장연철은 손이 닳도록 빌어서라도 해결해볼 생각으로 직접 찾아온 것 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장연철은 문득 서글퍼졌다.
어찌어찌 고소를 취하하게 만든다고 쳐도 언론에는 신나게 기사가 뿌려질 것이다. 당연히 PD로서의 인생도끝이겠지.
아니, 그건 고사하고 방송계 자체에서 일자리를구할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기회가 커도 패할 만한곳엔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장연철의 인생철학이었고 그는 지금껏 이걸 철저히 지켜왔다.
하지만 이현석이 등장한 뒤로 모든 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예전의 그라면 티가 날 정도로 기사를 조작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 서수현 작가의 조카를 건드린다는 무리수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테고.
초심을 잃은 이상 몰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고개를 푹 숙인 장연철을 보는 서수현 작가의 눈이 냉담했다. 고개를 돌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카에게 묻는다.
“예린이 네 생각은 어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만.”
“어떻게 생각하냐고해도……”
서예린이 불편한 태도로 귓불을 만지작거 렸다. 이제 와서는 딱히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어조다.
“당시에 내가 지아랑 스스로를 비교하며 방황하던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물론 기분이 좋지야 않았지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건 국제적인 흐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사람을 단죄할 권한을 가진 건 자신이 아닐 터였다.
“이 경우는 나보다도 이현석 피디님 의견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피해는 온전히 그 사람이 본 거니까.”
“맞는 말이구나.”
서수현 작가가 수긍했다.
살짝 기대를 품었던 장연철은 이내 더 큰 절망에 빠졌다. 그 한 건뿐으로 엮인 서예린이면 차라리 낫지, 그 이현석이 자신을 용서할 리 없지 않은가.
이미 장연철이 『연극처럼 살다』부터 어떤 일을 벌였는지는 다른 이도 아닌 원광훈 사장을 통해 잘 알려져있었다.
이현석에 대한 장연철의 훼방은 줄기차고 끈질기게 몇 년을 이어졌다. 그야말로 어지간한 성인군자라도 격노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여기서 끝인가.
전화를 건 서수현 작가가 사정을 설명하는 사이 장연철은 다 내려놓고 맥없이 눈을 감았다.
그저 허망한 기분이었다.
‘결국 감옥살이나하게 될 걸 뭘 그리 아둥바둥 살았는지 원.’
극중에서 악역들이 늘 그렇듯 너무도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바로 그 때, 드라마가 우스워 보일 정도의 기적이 일어났다.
-뭐,전 솔직히 아무래도 좋습니다. 두 분 뜻대로 하시죠.
어지간한 서수현 작가조차 잠시 말문이 막혔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고모와 조카는 멍 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장연철의 경악은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뭐……?’
제 귀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의심하는 태도로 전화기를 쳐다본다. 사실 그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서수현 작가도 황당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진심인가, 조카님?”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제가 딱히 피해를 본 건 없으니까 말입니다.
뭐, 이현석의 시점에서의 장연철은 도리어 모두가 방해만 일삼는 사이 막장도를 계속해서 올려준 귀중한 지원군이 었다.
방식에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현석으로서는 딱히 유감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건, 아무래도 이 작자를 용서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뭐, 그렇습니다.
“…이유는?”
-이유라……
하지만 당연히도 주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돌아온 호의.
어째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있는 장연철에게 담담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장피디님, 거기 계십니까?
“예? 예.”
-얼마전에 『화려한디너』 잘 봤습니다.
“예……?”
얼마 전 언급조차 되지 않고 쫄딱 망한 드라마가 화두에 오르자 장연철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이어진 이현석의 말투는 진지했다.
-실적은 아쉬웠습니다만 전 『이슥한 달』보다는 이쪽이 마음에 들더군요.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오다곳 생각합니다.
“……”
-가능하면 차기작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사 역시 그 방을찬 이후 막장도 90%를 찍은 감독을 대하는 일종의 존중에 가까웠다.
하지만 당연히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들렸다.
-…뭐, 그런 이유로 안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이해가 안 가는군.”
-하하……
서수현과 이현석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장연철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가.’
무릎을 꿇고 있던 장연철의 어깨가문득 부르르 떨렸다.
‘나한테도, 저 이현석이 눈여겨볼 법한 가능성이 있었던 거였나.’
생각해보면 늘 성공할 수밖에 없는 판을 짜왔다.
유명한 배우, 유명한 작가, 약한 상대, 황금 시간대…….
그렇게 고만고만한 기회를 노리고 경쟁자를 짓밟아 성공을 쌓아온 것이 지금의 장연철이었고, 그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재능 없는 이가 세상 사는 법이 다그런 거라고.
입봉작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말아먹고 눈칫밥을 얻어먹던 젊은 날의 장연철은 계속 그렇게 생각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스타일이 유일하게 무너졌을 때가 『화려한 디너』를 연출했던 시점이었다.
이현석의 스타일을 베끼긴 했으나 판만짜고 내던지던 평소와 달리 모든 걸 스스로 만들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이 더 황당해할까 고민하며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리고 처음으로 편집실에서 밤샘작업도 해보았다.
그렇게 손이 닿으니 동기는 증오였으되, 결국 작품에 약간이나마 애정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역대급 폭망.
사장이 뒤를 봐준다고 해도 그 서수현 관련자를 저격한다는 미친 짓을 벌인 건 거기에 울분을 느낀 탓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고개를 숙인 채 몇 번이고 고개를 젓던 장연철이 문득 물었다.
“…이현석 피디.”
-예.
“나한테… 제작자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허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에게 돌아온 대답은 심플했다.
-예.
“…당신과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 글쎄요, 같은 노력을 한다면 저보다 훨씬 낫겠지요.
무엇보다 단매에 막장도 90퍼센트를 넘겼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장연철은 재차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러니까. 이현석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었다.
그간 장연철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흉행들을 용서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가능성을.
예전, 스스로도 재능이 없다고 자조하던 무명배우 유명우를 꿰뚫어본 것과 같이.
“하하하……!”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하면 된다고 한다면, 나도 그런 걸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대체 무슨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서수현과 서예린, 두 숙질이 기묘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이 장연철은 계속해서 끅끅대고 웃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대한 후회와 이현석의 아무렇지도 않은 한 마디가 마멀레이드 잼처럼 섞여 뇌리를 뒤섞어놓았다.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참후, 자리에서 일어선 장연철의 눈은 올 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멍청한 일로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서수현 작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할속셈이지요?”
“글쎄요.”
장연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할 일이 참 많긴 한데.
“일단 죗값부터 치르려고합니다.”
“또 무슨 헛소리인지.”
서수현은 당연히도 신뢰하지 않았으나 장연철은 그 길로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밝히고 자수했다.
두 숙질은 물론 애초에 꼬리를 자르려던 원광훈 사장조차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 었다.
“그럴 녀석이 아닌데? 대체 뭘 잘못 먹은 거지?”
“그것이… 이현석과 통화를 하고 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모종의 협박이 이루어진 것같습니다.”
“…무시무시하군.”
“예.”
“KBC를 뒤집어엎은 것도 그렇고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이현석이란 놈은? 배후에 대체 누가 있는거야?”
원광훈 사장의 오해와 경계심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서수현 작가는 구치소에 갇힌 장연철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상황에 뭔가가 있지 않나 더 캐보기 위해서였다.
“잘오셨습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하지만 장연철은 그야말로 사람이 통째로 바뀐 것처럼 온화해져 있었다. 사람을 보는 눈에는 나름 자신이 있던 서수현 작가조차 황망하지 않을 수 없는 변모였다.
고개를 젓고 나가려는 서수현 작가에게 장연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MBS 드라마국에 신인 배우들 관련으로 거대한스캔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저도 간접적으로 돕는 입장이기도 했고요.”
놀란 서수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지요?”
“그게… 저는 어디까지나 끄나풀인 입장이라 확실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설 씨는 저보다 잘 아는 것 같더군요.”
“이설? 지금 우리 조카사위랑 드라마 찍는 배우 이설 말하는 건가요?”
장연철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조카사위……? 아, 역시 그런 관계… 크흠, 예. 신인 시절 제가 스카우트를 하러 갔을 무렵 제가 거칠게 굴자 그걸로 협박을 해오더군요.”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서수현 작가는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난후 구치소에서 나왔다.
이후 이현석과 서예린의 이름으로 장연철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가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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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현석아, 넌 좀 더 사람의 마음이란 걸 알아야…….]새파래진 얼굴의 설이를 바래다준 뒤 잔소리를 늘어놓던 김철 선배는 내 전화가 울리자 잠시 말을 멈췄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든 나 역시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장연철? 이거 꽤 간만에 듣는 이름이군.]“그러게나 말입니다. 얼마 전에 집행유예로 나왔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요.”
[뭐라고 하냐?]“그러니까……
메시지를 읽은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MBS 원광훈 사장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는데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