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22)
장연철 PD와의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김철 선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지른 거 미주알 고주알 죄다 일러바쳤다길래 몇 년쯤은 살줄 알았다만.]“뭐, 제 쪽 명예훼손이나 몇몇 기자들 협박죄 같은 것들이었는데… 어느 쪽이든 다 반의사불벌죄니까 말입니다.”
해외처럼 친고죄에 속했다면 아마 내가 탄원서를 넣을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피해자로 꼽힌 기자들 역시 장연철 PD를 만나보고서는 비슷한 수순을 따랐다는 모양이었다.
[…노린 걸까?]“그럼 차라리 다행이지요.”
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깟 탄원서 몇 번이라도 쓸 수 있으니 그냥 복귀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연극처럼』과 『연구일지』시절 장연철 찬스의 위력은그야말로 어마어마한것이었다. 막장도가 단숨에 두 배 이상 오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막장도 20에서 30퍼센트를 오가고 있는 지금 입장에서 보면 가히 절실하기까지 한 도움이었다.
[MBS 나오고 TVM에 들어갔다고? 재주도 좋군.]“아무래도 고모님… 서수현 작가님께서 인맥으로 소개해주신 모양입니다.”
끔찍이 아끼는 조카를 건드린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 않게 제법 전향적인 태도였다. 나로서도 꽤 의외였다.
김철 선배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카랑 조카사위랑 재보고 미래를 택한 모양이지.]“네?”
[아니다.]김철 선배는 크흠, 헛기 침을 한 뒤 목소리를 바꾸었다.
[아무튼, 가서 잘 도발해 봐라. 무슨 심정으로 자수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 녀석의 도움이 절실해.]“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원광훈 사장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지금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었다.
대부분 방송국의 제작센터가 일산에 자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TVM – 정확히는 그 모회사 – 의 제작센터 역시 일산에 있었다. 차로는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거의 도착하자 어쩐지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여성 팬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었다.
“꺅, 테이준 오빠!”
“멋져요!”
“사랑해요!!”
바글거리는 팬들 사이에서 아이돌 하나가 웃으며 싸인을 해주고 있었다. 영 낯선 걸 보아하니 꽤 최근에 데뷔한 것 같았다.
음……
팬들이 촬영장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은 흔한 일이고, 거기에 일일이 싸인을 해주는 것도 칭찬할 일이지만 아예 길을 틀어막고 있는 건 좀 어떨까.
나는 차창을 내리고 멀뚱히 서 있는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저, 팬서비스도 좋지만 차도 좀들어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아, 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매니저는 이 내 눈썹을 추켜올렸다.
내 목에 걸린 게 없는 걸 확인하고, 이제 슬슬 10년쯤 되어가는 내 구식 소나타를 슬쩍 훑어보고는 헛기침과 함께 안색을 바꾼다.
“혹시 촬영 관계자십니까?”
“아뇨, 일반인인데 잠깐 이쪽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끝날 겁니다.”
“……”
꽤나 거만한 태도였다.
[아니, 이 개새끼가 장난하나?!]성질이 급한 김철 선배는 노성을 터뜨렸고, 본래부터 눈치 빠르고 기민하기로 소문난 나도 눈앞의 인간이 나를 개무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나는 굳이 한 번 더 좋은 말로 달랬다.
“공간 많지 않습니까? 잘 정돈하면 한켠에서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말은 해보겠습니다.”
매니저는 마지못한 투로 대답하고는 제 담당에게 가서 무어라 말을 걸었다. 이쪽을 본 아이돌이 아차 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옆의 매니저가 뭐라고 하자 인파를 움직이는 대신 더욱 빠르게 싸인과 인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라고 한 모양이었다.
[아니, 저 새끼가?!]김철 선배가 재차 폭발했다.
[야,내려라, 현석아!]“으음……”
[뭐 하냐!.네가 지금 저런 좆도 아닌 새끼한테 무시당할 짬이냐?]나는 작게 침음성을 냈다.
“아뇨, 그것이… 제가요즘 여성 팬들이 모여 있으면 현기증이 나는 지병이 생겨서 말입니다.”
[지금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나 할 때냐?!]딱히 농담은 아닌데. 제법 심각한 문제라면 모를까.
나는 옆에서 김철 선배가 길길이 날뛰는 동안 그냥 꾹 참고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테이준인지 하는 아이돌이 싸인을 해주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저 똥차는 아까부터 저기서 뭐 하고 있대?”
“바쁜 거 안보이나? 좀 다른 데로 가지.”
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이쪽을 보는 매니저의 눈이 완연한 비웃음을 머금기 시작하던 중 이었다.
내가 정말 다른 문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중 안쪽에서 차가 한 대 나왔다. 최근 신형으로 뽑았다는 포르쉐 파나메라였다.
아, 그리고 보면 오늘 예능 촬영이 있다고 했던가.
“여러분, 죄송하지만 양쪽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그걸 본 매니저는 내 때와 달리 화들짝 놀라 팬들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어 차는 이미 멈춘 뒤였다.
뒷좌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늘 그렇듯 킬힐과 선글라스로 무장한 짜증스런 표정의 깡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도나 선배님……?”
몸에 두른 흉험한 기세에 순진한 웃음을 짓던 아이돌은 순간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로서도 조금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천하의 이도나가 그런 걸 신경을 쓸 리 만무했다. 평소처럼 한껏 비꼬는 듯한 매도가 날아들었다.
“댁은 뭐에요? 여기 사장 아들이라도 되시나?”
“네? 아뇨……”
“그럼 석유왕인가? 짬 먹었으면 얼마나 쳐먹었다고 길을 턱하니 가로막고 있어요?”
“그, 그것이……”
아이돌은 구원을 청하듯 매니저를 바라보았으나 그쪽은 되레 고개를 휘휘 저으며 물러나는 중이 었다.
거 대단한 매니저도 다 있군.
별 수 없이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내가묻잖아요. 댁 석유왕이냐고.”
“아, 아닙니다.”
“그럼 여기가 안이지 밖이에요?”
“예?”
“그럼 여기가 안이지 밖이냐고요.”
“……”
아니, 누가 봐도 밖이잖아.
아이돌이 당황해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자 이도나는 더욱 신나게 갈궈대기 시작했다.
“대답 안 해요? 요즘 애들 세상 참 편하게 사네… 그쪽 매니저, 애 교육 제대로 안 시켜요?”
잘 한다, 우리 딸! 하고 응원하는 김철 선배를 놔두고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암만 그래도 옆에 구름떼처럼 몰린 팬들을 사이에 두고 저렇게 갈궈댈 수 있는 건 수많은 연예계 인사들 속에서도 이도나 정도밖에 없겠지.
보나마나 오늘 저녁에 기사 몇 개쯤 나오겠구만…….
운전석에서 튀어나온 매니저가 필사적으로 뜯어말리는 사이 나는 조심스레 후진 기어를 넣었다. 하지만이도나는 단박에 이쪽을 눈치채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이힐을 신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시선을 마주친다.
“그쪽은 여기서 뭐해요?”
“아뇨, 그것이……”
“…설마 대기 타고 있었어요? 저 머저리들이 막고 있다고?”
내가 버벅이고 있자 이도나의 표정은 더욱 험상궂어졌다. 손을 내밀어 팔을 꾹 잡는다.
“내려요.”
나는 그렇게 했다.
이제 내 불길한 상상이 맞아들어가지 않길 비는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내리자 중얼중얼 욕을 하기 바쁘던 팬들의 반응이 순간 일변했다. 죄다 목을 길게 빼고 이쪽을 바라본다.
이도나가 기세 좋게 목소리를 높이려 던 중 누군가가 툭 내뱉었다.
“…이현석 아냐 저사람?”
그게 시작이었다.
“이현석 피디? 『삼세번』의?”
“저기 이도나 소속사 대표?”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신참 아이돌과 그 매니저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지만 난 그러거나 말거나 초조하게 팬들의 반응을 살폈다.
곧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맞네, 그 이현석!”
“홍지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이현석!”
음, 그렇지……
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목소리의 기세는 점점 물이 올랐다.
“진짜?”
“진짜! 저번에 방송보면 적어도 홍지호는 찐이라니까? 백퍼!”
“알페스중에 ‘이슥한 달의 제왕’ 봤어요?”
“당근 봤죠!”
재차 기세 좋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이도나조차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의 압도적인 기세였다.
나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럴 것 같아서 싫었단 말이지. 어쩐지 좀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나 싸인 받을래!”
“나도!”
어어하는 사이 팬들은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도나가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 보았다.
“그쪽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인기 만점이 된 거에요?”
“제기랄, 홍지호씨한테 물어보십시오!”
“나보고 걔한테 먼저 말 걸라고요?”
“지금 그런 헛소리 할 땝니까?”
나는 인파에 순식간에 파묻혔다.
멀찍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매니저와 그저 이도나의 마수에서 벗어난것에 안도하고있는 신참아이돌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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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를 따라준 장연철 PD가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그렇다 해도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게 배를 잡고 웃지 않는게 용할 지경이었다.
“아마 이 바닥 역사상 가장 인기 많은 피디 아니시겠습니까? 어지간한 아이돌 수준이던데.”
“제발 그만하십쇼……”
“죄송합니다, 하하. 제가 아직 연줄이 있었으면 기사 크게 냈을 텐데 말이지요! 없지만!”
간만에 만난 장연철 PD는 꽤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자학개그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는 혼자 낄낄 웃는다.
“어쨌거나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 드라마 출연진이 민폐를 끼쳤으니.”
“그게 어떻게 장 피디님 때문이겠습니까?”
내가 손사래를 치자 장연철 PD가 사람 좋게 웃었다.
“충고라기엔 뭐합니다만 그런 말은 쉽게 내뱉지 마십시오. 방금 건 저만큼 못된 놈이면 몇 번을 우려먹을 대사였습니다.”
내가 뺨을 긁적이고 있자 테이준이라는 아이돌이 재차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매니저는 어디론가 불려갔는지 간 곳이 없었다.
나로서도 매니저의 말에 따랐을 뿐인 신인 아이돌에게 유감이 있을 리 없었다. 괜찮다고, 좋은 드라마 만들길 바란다고 좋은 말로 달래니 이내 크게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역시 이현석 피디님은 소문대로의 분이시군요!”
“…실례지만 무슨 소문 말입니까?”
“예? 그야 그홍지호 선배님이 반할정도라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보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깨져라 내리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
또 다른 소문대로의 인물과 눈이 마주친 테이준은 조개라도 된 듯 몸을 웅크렸다.
이도나는 아까부터 불쾌한 기색으로 팔짱을 낀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청객이지만 내 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야말로 민폐였다.
“음……”
당연히 이런 멤버와 분위기에 원광훈 사장에 대한 모종의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연철 PD는 살짝 어색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돌렸다.
“음, 그나저나 오신 김에 제 기획이나 잠시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같은 시간에 방영될 라이벌이기도 하고.”
“어차피 이 피디님 말씀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기획이잖습니까.”
연이은 설득에 결국 나는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시놉시스와 일부 대본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읽어나가던 나는 금세 눈을 부릅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전체적으로는 이 피디님이 호평하신 『화려한 디너』를 모방했습니다. 이름도 그렇게 지었지요 .『초라한런치』라고.”
말장난 수준의 제목 변경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어지는 소재들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용이, 그러니까…….
“자식 셋을 낳았는데… 남편이 사실, 무정자증이었군요.”
“재미있다고 생각해 설정해봤습니다.”
“재혼을 하며 생긴 수양딸이 알고 보니 예전에 관계를 가졌던 내연녀였고……•”
“꽤 좋은 티키타카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둘이 사실 아버지가 달랐던 겁니까?”
“어설프게나마 디에고 로드리게즈 감독의 작품을 참고해보았습니다.”
장연철 PD가 조금 멋쩍은 태도로 쓴웃음을 지었다.
“영 막장스러운 설정이긴 합니다만 전 이런 쪽이 솔잎인 모양이라서 말이지요.”
맙소사.
몇주뒤면 우리 『삼세번』과 동시간대에서 경쟁할 드라마를보며 나는 손을 덜덜 떨었다. 옆을 보니 김철선배도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