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34)
말 그대로 드라마에 나올 법한 럭셔리하고 한적한 카페.
쇼팽의 폴로네이즈 6번이 흘러나오고 있는 안에서는 꽤 나이차가 있는 두 작가가 만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유지아는 애써 앞머리를 정돈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 왔어요.”
김경숙 작가가 읽기 힘든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슬쩍 구른 눈동자가 정수리 끝부터 아래까지를 꼼꼼히 살폈다.
“뭐 마실래요?”
“어, 그게… 저는 잘몰라서요……”
유지아가 머뭇거리고 있자 작은 한숨이 돌아왔다.
“이런 데 안 와본 건 알겠는데, 이럴 때는 그래도 당당하게 뭐든 시켜야하는 거예요.”
“어 네?”
“뭐든 했을 때 무시당할 확률은 반반, 하지만 지금처럼 머뭇거리고 있으면 백퍼센트 상대에게 무시당하게되니까.”
“……”
유지아가 말문이 막힌 사이 김경숙 작가는 적당히 주문을 끝냈다.
“이현석 피디는 좀 늦는다고 하더군요.”
“…네, 들었어요.”
“표정 관리도 안 되고.”
더욱 기가 찬 시선이 돌아왔다. 혹은 그런 걸 가장하고 있거나.
“대체 그 때 나 들이받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원… 아, 당시에는 이현석 피디가 옆에 있었던가요?”
“……”
거의 생트집에 가까운 상황.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두 번이나 디스당한 유지아는 그대로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몇 안 되는 이해자와 어색해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낮았던 그녀의 자기평가는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후배가 고개를 숙인 사이에도 선배는 그 모습을 드러나지 않게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뭐, 고생하고 있단 얘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김경숙 작가는 어조를 바꿔 적당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지아 역시 실수하지 않으려 열심히 장단을 맞추었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커피가 반쯤 줄어들 무렵이 되자 김경숙 작가는 지나가듯 본론을 꺼냈다.
“참, 서예린 작가와 한바탕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
“물론 들은 얘기니까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말이죠.”
창백하게 질린 모습을 달래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대충 짐작은 가는거거든요, 이게.”
“……”
“그래도 뭐, 일단 묻겠는데… 화해해야지 않겠어요?”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듯한 질문이었다.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해도 별 상관은 없을, 아니, 도리어 그래야 할 장면이었다.
“……”
하지만 어째서일까, 유지아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이전의 관계가 그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서로 눈을 돌리고 있던 상자를 열어버린 이상 무언가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끝날 리 없었다.
“표정이 좀 나아졌네.”
김경숙이 회미하게 웃었다. 계속해서 관찰하고 재보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별 의미는 없어 보였다.
적당한 흥미로 주선을 부탁했었지만 어쩌면 괜한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비슷할수가 있을까.
일단 마음이 녹자 목소리 역시 부드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알아요? 이 바닥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서수현 작가님과 사이가 안 좋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우린 꽤 닮았다고생각하는데.”
“네?”
유지아가 처음으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가요, 하고 묻는 눈빛에 김경숙 작가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처음은 동경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는 게 말이죠.”
“……”
그 옛날, 서수현 작가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연줄을 빌려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케이스다.
환경이 받쳐주는데 재능까지 타고났으니 가는 길에 적수는 없고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반면, 그런 서수현을 동경했던 김경숙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간신히 학비를 대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것도 늦었다. 단막극으로 간신히 입봉한 이후 몇 번이나 미역국을 먹고,될 대로 되라고 써낸 물건이 간신히 히트를 쳐 작가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처음으로 존경하는 선배를 만난 자리에서 김경숙은 긴장하며 침을 삼켰더랬다.
-처, 처음 뵙습니다, 선배님! 항상 뵙고 싶었습니다!
-…글쎄, 누구실까. 난 그쪽 같은 후배를 둔 적이 없는데.
하지만 돌아온 서수현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경숙이 쓰고 있던 이른바 막장드라마. 그건 이미 그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배신감은 차라리 서늘하기까지 했다.
동경이 온연한 적대감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유지아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김경숙 작가가 쓰게 웃었다.
“유 작가한테만 처음으로 말하는 거예요. 나한테는 꽤 잊고 싶은 일이니까.”
“어, 어째서 제게만……?”
“다시 말하지만, 우리 둘은 처지가 참 비슷하니까요.”
김경숙의 눈이 심유해졌다.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유지아가 저 조그만 머리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가진 걸 부러워하고. 그걸 쫓으려 하고, 끝내 그게 나한테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것까지.”
멍하니 벌어진 입에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인다.
“아, 물론 나야 유작가처럼 최악의 환경은 아니었지만요.”
“…저도 최악은 아니에요.”
“응?”
“제게는 오빠… 이현석 피디님이 계시니까요.”
제 속내가 드러난 것에 놀란듯한 얼굴도 잠시, 더없이 맑은 눈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어째선지 김경숙은 재차 긴 한숨을 쉬었다. 실로 딱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심지어 그것까지도 비슷하단 말이야.”
“어… 네?”
“서수현 작가 하면 생각나는 파트너, 누군가요?”
“예? 그야 KBC 안기식 사장님……”
“좋아요, 그럼 다시 묻지요. 내가 방금 말한 첫 히트작을 연출해준 사람, 누구라고 생각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진 의미는……
멍한 표정을 긍정하듯 김경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도 안기식 피디님이었어요. 그 후로도 많이 도와주셨지요. 나는 평생 같이 가려고 생각했고.”
유지아는 눈을 깜박였다. 김경숙 작가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연스레 대답이 나온 걸로 충분하겠지요. 나는 빼앗겼어요. 다들 안기식 피디의 커리어로는 서수현만을 기억하고 있지요.”
“…..”
“그럼 이렇게 물어볼까요. 나중에 이현석 피디의 커리어로 서예린 작가만이 언급된다면 당신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나요?”
그런 질문과 함께 김경숙은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다. 마지막으로한번 더 살펴볼 요량이었다.
아.
문득, 유지아는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그건 차라리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싫다.
그건 싫다.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은 건 안다. 나보다 대단한 것도 안다. 황새와 뱁새 수준의 처지인 것도 안다. 시작 지점이 한참 다른 것도 안다.
나는 어떤 걸로도 이길 수 없다.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눈빛이 됐군요.”
김경숙 작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지, 이런 만남이 또 있을까. 마치 예전의 자신의 거울이라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태도가 가장 중요해요. 양보 따윈 웃기지도 않는소리, 사방에서 욕올 들어먹더라도 게걸스럽게 탐하지 않으면 얻올 수 없는게 있게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내미는 조언은 진실미가 담겨 있었다. 옛날의 자신을 만났다면 김경숙은 필시 이렇게 당부했을 것이다.
물론, 유지아의 처지는 훨씬 더 나빴다.
“안기식 피디님은 훌륭한 제작자였어요. 하지만 이현석 피디는 좀 더 대단한 사람이고.”
그건 무엇보다 김경숙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별 생각 없는 호언장담에 반쯤 속는 기분으로 올라탄 결과는 차라리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았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자신의 과거를 재차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이 먹은 자신도 그럴진대 눈앞의 어린 후배는 오죽하겠는가.
오기 전 유지아의 과거를 알아본 김경숙은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거기에 이어지고 있는 건 일종의 사명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 아이를 무심히 넘겨서는 안된다고.
김경숙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유지아는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서예린 작가도 나름대로의 무언가를 얻었겠지요. 앞으로 이 피디와 같이 작업할 다른 사람들도 그럴 테고.”
“…네.”
“그중 몇몇은 당신과 비교할 수준이 아닐 정도로 뛰어 날지도 모르고요.”
“……”
하지만 여기에는 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좁고 얇은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여기구나, 한숨을 쉰 김경숙은 그녀를 격려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는 욕심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나보다 훨씬 더.”
“욕심…..?”
“그래요.”
유지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은 동그래져 있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이어진 말은 반쯤 더듬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자칫하면 간신히 얻은 것도……”
“당신이라면 괜찮아.”
“저라면……?”
“그래요.”
망연한 표정의 후배에게 김경숙은 안쓰러운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아이가 보답을 받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 상대가 서수현과 같은 불합리한 친지의 백업을 받는 부조리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유작가 이야기는 대충 알아봤어요. 그간 정말 고생했더군요.”
“…그런 건.”
“정 힘들면 이렇게 생각해봐요. 나는 지금껏 잔뜩 빼앗겨봤다. 남들이 가진 걸 무엇 하나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면, 이 정도쯤은 바래도 되지 않을까.”
“……”
“나는 유 작가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김경숙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쪽이 치사하게 뒷배로 밀어붙인다면 내가 뒷배가 되어주지요.”
글쎄.
아마, 지나치게 빗장이 풀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올려다봐야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서수현의 뒷덜미를 잡았고, 그 흐뭇함에 한 방 더 먹여주려고 만난후배는 젊은 날의 자신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었다.
그런 그녀가 서예린이 끼고 도는 조카와 최근에 갈라섰다는 소식에 이르면 일종의 운명적인 무언가까지 느껴졌다.
거기에 조력하는 게 뭐가 그리 잘못된 일이겠는가.
사람이란 대개 자신과 닮은 점은 보더라도 다른 점에는 눈을 돌릴 때가 있었다.
“나라면, 이 정도쯤은, 바라도……”
가만히 되뇐 유지아가 고개를 들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형광등 빛을 받아 빛나는 유리구슬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