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40)
“미안하지만 그건 안될 말이다.”
지아에게 감격은 받았기로서니 결론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고민 끝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난장판에 지아까지 끌어들여서 얻을 게 뭐란 말인가.
“메리트가 없어.”
그런 내 말에 지아는 몹시 슬픈표정을 지었다.
“저로는 도움이 안된다는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굳이 사석(舍石)을 더 늘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설이의 물오른 연기보다 더한 눈망울에 나는 애써 표정을 수습해야 했다. 오늘의 지아는 어째선지 조금 색달랐다.
나는 헛기침으로 당혹감을 날려버린 뒤 애써 설득에 나섰다.
“지금 내 운신은 철저하게 막히고 있는 상황이다. 생각해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비슷한 처지를 늘려서 얻을 이득은 적어.”
“나를 도와주고 싶다면 좀 더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냐?”
동치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KBC 안기식 사장의 승진에는 묵묵히 뒤를 받쳐준 서수현 작가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지아가 외부에서 실적을 쌓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도움이 되겠지.
“그렇군요.”
“그래.”
나 스스로도 내심 완벽한 논리라고 고개를 끄덕이 던 중 지아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싫어요.”
“어… 뭐?”
“전 오빠랑 같이 있고 싶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방금 전까지는 언제 어른이 됐나 싶었는데 이젠 숫제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나는 당혹스럽지 않을수 없었다.
지아는 우격다짐으로 우겨대기 시작했다.
“필요 없으시면 옆에서 잡일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넌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저 청소도 잘할수있어요!”
“…청소부를 고용하는 게 낫지 않겠냐, 상식적으로?”
…이제는 뭐가 뭔지 원.
내가 머리를 벅벅 긁는 사이 서예린 작가가 가만히 이쪽으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옳다구나 싶어 얼른 말을 걸었다.
“서 작가님도 뭔가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네요.”
서예린 작가가 중얼거렸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지아랑은.”
그리고는 여전히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덧붙인다.
“나중에.”
…아니, 지금하라고.
#
지아의 고집은 그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나는 사실상 설득에 실패하고 말았다.
문제 해결이라기보단 보류 같은 느낌으로 마무리하고 나오면서 나는 머리를 헤집었다.
“도대체 얘가 어른이 된 건지 애가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러게나 말이다.]“고등학생 때도 안 피우던 똥고집을 대학 들어가서 피우고 있으니……
[그러게나 말이다.]“…선배님?”
[왜.]“아뇨, 아닙니다.”
어쩐지 영혼이 없는 대답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문제야 이것저것 있었지만 어찌됐든 내 심정 자체는 꽤나 용기백배한 것이었다.
설마하니 대부분이 이렇게 나를 지지해줄 거라고는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글쎄다, 그렇게 감동한 표정을 지을 일이냐? 충분히 친한 사이들 아니냐.]“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선배님.”
내가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연구일지』찍을때 얘긴데 말입니다…아, 이번게 아니고 저번거요.”
[음.]“성적이 워낙에 끔찍하고 배동기 CP의 흉계도 한 몫 하다보니 스태프들 분위기가 정말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꽤나 돌려 말한 표현같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건 개판 오 분전에 가까웠다.
나름대로 조연출 시절 연이 깊고 친하던 사이들로만 꾸렸음에도 악재가 닥치자 사이는 그야말로 모래알 수준으로 전락했다.
“심심하면 싸우고, 문제가 생기면 떠넘기고, 안 보이는 데서는 서로 간에 욕설을 퍼붓기 바쁘고…”
아마 내 마음이 끝까지 편치 않았던 건 방송국을 나오게 된 것 자체보다도 그 과정이 정말 아니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뭐, 악재 하나 닥치면 어설픈 집단이야 깨강정이 되게 마련이지.]김철 선배가 혀를 찼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거구만? 너 하나로 끝내려고 빨리 빠지려고 들었던 거고.]“…뭐, 그렇습니다.”
나는 멋쩍은 심정으로 인정했다. 나름 훈훈하던 위즈톤이 그렇게 박살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 이상으로 신뢰는 굳건했던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심히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덕분에 생각도 조금 정리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뭘어쩔 생각이냐?]김철 선배가 물었다.
“결국 문제는 원광훈 사장과 높으신 양반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의 저로서는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고 말이죠.”
[음.]동의를 얻고 말을 잇는다.
“그리고, 결국 제가 할수 있는 건 무언가를 만드는 겁니다. 정치질이 아니라.”
[뭐, 그거야 나도 그렇지.]“그럼 저희에게 가능한 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긴 논의를 끝낸 뒤 김철 선배가 나직이 물었다.
[정말 자신 있냐?]“있고 말고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의 나는 전투력이 세 배는 올라간 기분이었다.
“이번 생애에는 이것저것 나아진 점이 많습니다만 지금만큼 힘이 났던 때는 없던 것 같습니다.”
“그야 제 사람들의 단결력을 본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여전히 감동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단결이라…….]하지만 어째선지 또다시 영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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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쁘지 않았다.
이현석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간 뒤 유지아는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며 자평했다.
이현석의 표정은 곤혹스러웠지만 귀찮거나 짜증스러운 레벨까지 가지는 않았다. 지아는 우격다짐으로 고집을 피우면서도 안색을 살피며 신중하게 강도를 조절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호인상, 김경숙 작가라도 합격점을 줬을 것이다. 일단은 한 고비 넘긴 셈이었다.
…뭐, 아무래도 닥친 문제는 더 있었지만.
“유지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지아가 정리를 마친 사이 실제로 그 상대가 곧장 이를 드러냈다. 서예린의 눈빛은 완연한 적을 보는듯한 것이 되어 있었다.
지아는 그것이 꽤 기꺼웠지만 애써 표정을 숨겼다. 되레 짐짓 의아하다는듯 고개를 기울인다.
“무슨 생각이냐니요? 무슨뜻이세요, 언니?”
“왜 그 사람을 부추기고 있냐는 말이야!”
“아.”
“아? 네가 지금 상황올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정말로 어마어마한 위기거든? 너 환심 사자고 이피디님 인생을 통째로 시궁창에 쳐 넣을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지아는 웃었다. 하지만 떨리는 입가를 채 숨기지는 못했다.
시궁창에 쳐 넣어? 누가 누구를?
애초에 말은 똑바로 해야지.
“오빠의 ‘피디로서의’ 위기인 거죠. 말씀은 바르게 하셔야하는 것 아닌가요?”
“…뭐?”
“결국 언니는 자기를 알아주고 같이 일해줄 피디로서의 오빠가 필요하신 거잖아요? 그게 아니게 되는게 곤란한 것뿐이고.”
반쯤 폭언에 가까운 말에 서예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 지금 말 다했니?”
간신히 짜낸 말이라봐야 이랬다. 지아는 어째선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글쎄요. 최근에 깨달았는데요, 언니. 전 아무래도 그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어 있었던 것 같아요.”
서예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그건?”
“그러니까, 저는 애초부터 작가가 되고 싶은게 아니었던 거예요.”
“뭐?”
한때 서예린이 가진 재능을 질투하던 어린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부정했다.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부글거리는 그녀에게 유지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요. 저는 그냥 누군가한테 사랑받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
가만히, 서예린은 입을 닫았다.
그런 그녀에게 지아는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오랜 옛날, 홀로 두 동생을 키우면서 그녀는 쉬이 잠들지 못하는 습관이 생겼다.
동이 틀 무렵까지 잠자리를 뒤척이며 지아는 몇 번이고 상상하곤 했다.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할 수 있다고, 실패할 수도 있는 거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간 정말 노력했다고, 이젠 괜찮다고, 나에게 맡기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그런 수많은 소망이 겹치고 겹쳤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만들어진 건 사실 상상이라기보단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말이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온갖 욕구가 섞여 만들어진 그것은 애초에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자 그 이상의 무언가라는 엉망진창인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몇번이고 닳도록 읽은 『키다리 아저씨』조차 그런 망상덩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어나 버렸단 말이에요, 실제로.”
그건 일종의 기적이었다.
쌓인 수만 개의 원고에서, 그것도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내젓던 조악한 1차 탈락 작품들 중에서 이현석이 그걸 찾아낸 건.
그리고,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아는 정말 이상하게도 언젠가부터 좋은 작가가 되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거다. 바라던 건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었는데도.
역설적인 일이지만 김경숙 작가와의 만남은 그걸 깨닫게 해준 셈이었다.
지아는 표정에서 웃음을 지웠다.
“언니, 저는 오빠가 피디가 아니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아니.
“다른 어떤 걸 하더라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더라도 상관없어요. 그저 제 옆에만 있어주시면 돼요.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하거든요.”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시네요, 역시.”
서예린은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어떤 생경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그걸 견디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이 피디님은 타고난 제작자야.”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지 않으면 불행해지는부류의 사람이야.”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럼…..!”
“그만큼 제가 채울 거예요. 뭐든지 해서.”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냉막해졌다.
“저기요, 언니. 오빠 같은 분께 불의를 보고 참으라는 것도 결국 똑같은 거잖아요. 오빠한테 있어서는 똑같이 힘든 일인데, 그저 언니에게 있어 보다 낫다는 이유로 그걸 권하시고 계신 거잖아요.”
“대단한 사람이네요, 언니는.”
감탄한 듯한 목소리도 어느새 서늘해져 있었다.
“그렇게나 잔뜩 갖고 있는 주제에 더 갖고 싶어하고, 그런 주제에 이미 가지고 있는 걸 버릴 용기는 없고. 그렇게 어중간한 주제에 비겁하고, 욕심쟁이고.”
그건, 일종의 경멸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까는 그거, 정말로 온전히 오빠를 위해서 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
침묵이 흘렀다.
유지아는 더 말을 잇지 않았고 서예린 역시 이를 악물면서도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문득 더한 이변이 일어났다. 둘만 남아있던 회의실의 문이 갑자기 달칵 열린 것이었다.
“아 미안한데, 조금 엿들었어요.”
두 작가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서예린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유지아는 올 게 왔구나, 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뭔가 재밌는 얘기들 하시는 것 같아서.”
들어온 이도나는 늘 그렇듯 아니꼬운 어조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그 인간의 옆이 어쨌다고요?”
“……”
난장판의 시작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