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44)
“너, 요즘 뭔 일 있지.”
얼마 전, 서수현 작가는 마음먹고 조카를 다그쳤다. 줄곧 알아서 말해줄 거라 참고 기다리던 인내심이 끝내 폭발한 거였다.
작정한 듯한 태도에 서예린의 반응은 영 어물어물한 것이었다.
“고모도 요즘 이 피디님 상황 알잖아? 마음이 어떻게 편해.”
“그것뿐만이 아니잖아. 뭐야?”
“뭐냐니……”
서수현의 조카에 대한 촉은 어지간한 수준이었다. 그녀가 옛날 이현석을 못마땅해했던 건 초기의 , 조카 자신도 채 알아차리지 못했던 미묘한 연심을 꿰뚫어본 탓도 있었다.
…뭐, 정작 진짜 아들들의 경우 결혼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도 몰랐었지만.
서수현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뭐, 말 안 해도 대충 짐작은 간다만.”
“응?”
“유지아 작가잖아?”
약간의 간격 후 짐짓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소리야?”
“예린아, 예린아. 제대로 시치미를 떼려면 그 쓸데없이 정직한 시선부터 어떻게든 하려무나.”
서수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미디어에서 이현석 사단운운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할 때부터 어째 불안하긴 했다. 결국 일련의 사태는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문제를 아득히 앞당긴 모양이었다.
…뭐, 애초에 서수현은 조카와 유지아가 진정으로 서로 이해할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현석만큼이나 조카와 연이 깊은 상대임에도 지금껏 만남을 회피해온 건 그런 까닭이었다.
“…좀 싸우긴 했어.”
고모의 시선을 피하며 서예린이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금방 화해할거야. 나도 잘못했고.”
“글쎄,나야 상황을 잘 모른다만… 과연 유지아 작가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
떠본 말에 서예린은 재차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 반응에 서수현은 비로소 둘의 사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됐구나.
간신히 얻었던 친구를 잃은 조카가 안쓰러웠던 것도 잠시, 이내 서수현도 마음을 정했다. 조카에게 있어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조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그게 무슨소리야?”
“결국,이현석 피디 옆은 하나고 너는 양보할 생각이 없잖니.”
“……”
늘 그렇듯, 서수현은 조카를 위해서는 뭐든 해줄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늦게 나서지 않았나 싶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 고모가 알아서 다 준비해서……”
하지만, 조카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하지 마.”
“뭐?”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가히 서늘하기까지 한 모습에 서수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카가 그녀에게 까칠한 반응을 드러내던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가 달랐다.
서예린의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완연하기까지 한 분노였다.
“나도 성인이야. 프로젝트도 세 개나 끝냈어. 고모가 보기엔 아직 햇병아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고모가 날 계속 업고 다닐 이유는 못 된다고.”
“얘, 나는 그게 아니라 단순히……”
“작작 좀 해! 내 남자까지도 고모한테 도움 받아서 얻으라는 거야?!”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던 서수현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뱉은 서예린 본인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사적으로 사과하려 다가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문다.
-언니는 편해서 좋겠네요.
-좋을 때는 트라우마고 나쁠 때는 손바닥 뒤집어서 도와주세요, 하고 매달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쉬운 인생이 또 있을까요?
“…부탁이니까, 제발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움켜쥔 옷자락이 구겨졌다.
그 반응에 서수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뭔가 있어. 내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일이.’
그렇다고 순순히 ‘쓸데없는 짓’을 그만둔다면 서수현이 꼰대라고 불릴 이유가 없었다.
조카에게 직접 캐내는 건 포기했기로서니 그대로 주변에 눈을 돌려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움직이자 이상기류는 곧 포착되었다.
“김경숙 작가?”
-그렇습니다. 유지아 작가와 김경숙 작가가 최근 꽤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서수현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김경숙, 이른바 막장대모.
서수현을 기점으로 하는 대가족 드라마의 시대를 끝내고 막장의 시대를 열어젖히며 나름 아끼던 후배들을 모조리 은퇴로 몰아넣은 인물.
바꿔 말하자면 그녀는 서수현이 조카에게 이토록 집착하게 된 계기를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정보를 모으던 서수현은 문득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이현석, 그 다음은 유지아라……’
돌이켜볼수록 우연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면면들이었다.
다행히 이현석은 범상한 인간이 아니라 되레 김경숙을 가지고 놀긴 했지만 유지아는 듣던 풍문으로도 백지에 가깝던 소녀였다. 바람을 불어넣기엔 이만한 인재가 없지 않겠는가.
의혹이 드는 건 자연스러웠다.
뭐, 바람을 불어 넣었다는 표현은 실상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었고.
‘설마 전부 그 돌년이 꾸민 일인가?’
평소라면 종 더 신중하게 판단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뭐,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김경숙이 서수현에게 피해의식이 있는 만큼 그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김경숙 본인은 서수현에게 평생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서수현은 김경숙이 불러일으킨 막장 열풍에 자신을 이어받은 장르가 저물어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그 마수가 하나 남은 조카에게마저 뻗쳤다고 생각하자 서수현은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감히……!’
얼마 전 『삼세번』으로 나름 인정하던 기분은 씻은듯이 사라지고 서수현은 이를 갈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조카의 얼굴을 봐서 자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가 곧장 이현석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자연히 끔찍하리 만치 어색한 만남을 가지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고.
“……”
“……”
한 카페.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서로를 노려보는 두 원로 작가를 바라보며 이현석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속내만 빼고.
#
…왜지.
왜이렇게 된거지.
그야말로 한국 드라마계의 탑 투가 서로 잡아먹을듯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문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튀고 있는 불꽃은 본래 온화한 성격인 내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못되었다.
[음…….]심지어 김철 선배조차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분위기만 살피고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했다.
긴 침묵이 흐른 후, 먼저 포문을 연건 서수현 작가였다.
“김 작가는 할 일이 많이 없나보이? 사람 만나는 데 불청객으로 다 따라오고.”
비꼬는 듯한 말투에 반말이었다. 최소한의 예는 갖추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당연히 김경숙 작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졌다. 간신히 표정을 수습한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만 몇 년을 노신 선배님만 하시겠어요?’
이번엔 서수현 작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갈 차례였다.
나는 애써 눈을 돌려 창 밖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잠자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오, 모기를 잡았다.
“드라마 하나 성공했다고 재지 말아. 그게 김 작가힘이야? 다 여기 이 피디 힘이지.”
“그렇게 부러우시면 선배님도 잡지 그러셨어요? 저번에 만났을 때 유치한 악담이나 하시고는.”
“……”
“……”
두 시선은 더욱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또 왜 끌어들이냐고. 끝내 현실도피마저 할 수 없게 된 나는 속으로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수현 작가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이현석 피디.”
“말씀하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새 기획, 예린이랑 같이 갈 거면 내가 전적으로 협력할 생각이에요. 어디까지나 보조하는 입장으로.”
“……”
나는 침묵했다.
글쎄, 김경숙 작가도 어지간하지만 그 서수현을 보조로 데려다 쓰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특히 최도정 사장은 진지하게 정신과를 예약해줄지도 몰랐다…….
“못 봐주겠네요.”
김경숙 작가가 상을 쿵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조카에 눈이 멀어도 유분수지,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체통이 뭐가 되시겠어요?”
“체통은 무슨, 김 작가야말로 유지아 작가 대놓고 밀어주고 있는 거 다 알아.”
“하, 순서가 반대 아닌가요?”
“뭐?”
“웬 나잇값 못하시는 분이 조카 싸고도느라 애들 노는 물 다 망쳐놓고 계시니 저라도 끼어든거라는 얘기에요. 모르시겠어요?”
“김 작가, 지금 말 다 했어?”
나는 멍하니 높으신 분들의 수준 낮은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불씨는 순식간에 나에게로 옮겨 붙었던 것이다.
서로 입씨름을 한다고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자 둘의 시선은 동시에 나에게로 몰렸다.
“그래요, 이 피디 생각은 어때요? 누구랑 같이 갈 요량이에요?”
“어… 예?”
내가 당황하는 사이 서수현 작가가 툭 내뱉었다.
“뭘 물어보기까지 하나. 상식적으로 유지아 작가보단 예린이, 김작가보단 나지.”
김경숙 작가의 눈이 싸늘해졌다.
“저는 예전부터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선배님 시대는 오래 전에 저물었어요. 모르시겠어요?”
“그쪽은 아닌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뭔 점잔이야?’
“하, 똑같이 취급 마세요. 지금에 와서 선배님이 이 피디랑 짠다고 우리 『삼세번』같은 게 나올 수 있을 줄 아세요? 자존심 탓에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지!”
“오, 말 잘했네. 김 작가가 그간 얼마나 발목을 잡았는지에 대해 재밌는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다투면서도 둘의 한쪽 시선은 계속 내 입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장 말하라는 듯.
‘뭐여 이게.’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왜 나는 이 나이 먹고서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
심지어 이건 어떻게 대답해도 내가 엿이 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질이 나빴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천운으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이건 저 혼자서 결정할수는 없는 문제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피디가 결정을 못하면 누가 결정을 해?”
“그것이, 웹플릭스는 외국 회사다보니 간섭이 좀 심해서 말입니다. 국내처럼 제가 밀어붙일 수가 없습니다.”
존 테일러.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를 구해줄 수 있는 건 그 웬수같은 작자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애써 책임을 떠넘기자두 작가님의 표정은 더욱 험상궂어지셨다.
다른 것보다도 이렇게 싸우고 있는 원인인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데 뿔이 난 눈치였다.
서수현 작가가 말했다.
“그러면 지금 그 작자도 부르면 되겠군.”
“…지금 말씀이십니까?”
“딱 좋을 때라고 생각하는데요.”
김 경숙 작가도 동의했다.
생각해보면 별 의리가 있는 사이도 아니라 나는 기꺼이 존 테일러를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전화로 자초지종을 들은 그의 반응은 어째 좀 특이했다.
-오, 잘 됐군요. 바로 가겠습니다. 이쪽도 마침 보여드릴 사람이 있거든요.
“…보여주실 사람이라는건.”
– 물론 제가 연결드리고픈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그런 헛늙은 노인네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