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52)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기획에 합류한 정민재라고 합니다!”
정민재는 목을 길게 뺐다. 만나는 사람마다 빼놓지 않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도 인사성이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굴고 있는건 얼마 전 인사를 한 번 잊었다고 작가에게 죽일 놈 취급까지 당했던 트라우마가 컸다.
‘김전감 피디님께는 설설 기던 작가가 나한테는 갑질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제부터라도 볼 일이 없는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뭐, 이쪽 이쪽대로 인사성만 밝다고 헤쳐나갈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새 마음을 먹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도 잠시, 정민재는 곧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오우, 잘 부타캐요.”
“예? 예……”
어색한 한국어로 돌아온 대답에 얼떨떨하게 수긍한 건 차라리 나은 케이스였다.
“Oh, is this the one who’s coming today?”
“Maybe. I heard this guy played a key role in the 1st Vulcan project.”
“Don’t overestimate it too much. You know director Lee always talks down on himself.”
“Wow, It’s a good word to say in front of ‘it’, isn’t it?”
정민재의 눈이 빙글빙글 헤엄치기 시작했다.
“어, 그…”
“Never mind, man! I’m delighted to meet you.”
“We will spare no effort to cooperate.”
웹플릭스가 직접 뛰어든 기획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외국인 비율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극히 일반적인 한국인 토익 고득점자답게 정민재의 이마는 금세 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스페어… 뭐라고? 분명히 아는 표현이었는데…….
“아!”
어색한 악수를 나누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멀찍이서 누군가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오신다는 말씀 들었어요. 간만에 뵙네요!”
“어……”
정민재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시더라?
한동안 윤기가 흐르는 펌프스 힐과 단정한 트위드 자켓을 번갈아보던 정민재는 문득 깨닫고 입을 벌렸다.
“혹시 유지아 작가님이십니까?”
“…굳이 혹시라고까지 묻지 않으셔도.”
“아, 이런. 죄송합니다!”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다.
“너무 어른스러워지셔서 미처 몰라뵀습니다.”
아첨 아닌 진심이었다.
예전에 교복 입고 수더분하게 다니던 인상밖에 없으니 잘 매치가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반쯤 환골탈태에 가깝지 않나 하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유지아는 빙긋 웃었지만 딱히 기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주변 반응은 이런데 말이죠.”
“예?”
“아뇨, 잘 오셨다고요.”
그녀는 이내 유창한 영어로 모인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머잖아 서른 살이 되는 토익 고득점자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들이 웃으며 떠나고 난 뒤 정민재가 헛기침을 했다.
“그… 영어를 참 잘하시는군요?”
“공부했어요.”
유지아가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처음엔 잘 못 했는데 『연구일지』때부터 오빠… 이현석 피디님이 앞으로 저쪽과 많이 엮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2년 공부했단 얘기군요?”
“네.”
“……”
2년 공부해서 저거라.
정민재가 자기혐오에 빠져있는 사이 유지아가 빙그레 웃었다.
“아무튼, 잘오셨어요. 오빠는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요. 꼭 힘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그 티 없이 맑은 미소와 존중받는 느낌에 정민재는 문득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질하는 작가에 학을 뗀 그로서는 그런 모습이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게 맞지. 안 그래도 힘든 일정을 어떻게 욕먹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참아 넘긴단 말인가.
이제 『연극처럼』촬영 당시의 훈훈한 광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민재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회의실을 화사하게 만들고 있던 이들이 반겨주자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약 삼십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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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다른 팀이 쫓아갈수 있는 기획을 내놓아야 할 거 아니야!”
서예린이 쿵,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그런 식으로 나 잘났소, 하고 혼자 이기적으로 굴면 대체 뭐가 된다는 거야?!”
가에 있는 정민재조차 무심코 움찔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노성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지아는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턱을 괸다.
“왜 다른 팀을 배려해야 하는데요?”
“뭐?”
“저희는 오빠… 기획을 위해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모으려고 모인 게 아닌가요? 최선의 방책인데도 따라올 수 없는 팀이 있다면 그쪽을 버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언니.”
서예린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쪽을 두고 하는얘기니?”
“그럴 리가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되셨다면 죄송해요.”
면목 없는 표정이었지만 사실상 네가 찔리는구석이 있으니 그런 거 아니냐는 수준의 대답이었다.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
“……”
뜨겁고 냉막한 시선이 맞부딪쳤다. 회의실 전체에 흰 안개가 가득 들어찬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민재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리고 나는 누구지.’
『연극처럼』시절이 생각나던 부드럽고 훈훈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자 서예린과 유지아는이내 험악하게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그 수준이 어찌나 심각했던지 뒤에 있던 서수현 작가와 김경숙 작가마저 말려야 하지 않나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때 서로 머리채를 잡았다는 소문까지 도는 둘조차 그럴 정도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네 기획이 최선이라고? 나이 먹고 늘어난 건 자만심밖에 없나보구나? 그런 마구잡이인 시나리오로 어딜……”
“마구잡이라고요? 오빠께 보여드린다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너……!”
비꼬는 듯한 말투에 서예린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호평의 폭풍우가 쏟아진 『삼세번』마지막화의 연출. 그것이 타인이 보기엔 심히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대본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이현석이 요즘 줄곧 자랑하고 있는 얘기였다.
서예린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피디님을 기준으로 삼지 마! 드라마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기획 총책임자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누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단 얘기에요?”
“너는 아는데도 내 얘기를 안 듣고 있는 거잖아!”
“모르겠는데요? 대체 뭘 말씀하시고 싶은 건데요!”
두 작가는 벌떡 일어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정민재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인세의 지옥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연극처럼』당시 두 작가의 오순도순한모습, 그에게 있어 이상향에 가깝던 풍경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고 있었다.
조금 울고 싶었다.
“……♬”
그리고, 이런 난장판에서도 한구석에 있는 이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반쯤 심드렁 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매니큐어를 들고 손톱을 정돈하기 바빴다.
“하아.”
다른 한편에 있는 이도나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악명(?)과 달리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말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맙소사, 이런 깨강정이 또 있으랴.
정민재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도무지 이 기획이 제대로 굴러가기나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볼까.’
그렇게 마음 먹고 한 시간여. 정민재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방관자 노릇을 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갑자기 조금 새롭달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샌가 두 작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그럼 여기 오빠대리로계신 정민재 피디님께 여쭤보기로하죠!”
왜.
“하, 네가 얼마나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듣고 싶어서 그러니? 좋고말고!”
아니, 나는 왜.
나는 딱히 형님 대리도 뭣도 아니라고……!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두 작가의 태도에 정민재의 등은 불과 몇 초 만에 축축이 젖었다. 뭔가 말을 해야겠다 싶어 입을 달싹였지만 당연히도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구원을 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노작가는 눈을 부라렸고 이도나는 가만히 시선을 외면 했다. 이설에 이르러서는 이제 그라데이션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고개를 떨구었다.
사면초가였다.
“솔직하게 말해주셔도 돼요.”
“아무렴요. 저 꼬맹이가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왜지.
왜 주변에 미인들밖에 없는데 이토록 공포스러운 기분이 드는 거지.
정민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던 중이었다.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그야말로 천운에 가까운 일이라 정민재는 번호도 보지 않고 덥석 받았다.
“예, 정민잽니다!”
“…형님?”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다. 정민재는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지금 회의 중입니다.”
“네, 같이 있지요.”
“예, 예.”
“아……”
정민재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지금 오신다고요?”
이설이 매니큐어를 집어넣고 아세톤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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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착했을 무렵 회의실은 토론이 한창이었다.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분위기는 뭐, 늘 그렇듯 온화했다.
“역시 언니세요! 그쪽 설정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 응. 그래.”
“후후, 팀은 갈라졌지만 같이 열심히 해요!”
손을 맞잡는 지아에게 서예린 작가는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렸다. 드물게 낯을 가리는 기색이었다.
“……”
“후우.”
설이 역시 말은 없어도 자세를 바르게 한 채 진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 태도에 나는 조금 흐뭇해졌다.
이도나는… 조금 두통이 있나? 머리를 짚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한 후 문을 두드렸다. 지아와 설이가 반색을 하며 눈을 돌렸다.
“아, 오빠!”
“감독님.”
나는 웃으며 사온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래, 잘 되고 있냐?”
“그게… 조금 의견이 갈려서요.”
“그거면 됐지. 서두를 필요 없어.”
지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설이한테 빨대를 물려주었다.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선을 돌리니 한편에 민재 녀석이 앉아 있었다. 어째 한껏 얼이 빠진 표정이다.
내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좀 익숙해졌냐?”
“예? 아뇨, 그게……”
“누구든 뭔가 아니다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 내가 따끔하게 말해줄 테니.”
내가 준 권한은 그런 거야, 하고 덧붙였다.
“뭔가 아니다 싶은거……”
앵무새처럼 중얼거린 민재 녀석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선지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설이와 지아의 시선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혹시 이 안에 있냐?”
“…하하, 그럴 리가요.”
민재 녀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제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회의라 조금 놀랐습니다.”
“음, 그렇겠지.”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잘 부탁한다. 앞으로 내가 자리를 비우면 네가 중개를 하게 될 거야.”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예.”
감격에 젖은 까닭인지 조금 울상인 얼굴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