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60)
막장드라마의 제왕 260화
31장 0시를 향하여(12)
『서풍』은 가히 이현석의 인맥을 총동원한 것 같은 느낌의 기획이었다.
작가만 해도 그간 합을 맞춰온 유지아, 서예린을 기용하는 것도 모자라 『삼세번』으로 건재를 증명한 김경숙, 그리고 그간 말만 무성하던 서수현마저 끌어들였다.
그마저도 놀라운데 제작진은 더했다.
가까이는 『연극처럼』 당시 중용했던 정민재 등의 KBC 출신 스태프들이 있었고, 멀리는 『벌칸의 몰락』으로 연을 맺은 해외 스태프들 소식이 들리더니만 끝내는 그 곽태영 감독마저 합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지간한 드라마에서 발표했다면 큰 화제를 모았을 이설, 이도나, 홍지호, 최대웅 등의 배우 라인이 되레 초라해질 지경이었다.
그간 연을 맺은 상대를 알뜰하게도 긁어모은 꼴이니 당연히도 의혹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노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목록 아님?
-아예 이 멤버 꾸리려고 지금까지 기획 준비했다고 해도 믿겠는데…….
-지랄ㅋㅋ
-설마 그랬으려고;
뭐, 어디까지나 의혹에 그치는 얘기였다. 슬슬 이현석이 뭘 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대중들은 암만 그래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상식쯤은 보유하고 있었다.
말인즉슨, 세상에는 그나마의 상식조차 없는 이들이 참 많았다.
심지어 그들은 정보적 약자조차 아니었다.
“…이쯤 되면 의심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SBC 이사회 정기회의.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한 이사가 말을 꺼냈다.
“이현석이는 처음부터 지금의 판도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이라면 어디부터를 말하는 건가?”
“아마도 우리 SBC와 손을 잡았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으음.”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현재 자리에 있는 높으신 분들 대부분이 이 정신 나간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여기에는 이현석의 탓도 없지 않았다.
“이현석이 그놈, 인터뷰에서는 ‘어쩌다 보니’ 곽태영이나 서수현과 같은 거물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고 하더군.”
“하, 그게 말이 됩니까?”
“명절마다 꼬박꼬박 인사시키면서 온갖 작업을 다 쳐놔도 개무시하는 양반들을 모아놓고는……!”
그들은 그런 개소리를 믿느니 차라리 이현석이 원대한 계획을 꾸며 지금의 모든 것을 준비해 왔다는 쪽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했다.
…뭐, 누구나 자신들은 논리적이고 깨어 있다고 생각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도출된 결론조차 썩 유쾌하지는 못했다.
“모든 게 이현석이 그놈의 생각이라면, 우리는 아무래도 큰 실책을 저지르고 있었던 같습니다.”
“…….”
“…….”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현 SBC 이사회의 주적은 말할 것도 없이 최도정 사장이었다.
사장 임명동의제를 통과시킨 그는 이내 사장 직선제까지 도입하려 하며 방송국에 공정성을 도입하려 시도했다.
당연히도 SBC 미디어홀딩스를 통해 방송국을 좌지우지하려는 모기업 회장, 그리고 그 가신단이나 마찬가지인 이사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영리하게 견제를 시도했고 그건 지금까지 잘 먹혀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까지는.
“…1년 전, 실적 악화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최도정이를 몰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지요.”
이제 1개월 차가 된 의장이 말했다.
그는 이전 SBC 미디어홀딩스의 사장이었으므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최도정이의 지지층은 대개 밑바닥 친구들이며 실제 손발이 되어줄 수 있는 사이와는 그리 친하지가 못하니까요.”
그런 까닭에 그들은 같은 ‘밑바닥’인 이현석에 대한 견제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3년 차 피디 아닌가? 그런 놈이 해봐야 뭘 한다고?”
“KBC 사태도 너무 과대평가야. 기껏해야 도화선을 당긴 정도 아니냔 말이야.”
“적당히 단물 빨아먹고 좀 컸다 싶으면 내쫓으면 되겠지. 그때쯤이면 최도정이도 짐을 싸고 있을 테고.”
결국 그들의 선택은 기껏해야 보급선이나 건드리며 최도정 사장의 무능을 질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종편들이 힘을 얻으며 드라마국이 죽을 쑤고 있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이현석이 약간 위협이 될지언정 그리 경계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보았던 까닭이었다.
실제로 『연구일지』와 『삼세번』을 거치면서도 이현석은 그리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로지 제작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이사들은 대부분 안심했다.
더욱이 이현석은 고맙게도 이후 방통위원장을 건드리며 스스로 몰락하는 결과에 접어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몇 개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황은 순식간에 외통수에 가까워져 있었다. 여우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의장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웹플릭스 측과의 접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말이 안 통합니다.”
이사 한 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대표인 최도정이를 거치지 않느냐고 대화를 안 하겠답니다.”
“얘기가 안 되는군!”
“그 존 테일러라는 놈, 너무 융통성이 없는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얼마 전, 웹플릭스는 갑자기 국내에 진출하겠다며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
당연히 공중파로서는 쉬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과폰이 막 들어올 때의 통신사들의 위치였다고 할까.
특히나 이현석을 채가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최도정 사장도 발끈했다.
둘의 싸움을 이사회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이현석. 그 지긋지긋한 이름이 중재에 나서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뭐, 사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현석 본인에게도 몹시 뜻밖인 결과였지만.
“존, 아무래도 저로서는 SBC와의 의리를 쉬이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막장도를 위해 국내 송출이 필요했던 이현석이 이렇게 꾸며대자 최도정 사장은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존 테일러도 인상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장고 끝에 나온 제안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현석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우리가 SBC와 아예 공식적으로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는 상호 간에 이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허어?”
이현석과 최도정 사장 모두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웹플릭스가 가진 무시무시한 작품 풀을 생각하면 SBC가 얻을 이득은 어마어마했다. 나중에 웹플릭스가 진출하며 시청자들이 받았을 쇼크와 메리트를 홀로 누리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최도정 사장은 계산기를 두드려보고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면목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로서는 군침이 도는 제안이네만… 이사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해할 수 없군요. 그쪽은 상업방송이 아닙니까?”
“음? 그렇기는 하네만…….”
“저희는 돈이 제법 많습니다.”
“…….”
SBC는 공중파이기 이전에 상업방송이며, 또한 주식회사이기도 하다.
SBC의 대주주 및 지주회사는 SBC 미디어홀딩스이며 변동은 있었으나 대략 30퍼센트 중반대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국민연금과 국내기관을 합쳐 다시 30퍼센트대가 되며 나머지는 증권회사와 개인으로 쪼개져 있는 상황이었다.
국민연금은 의사권을 행사하지 않고 나머지는 모일 리가 없으므로 이사회가 ‘적당한’ 협의를 통해 충분히 과반을 굴릴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웹플릭스가 등장했다.
논의를 마친 존 테일러는 이현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적당히 사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동네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사 오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 말과 달리 동원된 자금은 눈곱만큼도 적당한 규모가 아니었다.
진출할 국가의 방송사와 싸우기는커녕 되레 지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기세에 이현석은 경악했고 이사회는 기겁했다.
그야말로 예상조차 할 수 없던 기습이었다. 알아차리고 허둥지둥 대처하려던 상황에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이 저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기겁한 모회사의 질책에 이사들은 애써 서로를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여론을 움직이면 되지요.”
“맞습니다.”
실제로 아직 괜찮았다. 이대로 웹플릭스가 의사권을 행사하려고 했다면 ‘외국 회사가 지상파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애국코인’을 동원하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웹플릭스는 되레 기자들을 모아 쿨하게 선언해 버렸다.
“저희 웹플릭스는 SBC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의사권을 행사할 생각이 없으며 지분 취득은 저희와의 사업에 대해 주주 여러분을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자격취득이라고 해두겠습니다.”
“…….”
당연히도, 주식회사인 SBC에는 주주총회가 있다.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자기들끼리 굴려 왔다는 건 말할 나위도 없겠지.
하지만 일단 웹플릭스가 끼어들어 이렇게 선언해 버린 이상 그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른 소액주주들, 그리고 무엇보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어 버린 까닭이었다.
완벽한 외통수였다.
자연히 이사회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 코쟁이 놈들에 타국(他局) 기자들까지 끼어들면 국내 기관이 도와줄 수가 없어! 30퍼센트 중반대 지분으론 무리요!”
“하지만 그렇다고 뭘 어쩌겠습니까? 이제 와서 더 늘리려고 하면 의심을 살 겁니다!”
“그래도 해야지! 그럼 이대로 최도정이가 날뛰게 두자는 건가?”
“적어도 여론에 찍히는 건 피해야 합니다! KBC 사태 못 보셨습니까? 절대 수습할 수 없습니다!”
이사들은 경악해 날뛰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다.
뭐, 딱 하나 통일되는 이름은 있었다.
“이현석……!”
모두가 이를 갈았다.
얌전히 제 할 일에나 몰두하는 줄 알았더니 순식간에 판도를 꾸미더니 목에 비수를 겨누고 있었다.
이 전격전과 같은 솜씨에는 모두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들은 거기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누구 할 것 없이 서늘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무시하던 상대가 자기들 머리 꼭대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림을 하루아침에 그렸을 리가 없다.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이 상황을 계산하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현석 본인이 들었다면 기가 차서 황망해 했을 소리겠지만 한술 더 뜨는 인물이 있었다.
“그야 처음부터겠지.”
SBC 이사회가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을 들은 MBS 원광훈 사장은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SBC와 손을 잡았을 때라니… 멍청한 놈들, 거기까지 당하고도 아직 그 녀석을 과소평가하는 모양이군.”
“이현석. 정말 무시무시한 상대로군요.”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그간 모시는 상사가 이현석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버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실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원광훈이 채 견제하지 못한 이현석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지는 작금의 상황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모시는 상사에 대한 존경을 더욱 굳혔다.
“뭐,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내가 잘난 척하기도 뭐하겠지만 말이야.”
“이현석은 KBC를 뒤집어엎고 웹플릭스를 끌어들여 SBC를 외통수로 몰고 갔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MBS가 평온한 것만 보아도 이는 사장님의 공로가 분명합니다.”
비서의 아첨에도 원광훈은 그리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이쪽엔 아직 그놈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일련의 사태로 이현석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놓은 상태였다.
결국 이현석에게 있어 드라마 제작은 목표가 아니라 권력을 취득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었다.
그 두 개를 바르게 구별할 줄 아는 사람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다…….
늘 그렇듯 오해를 더욱 깊게 한 원광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예의 시시한 계획은 어떻게 되어가나?”
“일단 스캔들거리 하나는 확보했습니다.”
비서가 슬쩍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살펴보던 상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어딘가?”
“용인 네버랜드입니다. 철저하게 위장했지만 다행히 얼굴을 덜 가린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답지 않게 환하게 웃는 이도나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현석. 그 둘이 찍혀 있는 사진을 본 원광훈 사장이 쯧 혀를 찼다.
“좋을 때구만, 연애하기에는.”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도나가 딱히 아이돌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이 연애하는 거 보고 뭔 트집을 잡겠나. 좀 시끌시끌하다 말겠지.”
차라리 이설이라면 모를까 한류배우를 상대로 4년 차 PD가 편애나 비리를 저질렀다고 엮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광훈이 대수롭지 않게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발목잡기쯤은 되겠지.
“딱히 협상거리도 안 될 거 같으니 적당히 뿌려 버리게.”
심지에 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