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87)
막장드라마의 제왕 287화
33장 결실을 맺다(13)
“좋아해요.”
그 한마디에 길고 긴 정적이 찾아왔다.
이현석은 한동안 이마를 누른 채 말이 없었다. 하지만 머잖아 생각을 잠시 방기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네가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구나.”
응, 그렇겠지. 이현석은 몇 번이고 납득하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일단 이도나 씨한테 가서 사과부터 하자. 이번 일은 내가 공론화되지 않게 잘 수습할 테니. 설이가 여기 얼마나 연관된 건진 모르겠지만 그 녀석도 추궁해서…….”
“안 할 거예요.”
하지만 금세 가로막혔다. 이현석은 생경한 얼굴로 지아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네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없는 거냐?”
“…알아요.”
지아는 시선을 피하며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알고말고.
그녀는 나쁜 짓을 했고 심지어 그것을 숨기려고까지 했다. 거기에 대해 이현석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지아는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도나에게 사과하는 것만큼은 예외였다.
“…그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요.”
“유지아.”
“이것도 저것도 죄다 가진 주제에 남은 것까지 뺏어가려던 그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요.”
문득, 이현석은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 머리를 탁 치며 이마를 짚었다. 드디어 문제의 답을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너, 그 입양 얘기 듣고 있었구나. 그렇지?”
“네.”
“제기랄, 그것 때문이구나.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 지아야, 그건 그냥 꺼내본 얘기야. 네가 싫다고 한다면 우린 어디까지나…….”
“오빠.”
지아는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이미 솔직해지기로 했었다.
“그게 아니에요. 아이들 일은 그냥 핑계예요.”
“…뭐?”
“오빠는 저를 씩씩한 소녀가장 정도로 생각하셨던 모양이지만요. 제가 몇 번이나 그 애들이 없어지기를 바랐다고 생각하세요?”
“…….”
“저는요, 사실 굉장히 나쁜 사람이에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요.”
지아는 스물한 살이다. 동생들은 곧 열한 살이 된다.
바꿔 말해 지아가 열다섯 살일 때 동생들은 다섯 살이었다.
미운 다섯 살.
당시 중학생이던 지아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기가 무섭게 칭얼거리고 떼를 쓰기 바쁜 두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방송에서 보던 것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빽빽 울며 언니, 누나를 찾을 때마다 드는 기분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이 애들이 없었다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아르바이트를 두 개로 줄여도… 아니, 하나만 하더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이 애들만 없어진다면-
“그게 뭐 어쨌다고.”
이현석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누구나 힘들면 그런 생각쯤 할 수 있어.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아뇨, 착한 사람은 그런 생각조차 안 했을 거예요.”
지아는 도리질을 쳤다.
서예린이라면, 이도나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인간극장의 한 장면처럼 씩씩하게 이겨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한테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왜 오빠는 제 옆에 있어주시지 않는 거고요?”
“너…….”
전부 지아 자신이 나쁘기 때문이었다. 그야, 그렇지 않으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이도나와 같은 사람이 자기보다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착하지조차 않다면.
그럼 나는 대체 뭐란 말이야.
처음 이현석을 만나고 알아갈 때 지아는 자신의 모든 괴로움이 지금을 위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충분 이상의 보상이었다고,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아는 여전히 재투성이였고, 원하던 것은 그저 환상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재투성이로 태어나서 끝날 운명이라면, 그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아는 웃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아닌가요?”
“…….”
“저는, 오빠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랬어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이현석은 길게 한숨을 쉰 뒤 눈을 감았다. 가만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지아는 고개를 숙인 채 다가올 심판을 기다렸다.
정적은 길었다. 시곗바늘이 도는 소리가 마치 살을 저미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끝내 이현석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이 말부터 해야겠다.”
“…네.”
“내 생각엔 말이다. 지아 네가 네 감정을 너무 속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그리고 멍하게- 지아는 입을 벌렸다.
설마.
설마, 아무리 그래도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이현석은 그 ‘설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돌려주었다.
“내 주변에 멀쩡한 성장환경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만 너는 그중에서도 특출나지. 나이도 어리고 거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고마운 기분과 연애 감정을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다.”
“네……?”
지아는 멍하니 듣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가슴에서 어떤 감정이 빗장을 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말이다, 넌 교우관계가 너무 좁아. 그래서 그런 거야. 기껏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니 주위와도 적당히 어울리다 보면 제대로 된 네 기분이 보일 거다.”
지난 몇 년간 누르고 눌렀던 그것은 이내 목덜미를 넘어가 그대로 전신에 퍼져나갔다.
몸이 차가워졌다. 반면 가슴은 당장이라도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제발.
이윽고 지아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기껏 생긴 친인(親姻)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착각한 거겠지. 무엇보다 냉정하게 나이 차를 생각이라도 해봤다면 그런 소리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는…….”
“제발 적당히 해주세요!!”
마치 비명 같은 외침이었다.
조곤조곤 타이르던 이현석은 순간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지아는 처음으로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뭐예요, 그 꼰대 같은 소리는! 고작 열 살 차이잖아요!”
그저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고스란히 목소리로 바꿨다.
“오빠는 제 아빠가 아니에요! 저는 멀쩡한 성인이라고요! 누굴 좋아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말했잖냐. 그러니까 그게…….”
“착각이라고요? 대체 누구 맘대로요?!”
지아는 타는 것처럼 목소리를 토해냈다.
“증빙이 부족한가요? 저는 선배 여자친구를 모함했어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어요! 이걸로는 부족한가요?!”
“유지아.”
“차라리 욕을 해주세요. 너 따위를 뽑는 게 아니었다고 해주세요. 이런 짓을 한 게 경멸스럽다고 침이라도 뱉어주세요! 그게 차라리 낫겠어요!”
그간 참아오던 눈물이 순식간에 방울방울 맺혔다. 슬픈 게 아니라 분해서였다.
손에서 저절로 힘이 풀렸다.
어째서.
“어째서 저는 이렇게까지 해도 안 되는 건데요……!”
왜 자신은 파트너로 볼 수 있는 상대가 되지 못하는 걸까.
왜 애초에 무대에조차 오를 수 없는 걸까.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결국, 모든 게 밝혀져 감옥살이라도 하게 될지언정 자신이 그간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알아준다면 그걸로 조금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음.”
이현석은 여기까지 했는데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보이는 표정은 담담하고 굳건했다. 지금 듣는 내용을 일종의 ‘투정’으로 여기고 있는 게 명백한, 어른의 얼굴이었다.
‘아…….’
그 표정에 지아는 모든 기력을 잃어버린 채 고개를 숙였다. 대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뭘 해도 안 되었던 건지도 몰랐다.
긴 정적이 흐르고, 우습게도 그녀가 입에 담은 건 결국 사죄였다.
“…잘못했어요.”
결국 그녀에게는 그것이 가장 익숙했다.
“반성할게요, 이도나 씨에게 사과도 할게요. 기자들 앞에서 고해성사도 할게요.”
고개를 숙이고 더듬더듬 목소리를 쥐어짰다.
방금까지의 각오가 무색하게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오빠, 제발 저를 제대로 봐주기라도 해주세요……!”
대답은 없었다.
* * *
“…그래서.”
강주연 매니저가 머리를 짚었다.
“넌 일부러 다쳤다는 거야?”
“네.”
침대에 누워 있던 이설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왜?”
“그래야 이도나 선배님을 어떻게 해볼 수 있으니까요.”
“…….”
강주연은 기가 찬 나머지 무어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꼬라지를 지금 발칵 뒤집힌 소속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뭐라고 할까.
하지만 이내 분노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이게 제정신으로 할 짓인가? 역효과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녀는 자신이 속은 것보다도 이설의 경솔한 행동이 더욱 걱정이었다.
“나중에라도 이현석 피디가 알면 어쩌려고 그래? 일단 들키면 순식간에…….”
“뭐, 어차피 감독님은 이미 아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뭐?!”
강주연은 말 그대로 기겁을 했지만 이설은 담담했다.
“제발 알아줬으면 하는 거엔 둔하시지만 그 외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우시니까요. 이 건은 후자에 속하겠죠.”
“…자폭을 했다는 거야?”
“이대로 영영 끝이라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고- 쓴웃음을 지은 이설은 이내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그 사람만큼은 인정할 수 없거든요.”
“…이도나가 너보다 선배라서?”
“아뇨, 감독님께 무언가를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니까요.”
그 여자 같은 게 하나 더 생기는 걸 어떻게 참겠어요- 이설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르겠다, 내가 쟤 생각을 어떻게 알겠나- 강주연이 포기하고 머리를 벅벅 긁던 와중이었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간호사인가 했더니 젊은 인상의 여자 하나가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 안녕하세요. 주문받은 카페 사장입니다… 여기가 맞나?”
…그런 걸 시킨 적은 없는데?
연예지 쪽 끄나풀인가 싶어 강주연의 인상이 험악해지려는 찰나였다. 이설이 빙그레 웃었다.
“여기 맞아요, 언니.”
“아, 다행이네. 로비에서 호수를 물으니까 무진장 경계하는 눈으로 보더란 말이지.”
“저 잘나가니까요.”
“잘나셨네.”
투덜거리던 여자는 강주연이 제지할 틈도 없이 태연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병상에 누워 있는 이설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저질렀구나. 세상 사람들이 전말을 알면 뭐라고 할지 원.”
“해야 됐으니까요.”
“…뭐, 몇 조각이 나든 현석이 걔 원죄지. 누굴 탓할까.”
혀를 차던 여자는 이내 옆에 있던 강주연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저는 별 사람은 아니고요. 설이가 알바할 때 조금 연이 있어서… 매니저님이시죠? 처음 스카웃하러 오셨을 때는 아쉽게 못 뵈었었는데.”
횡설수설하는 말에 강주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셜록 언니?”
“……어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