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9)
029 –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4)
“···여긴 무슨 일이냐? 이런 꼭두새벽부터.”
“새벽이라기엔 좀 그런데요.”
이설이 시계를 보여준다.
오전 7시 20분.
확실히 새벽이라기보다는 이른 아침에 가까운 시각이다.
꽤 늦잠을 잔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눈앞의 녀석이 혼자 있을 시간은 전혀 아니지만.
“설아.”
“···네!”
한 마디 하려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만뒀다.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가는 것도 있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 꼴을 보면 나던 화도 가라앉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여러모로 타고난 녀석이었다.
“기사 터진 것 때문에 그래?”
“그렇죠.”
화제가 화제니 보통은 꺼려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라도 있을 텐데 이설은 늘 그렇듯 태연했다.
그 태도가 편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 어색한 관계였던 게 거짓말 같다.
저번에 말을 놓자마자 내가 알던 이설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느낌이라고 할까.
“『토크밴드』 출연하실 생각이신가요?”
“뭐, 그렇지.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것도 웃기니 적당하게 수습이 될 거다.”
“글쎄요. 저한테는 수습이라기보단 혼자 끌어안고 가시려는 것처럼 들렸는데요.”
···대체 어디부터 듣고 있었는지 원.
“아무튼 너한테는 절대 피해 안 가게 할 거니 걱정 접어둬라.”
슬쩍 말을 돌렸다.
“간만의 휴가 아니냐. 알아서 잘 수습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고······.”
“거기, 저도 같이 나가도 될까요?”
“······.”
그냥 못 들은 걸로 넘기고 싶었는데 그럴 수도 없는 모양이다.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못 들으신 것 같아서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이설의 눈가에 작게 웃음이 차올랐다.
익숙한 얼굴이다.
예전에 뭔 말을 해도 안 들어먹을 적의 그 표정.
#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전화를 끊었다 하면 새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는 중에도 오는 문자로 휴대폰이 계속 부르르 떨렸다.
예전 『이슥한 달』의 시청률을 역전했을 때도 엇비슷하게 경험했던 일이지만 더 심한 것 같았다.
내용은 대개 대동소이했다.
–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그 정도까지 하고 쳐발렸으면 쪽팔린 줄 알고 기어들어갈 것이지 이런 수작질을 부려?!
김전감 PD의 노골적인 욕지거리를 정점으로 표현법만 다소 완곡하게 바뀌는 정도였다.
이 비열한 짓거리에 대한 욕설과 분노,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걱정.
“괜찮습니다. 잘 수습해 보겠습니다.”
“아뇨. 어퍼컷도 아니고 잽 수준에 그렇게 과도하게 대응하면 되레 그림이 안 좋죠.”
“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나는 걸려오는 전화들을 적당히 달래고 안심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후우······.”
“고생이시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니 너도 좀 꺼져주면 어떻겠냐.
슬쩍 눈빛으로 강변했지만 이설은 생글생글 웃을 뿐이다.
그간 어색한 사이의 이설도 나름 꺼림칙했지만 친해지고 나니 이건 이것대로 귀찮았다.
“왜 반대하시는 거예요? 감독님 혼자보다는 저도 같이 나가는 게 더 화제가 되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모르겠는데요- 하는 투로 짐짓 고개를 기울이는 모양새에 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강주연 매니저님 불러. 그쪽이 동의하면 고려해볼 테니.”
“···결국은 본인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슬쩍 딴청을 피우는 게 강주연이 오면 기겁을 하고 발광할 건 아는 모양이다.
까놓고 말해 일개 PD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시청자는 그리 많지 않다. 예능국 쪽 스타 PD들이라면 또 몰라도.
내가 가서 뭔 낙인을 찍혀도 사람들은 금세 잊어버릴 거란 뜻이다.
기껏해야 내가 신작을 찍을 때 ‘막장의 대부 이현석’ 같은 틀에 박힌 단어로 가십거리나 되는 정도겠지.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비춰야 할 이설은 다르다.
최근 어마어마한 이슈몰이를 하고 있는 배우. 하지만 활동기록은 전무. 사람들이 죄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와중이다.
조금이라도 흠집이 잡혔다간 이루 말할 수 없는 타격이 된다.
한유미가 속한 그룹 『에어리즈』가 물 들어오자 신나게 노 젓고 있는 것과 달리 소속사인 FNC가 웨이브에 곧장 올라타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유다.
이미 예능 데뷔를 포함한 청사진이야 상정하고 있겠지만 아주 철저하게 계산되고 준비된 무대일 것이다.
『토크밴드』와 같은 시청률에 목마른 떼거지 토크쇼는 당연히 논외, 하물며 이런 상황이면 미친 짓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내가 애써 알아듣게끔 설명하자 이설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럼 아예 잔뜩 나가서 리스크를 확 분산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뭐?”
이설은 내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멀찍이서 다가오는 인영들에 시선을 돌렸다.
···어이고 두야.
#
몇 시간 뒤.
예능국 한재령 PD는 눈앞의 면면들을 보고 몹시 곤란한 심정이 되었다.
“음··· 그러니까······.”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 면면들은 곧장 자기소개에 나섰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설이에요.”
“그룹 에어리즈의 유미라고 합니다!”
“저, 저는 유지아라고··· 그, 잘 모르시겠지만 시나리오를······.”
이설의 태연한 어투, 한유미의 활기찬 어조에 이어 유지아가 더듬더듬 따라붙는다.
“아, 예. 압니다. 요즘 방송계에서 여러분들 모르면 간첩이죠.”
한재령 PD의 눈이 방황했다.
세 여자의 뒤에 유승훈이라는 드라마국 CP님이 서 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이 만나기로 한 사람은 안 보인다.
“저, 그래서··· 이현석 감독님은 어디 계십니까?”
유승훈 CP가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장님과 면담중입니다.”
“···사장님과요?”
눈을 끔벅이던 한재령이 머리를 홰홰 저었다.
무척 신경이 쓰이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한재령 PD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 오신 이유가······.”
“저희도 이현석 감독님과 같이『토크밴드』에 출연할 수 있을까 해서요.”
“······.”
이설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한재령 PD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유승훈 CP가 슬쩍 말을 보탰다.
“거절할 이유는 없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보단 넷이 낫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단순히 하나와 넷 수준이 아니다.
누구 하나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면면들뿐이다.
우선 한유미.
『연극처럼 살다』 초중반부에서부터 시원한 행보로 인기를 얻다가 최근화로 정점을 찍고 있는 아이돌 출신 배우.
보통 아이돌이 총질을 하고 대전차화기를 갈기면 그 어색함에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져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되레 칼을 간 것 같은 리얼리티에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고 이른바 ‘짤’로 퍼나르며 인터넷상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의 노력파다.
이설.
···이미 여러모로 유명하지만 직접 보니 무어라 설명을 달기 죄스러울 정도의 비주얼이다.
수없이 밀려드는 인터뷰, 출연 요청을 죄다 무시하며 침묵하던 이 천재가 처음으로 택한 게 『토크밴드』라는 건 차라리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유지아.
“······.”
손가락을 꼬물대며 눈치를 보는 소녀를 보며 한재령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건 대박이다.
안 그래도 베일에 싸여있던 막장계의 큰손이 이 소극적인 아가씨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시청률은 폭발할 거다. 폭발할 수밖에 없다.
볼 것도 없는 당첨복권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재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정신이면 곧장 콜을 외치며 달려들어야 하는 천금 같은 기회.
하지만 한재령은 되레 눈을 질끈 감으며 물러섰다.
“···우선 이현석 감독님과 얘기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예?”
“제가 섭외한 건 어디까지나 이현석 감독님뿐입니다. 이 정도면 특집을 편성해야 할 수준인데 이 감독님 의견 없이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혼자 이번 사태를 수습하려던 이현석이 이런 일을 의도했을 리가 없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본인에게 상황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게 도리다.
눈을 끔벅이던 유승훈 CP는 이내 유쾌하게 웃었다.
꽤 드문 일이었다.
“하하하! 아니,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이현석 피디는 사장님과 만나고 있거든요.”
“······?”
#
“······.”
나는 가만히 커피를 홀짝였다.
눈앞의 상대도 조용히 커피를 들이켰다. 세월이 묻은 이맛살이 온화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보인다.
···꽤 좋은 커피일 텐데 도통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영 불편한 침묵이 흐르던 와중 안기식 사장이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다. 이번 건 대책으로 『토크밴드』에 나가신다고요?”
“···예, 사장님.”
“정면돌파라.”
다시 한 모금.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에 일일이 붙이는 존댓말.
적잖이 불편하다.
“저도 예전에는 메가폰 몇 번 잡아봤는데, 혹 아십니까?”
“예,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메가폰 몇 번이라니 참으로 겸손하신 표현이다.
그 서수현 작가조차 자기 인생 최고의 파트너로 눈앞의 사장님을 꼽고 있는데도.
“저는 그 경험을 거치며 모든 이야기는 한마디로 요약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안기식 사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한마디가 단순하고 선명하면서도 명쾌하게 정리되어야만 좋은 극이라고 말이죠.”
“······.”
“하지만 이현석 피디의 작품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더군요.”
···돌려 까려고 부른 건가?
그럼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다. 토크밴드에서 어떤 대사를 칠지 궁리해야 하니까.
아니, 지금 들으면서 궁리해도 상관없지 않나? 적당히 고개나 숙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자세를 유지하면 될 거 같은데.
“일단 예능국에는 제가 『연극처럼 살다』 특집편성을 넣으라고 일러뒀습니다.”
“예?”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안기식 사장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다.
“이 피디 의견을 무시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감히 이 피디를 위한 일이라 말하겠습니다.”
“아뇨, 그······.”
“나는 ‘누구누구 사단’이란 표현을 그리 안 좋아합니다만 그게 이 바닥에서 무엇보다 도움이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소문대로 사람 말을 어지간히 안 듣는구만, 이 사장님.
“그리고 극 자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만··· 오늘은 그만두기로 합시다.”
“······?”
안기식 사장이 깍지를 끼고 거기에 턱을 내려놓았다.
잠시 말을 고르는 모양새다.
“이 피디가 이해할진 모르겠는데, 사람이 나이를 먹고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 나름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예.”
그야 그러시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안기식 사장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제가 보기에 이 피디는 지금 만족하지를 못한 표정이에요.”
유심히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마치 내 속내를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이다.
“제가 그런 표정을 몇 번 봐와서 잘 압니다. 뭔가가 부족하다는, 뭔가 더 해야 한다는, 그런 얼굴.”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내가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안기식 사장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얼마가 필요합니까?”
“······예?”
“어느 정도의 예산과 인력이 있으면 이 피디 마음대로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