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294)
막장드라마의 제왕 294화
34장 드라마의 제왕(3)
최근, 이현석은 신변정리를 하고 있는 인상이 짙었다.
KDS의 강영철 대표, 그간 드라마에 출연했던 주조연 배우와 스태프들, 『연예투데이』의 강성재며 KBC의 안기식 사장 등 그는 그간 신세를 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예를 표했다.
신세를 진 차이는 있어도 직위와 나이에 따른 경중은 없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어이쿠, 뭘요. 이제 미국 가시는 겁니까?”
“…뭐,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잘 풀리실 겁니다!”
많은 이들은 국내에서의 커리어가 힘들어진 상황에서 이현석이 본격적인 미국 진출을 결심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이곳저곳에서 앞다투어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 꽤나 자연스런 추측이기도 했다.
이현석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어느 쪽입니까? 웹플릭스에 남으시는 겁니까? 아님 할리우드?”
“하하.”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대체 어느 쪽 끈을 잡았는지였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현석은 웃으며 말을 아꼈다.
이에 측근인 정민재는 종종 불퉁한 심정을 드러내곤 했다.
“저한테도 말씀 안 해주시깁니까, 형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직 『서풍』 끝나지도 않았다, 자식아. 일이나 해.”
“쳇.”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심은 아니었다. 『서풍』은 반환점을 돌았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었고, 남은 여유도 충분했다.
정민재는 그 사이에 어떻게든 사실을 알아내고 꼽사리를 낄 생각으로 만만했다.
“어… 그거 콘팁니까?”
“오냐. 미리미리 써둘 생각이다.”
“이 바쁘신 와중에 부지런도 하십니다.”
이현석은 그렇게 바쁜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서풍』의 완결까지의 콘티를 미리 작성하기도 했다. 정민재가 절로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의 근면함이었다.
콘티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현석이 인사를 다닐 곳도 점점 줄어만 갔다. 끝내 완성된 것은 몇 주가 지나 이현석이 얼추 인사를 끝냈을 무렵이었다.
이현석은 재차 한 주를 들여 그걸 몇 번이고 꼼꼼하게 살핀 뒤 건넸다.
“확인해 주십시오, 곽 감독님.”
“알겠습니다.”
“민재 너도.”
둘은 콘티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곽태영 감독도, 정민재도 그리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뭐, 사실 필요한지는 모르겠군요. 서로 논의하면서 하면 될 것을.”
“맞습니다. 어차피 형님 머릿속에 다 있으실 거 아닙니까?”
제작자들이 하는 말로서는 낙제점이었다. 하지만 뭐, 최근의 상황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서풍』이 연말의 상들을 싹쓸이한 이후 둘은 노골적으로 풀어져 있었다.
순풍을 넘어선 광풍.
현재 『서풍』의 기세를 표현하기엔 그런 말조차도 부족했으며, 자연히 이현석에 대한 신뢰도 확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이설과 이도나의 복귀는 소식이 없었지만 둘은 그렇다 해도 이현석이 어떻게든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현석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가능하면 저 없이도 곽 감독님께서 민재 녀석과 함께 맡아주실 정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곽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또 외국에 나가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하지만 필요할 날이 있을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곽태영은 뭘 그렇게까지, 하는 얼굴이었지만 본래가 진지한 성격이었다. 이내 “뭐든 확실한 게 좋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재 역시 따라서 수긍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다행이군요.”
이현석은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한시름 놓은 듯한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이도나 씨 쪽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예, 뭐.”
곽태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집사람도 고전 중인 모양입니다.”
“유감이군요… 뭐, 원흉이 사라지면 괜찮아지겠지요.”
“네?”
“아닙니다. 지아는요?”
“그… 오늘은 이설 씨 병문안을 다녀온다고 하더군요.”
곽태영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곧 잊어버렸다.
최근 틀어박혀 있던 유지아가 복귀를 신고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현석과는 타이밍이 줄곧 엇갈리고 있었다.
사실 피해 다니는 듯한 인상도 받았으나 곽태영은 곧 그런 생각을 지워 없앴다.
‘그토록 따르던 이 감독님을 일부러 피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저 운이 나쁜 것이리라.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합니다.”
“내일이라… 한 번쯤은 제대로 다시 얘기하고 싶었는데요.”
뭐, 이걸로 됐는지도- 이현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 기묘한 태도에 곽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신경이 쓰이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저, 내일은 제가 여기에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현석이 고개를 돌렸다.
“민재야. 내 자리에 편지 한 통 넣어둘 테니 내일 지아한테 전해줘라.”
“예? 요즘 세상에요? 그냥 전화로 하시죠.”
“까라면 까, 자식아. 몇 통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주인들 찾아주고.”
“예…….”
정민재는 불퉁한 얼굴로 수긍했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현석은 한동안 정민재를 붙잡고 뻔한 잔소리들을 이어갔다.
정민재는 후회를 곱씹으며 그걸 듣고 있었다. 최근 들어 제법 흔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이했다. 계속 이어지던 말이 어느샌가 뚝 끊겼던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게… 없는 것 같구만.”
“…형님?”
“음, 없어.”
이현석은 어쩐지 한동안 빈 책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 잔소리도 다 했으니 저는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벌써 말입니까?”
“검사 결과에 어머니가 아직도 놀라신 것 같아서요. 가능한 만큼은 같이 있어 드리려고 합니다.”
“아…….”
곽태영도 자연히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정민재도 대수롭잖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하고 짧게 배웅했다.
이현석은 나가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예? 예…….”
생뚱맞게 뭔 인사람?
곽태영과 정민재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이현석은 그걸로 끝이라는 듯 재차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한 뒤 하던 일로 돌아갔다.
* * *
연말, 사방이 소란스럽고 이현석이 바삐 움직이던 와중에도 이도나는 계속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사이 이모는 매일같이 오다니며 문을 두드렸고, 꺼져 있는 휴대전화의 소리샘에도 매번 새 메시지를 남겼다.
“도나야, 뉴스 봤니? 이 피디님 관련으로 난리 났더라.”
“다른 건 몰라도 대단한 상 준다는데 미국은 갔어야 하는 거 아니니? 대리수상이 나온 역사가 없다고 다들 야단이더라.”
“도나야, 좀……!”
생전 처음 겪는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조카는 당하면 몇 배로 되갚을 방법을 고민했지 지금처럼 틀어박힌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게 지금처럼 끈기 있게 접근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되레 역효과를 낳았다.
“…나 없이도 괜찮은 거구나.”
“뭐?”
“나는 그 사람과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으로 받고 있을 뿐이었어. 민폐만 끼치고.”
“도나야, 그렇지 않아. 일단 이 문부터 열고……!”
그것이 최근 몇 주간 이모가 조카와 주고받은 유일한 대화였다.
이모는 생각 끝에 박진태와 홍지호, 심지어는 이현석마저 데려가 대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응답은 없었다. 이도나는 요지부동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끝내 집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파파라치들조차 질린 듯 떠나버렸다. 정치권에서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며 더 이상 방구석에 틀어박힌 사람만 쫓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도나 관련 소문이 시들해진 건 이현석이 활약한 탓이 컸지만 이런 실질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일이 이쯤 되자 이모는 그간 자신이 주선한답시고 여기저기 끼어들었던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주책이라더니……!’
문제의 원인인 이설은 여전히 퇴원했다는 이야기조차 없었다. 원망을 품을 곳조차 마땅치 않은 셈이었다.
자연스레 이어지거나 깨질 남녀 사이를 억지로 붙여놓은 게 원인이었나 싶어 그녀는 탄식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계속 이렇게 둘 수는 없어.’
어느 날 그녀는 결심을 내렸다. 소속사의 박진태 대표와 매니저와 함께 열쇠 수리공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여는 걸 제안한 것이었다.
“글쎄요…….”
박진태는 썩 묘수라고 여기는 태도는 아니었다.
“법적으로 이재숙 씨는 부모가 아닙니다. 이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시지요?”
“알아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질게요.”
“이런 건 진다고 지어지는 책임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박진태는 입맛을 다셨으나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데에는 그 역시 동감이었다. 틀어박힌 기간을 따져보면 당장 안에 먹거리가 제대로 남아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결정은 늦었지만 행동은 신속했다.
하루 뒤, 소리샘을 남기고 문을 두드려 반응이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곧장 열쇠공을 불러 문을 땄다.
“도나야!”
문이 열리고, 다른 이들이 물러나 있는 사이 먼저 이모 이재숙이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조카를 찾지 못했다. 서로 마주 보던 박진태와 매니저가 뛰어들어 방들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집 안에 틀어박혔던 사람은 어디론가 증발해선 간 곳이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멍하니 시선을 교환하던 중 박진태가 허둥지둥 외쳤다.
“없어진 거 있습니까, 혹시?!”
혹 강도사건이나 납치가 아닐까 의심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 추측은 곧 부정되었다.
“아뇨, 자기 발로 나간 것 같아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다만…….”
“다만?”
이모는 입만 달싹일 뿐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부사장님.”
“왜.”
박진태가 답답한 표정을 짓던 와중 매니저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싱크대 한쪽을 가리켰다.
“그… 제가 착각한 거일 수도 있겠는데요. 저기, 칼 걸려 있지 않았습니까? 접이식 식칼요.”
칼.
박진태는 눈을 끔벅였다. 매니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봤는데… 없어서요. 이설 씨 구급차로 옮길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는데.”
“…….”
“그사이 쓰레기 치운 적도 없고, 이래서는 가지고 나갔다는 것밖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 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