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3)
003 –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2)
“너무한 거 아니세요, 감독님?”
“뭐가.”
이설은 표정을 약간 일그러뜨려서 제법 그럴듯한 울상을 지었다.
“문자 답장도 안 주시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그렇게 모르는 척 무시하고 나가시려고 하시는 지금 행동이요.”
“일단 네가 말하는 감독이라는 사람을 모르겠는데.”
“저런, 그렇게 자기부정을 하고 싶을 정도로 힘드셨는 줄은 몰랐어요. 제게 상담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서 짐짓 눈물을 닦는 연기를 하는데 쌩쇼를 하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여러 모로 타고난 녀석이었다.
한숨을 내쉴 도리밖에 없었다.
“됐으니까 나가자.”
“진작에 그러셨어야죠.”
이설은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생글거리며 얼른 앞장섰다. 나도 뒤이어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거진 수십 명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안 오냐?”
“···가, 가야죠! 넵! 가야죠!”
넋을 놓고 있던 처남이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양 헐레벌떡 달려와 합류했다. 저만치 앞에 서서 걷던 이설이 돌아보았다. 작게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이다.
“어, 누구시죠······?”
“내 처남.”
“······.”
한 몇 초간.
이설은 잠깐 신기할 정도로 무표정해졌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굳어있는 처남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이설의 얼굴에는 방송 화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트레이드마크인 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반갑습니다. 배우 이설이에요.”
“아, 예, 옙!”
처남은 이설이 내민 손을 대통령을 대하는 것 같은 정중한 태도로 – 그러니까 부들부들 떨었다는 뜻이다 – 고개를 숙여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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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개업한 순대국집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분리된 룸까진 아니라도 칸막이가 있어 적어도 불특정 다수의 시선은 피할 수 있었다. 찬을 들고 오는 종업원의 눈길이 흘끔거렸지만 그것까지 어쩔 수야 없는 노릇이고.
처남은 천하의 이설을 이런 곳에 데려와도 되는 건지 열심히 눈치를 보다가 그녀의 반응이 태연하자 비로소 안도한 모양새였다.
녀석은 내 옆에 앉은 채 맞은편의 이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성질을 냈다.
“매형, 왜 제게 말씀 안 해주셨습니까?”
“뭘.”
“뭐겠습니까?!”
더럽게 귀찮았다.
“말했잖아. 예전에 방송국 PD일 하다가 드라마 한 편 말아먹고 때려쳤다고.”
“이설 씨랑 아는 사이라고는 한 마디도 안 하셨잖아요?”
“그 드라마 한 편 같이 찍은 게 단데 뭐.”
순간 이설이 끼어들었다.
“그냥 드라마 한 편이 아니죠. 그게 제 데뷔작이었는걸요.”
처남은 이설이 듣고 있었다는 데 일단 화들짝 놀랐다가 이어 그 내용에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구일지 속 보석함’이요? 설마 그게 매형 작품이었습니까?”
“네, 맞아요.”
“명작이잖습니까?! 지금도 가끔 얘기 나오는데!”
그리고는 짐짓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돌아본다.
“뭐라고요? 듣보잡 드라마 하나 찍고 쫒겨났다고? 까맣게 속을 뻔했네.”
“듣보잡 드라마 맞아.”
내가 말했다.
“당시에 그거 시청률 얼마 나왔는지 아냐?”
“어, 그건······.”
처남이 버벅거린다. 피식 웃어주었다.
“평균시청률 3.8, 최대시청률 4.7퍼. 애국가 시청률급. 이게 듣보잡이 아니라고?”
“그··· 당시 경쟁작들이 워낙에 쟁쟁했잖습니까. 몸값 수억 하는 배우들이었고··· 그래도 연구일지는 종영하고 나서 명작으로 재평가됐잖아요.”
“내가 쫓겨나고 나서 재평가되면 뭐하냐.”
“······.”
처남은 말이 궁해졌는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설 쪽을 봤다. 순대국씩이나 먹으면서 입을 작게 오물거리며 우아하게 숟가락을 뜨는 스킬이 참 어지간했다. 예전엔 꽤나 복스럽게 먹는 이미지였던 것 같은데.
하기야 그것도 오래 전 신인 시절 얘기다. 지금은 무려 탑 여배우시니, 10년이란 세월이 참 길긴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넌 대체 나 같은 놈한테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자꾸 연락이냐?”
“같은 놈이 뭐예요. 감독님 아니었으면 전 연기 데뷔도 못했을 텐데.”
“우연히 송곳을 주머니에 처음 넣은 게 나였던 거지 다른 주머니라고 안 뚫렸겠냐.”
이설이 눈을 들어 내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 십여 초간 시선이 교차했을까, 이설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들깨가루를 원수 들린 마냥 팍팍 치기 시작했다. 상당량이 국그릇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딱히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 일도 없는데 찾아와?”
“아무 일도 없으면 찾아오면 안 되나요?”
“······.”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자 이설이 조금 움찔거렸다.
“그래, 먹기나 하자.”
내가 수저를 들자 이설도 입을 다문 채 숟가락을 들었다. 처남도 얼른 따라했다.
대화가 끊겼다. 조용히 식사가 이어졌다.
이설이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는 기척이 느껴졌다. 짐짓 모른 척 했다. 경험상 이렇게 하면 이설은 먼저 져주었다. 마누라한테 해봤더니 나를 후려쳤지만.
하지만 10년이 지나선지 이설도 조금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저기, 감독님. 원래 말하려던 게 있었는데요.”
“그럼 말해.”
“그게··· 좀 말씀드리기가 힘들어서.”
“그럼 나중에 맘 내키면 하고.”
“······.”
이설에게서 불퉁한 기색이 만연해졌다.
하지만 그 불합리함은 그동안 실컷 마누라의 답정너에 휘둘려온 내 철벽을 뚫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도리어 그 멍하던 애도 나이 먹으면 똑같구나 하는 슬픈 깨달음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어째선지 처남이 자기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잡긴 했지만······.
“뭔지는 몰라도 그거 외에 할 얘기 없으면 밥이나 먹자.”
“···네.”
토라진 얼굴로 국밥을 우겨넣던 이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툭 내뱉었다.
“아, 하나 생각났어요.”
“뭔데?
“저 이만 은퇴할까 생각중이에요.”
“그래?”
“네.”
“그렇군.”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약 3초 뒤, 처남이 사레가 들려 컥컥댔다. 눈을 홉뜨고 가슴을 치는 꼬라지에 나는 혀를 쯧 차고는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이 값좀 해라, 자식아. 너도 이제 서른 넘었어. 언제까지 애 노릇이냐.”
“아니, 지금은 누구라도 같은 반응이었을걸요?”
내가 핀잔을 주자 처남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이설에게 돌렸다.
“아니, 대체 왜요? 지금 이설 씨 엄청 잘나가잖아요.”
“그냥요.”
“아니, 그냥이라니······.”
이설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별 수 없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처남의 무릎을 툭 쳤다.
녀석은 물론 알아챘겠지만 짐짓 모른 체 하며 뻐팅기고 앉아 있었다. 결국 눈치를 주던 내가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 나서야 울상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 그럼 말씀들 나누십시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녀석은 미련 섞인 눈으로 이설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섰다.
조신하게 움직이던 이설의 숟가락이 멈췄다.
가만히 문 쪽을 향하는 시선. 가만히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나 싶더니 다시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냠냠, 쩝쩝, 우걱우걱.
아직 처남이 남아있었다면 심히 깬다는 표정을 지었을 맹렬한 식사태도였다.
최대한 좋게 표현해도 복스럽다 정도겠지. 처음 만났던 시절과 눈곱만큼도 변함이 없었다.
방금 전 그녀의 발전에 내심 감탄했던 입장에선 기가 찼다.
“내숭이었냐?”
“떨어야 돼요.”
이설이 볼을 다람쥐처럼 부풀린 채 우물거리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재주도 좋다 싶었다.
“원래는 이런 국밥도 먹으면 안 되거든요. 먹을 때는 둘째 치고 먹고 난 뒤가 더 문제니까요. 이 사이에 낀다던가. 냄새라던가.”
“하긴.”
“이렇게 맘대로 먹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굳이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설은 국물 한 방울까지 맹렬하게 긁어먹고 나서야 그릇을 내려놓았다.
배를 문지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분위기로 얼추 만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다 먹었으면 아까 하던 얘기나 해봐.”
“아까 하던 얘기요······?”
이설은 국밥을 먹으며 제 정신머리까지 집어삼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 번째···는 말하기 싫다고 했고 두 번째.”
“······.”
“지쳤냐?”
“···아뇨, 딱히 지친 건 아니고요. 그냥.”
“그냥?”
“그냥, 더 할 이유를 못 찾겠어서요.”
나는 웃었다.
“돈 벌리면 됐지.”
“돈, 저 충분히 있어요.”
“그야 그렇겠지.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기사 몇 번 봤다.”
“일등 신붓감이죠?”
“글쎄다. 많아도 적당히 많아야지. 어지간한 남자면 쫄려서 제풀에 포기하지 않겠냐.”
“······.”
“뭐, 됐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내가 너한테 이러니저러니 말할 계제도 아니고, 네가 어련히 생각해서 했겠지.”
“먼저 나가마. 마저 먹고 적당히 집에 가. 다음부턴 누구라도 하나 데리고 나돌아다녀라, 하여간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고······.”
“감독님.”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이설이 붙잡았다.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짜내듯이 입을 열었다.
“드라마··· 한 편 만들어주실 생각 없나요? 절 주연으로요.”
“···아니, 조연이라도 괜찮아요. 그냥······.”
이설이 말을 삼켰다.
음, 내가 얼굴에 띄우고 있는 ‘이건 또 뭔 개소리야’의 농도가 충분했으면 좋겠다.
“뭐 잘못 먹었냐? 내가 방송국 나온게 대체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난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저 돈 많아요. 막 갖다 쓰셔도 돼요. 어지간한 건 다 돈으로 커버되잖아요.”
“아니, 차라리 영화면 모를까 드라마는 일단 방송국에서······.”
잠시 말을 끊었다. 설마 이설이 그걸 모르겠냐는 생각이 첫째 이유였고 이설이 가진 무지막지한 돈과 인맥이면 정말 어지간한 건 다 커버될 거라는 게 둘째였다.
“은퇴하기 전에, 제 마지막 작품만큼은 감독님이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뭐, 정말로 10년이 지났는데 눈앞의 꼬맹이가 눈곱만큼도 자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한숨 쉴 일이 참 많았다.
물을 한 잔 따라 들이켰다. 기분 탓인지 미지근해진 냉수가 그렇게나 찝찝할 수 없었다.
“야, 설아.”
“네.”
“다른 사람한텐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라.”
“···왜요?”
“네가 돈 많고 성공했다고 그 사람 인생 개무시하는 걸로 들릴 테니까.”
이설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니에요! 전 절대 그런 의도가······!”
“그래, 그런 의도 아닌 거 나도 알아. 널 아는데. 근데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들릴 거라고.”
이설은 빨개진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나는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잠시 침묵이 드리운 사이 최대한 온화한 쪽으로 말을 골랐다.
“뭐, 그래. 너한테 있어서는 내가 좀 뭐한 기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네 데뷔작 찍어준 PD가 안 좋게 쫓겨나고, 이러고 사니까 안타깝기도 하고 목에 가시 같기도 하고 그럴 수 있지.”
“그런 건······.”
이설이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길게 잇지는 못했다.
“근데 설아. 야, 10년이다. 네가 톱스타가 된 사이에 나도 이쪽 사회에 적응하고, 승진도 하고, 결혼도 하고, 뭐 그랬단 말이야.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내 10년은 뭐가 되며, 그쪽에서 10년을 목숨 걸고 뛰었던 다른 PD들은 뭐가 되겠냐.”
이설은 말이 없었다.
원래 똑똑한 녀석이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듣겠지.
나는 외투를 걸쳤다.
“그래도 뭐, 생각해준건 고맙다. 마누라보다 네가 낫구만.”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없어.”
“조금도요?”
“내가 죽거나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 한, 오냐.”
나는 나서려고 칸막이를 열었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그리고 돈 얘기 그렇게 아무한테나 함부로 꺼내지 마라. 그러다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큰일 나는 수가 있어.”
툭.
내가 음식점을 나오는 순간 장면이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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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제3자로 보는 희한한 경험에 몰입해 있던 나는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김철 선배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상한데.]“뭐가 말입니까? 평범한데.”
[존나게 이상하지, 망할 놈아. 이것만 보면 네가 굉장히 멀쩡한 어른으로 보이니까.]“멀쩡한 어른이니까요.”
[네놈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 안에서는 말이야.]김철 선배가 이죽거렸다.
[그래서, 저기선 저렇게 멋지게 딱 자른 놈이 나를 보며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저 죽었잖습니까.”
[···그렇지.]“죽었으니 조건 충족된 거잖아요.”
[······.]선배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거장은 소시민의 마음을 모른다.
[···내가 이상한 거냐?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