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302)
막장드라마의 제왕 302화
서예린은 비교적 실용주의자에 속했다.
부모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는 고모 서수현이나 만만찮은 재력가이긴 하지만 그걸 허투루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요 파트너인 이현석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둘이 회의를 할 때면 사치스러워 본 적이 드물었다.
방송국 회의실, 제작센터 휴게실, 싸구려 카페- 필요하다면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까지. 간혹 고모 서수현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서예린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호텔에 딸린 한 고급스러운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서예린이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그쪽이 지아 숙모님이시라고요?”
“아이고, 그럼요!”
최숙기라는 이름의 여자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 건방진 녀석 숙모라는 게 종종 끔찍하긴 하지만!”
“…….”
“아세요? 저번에 찾아갔는데 이 버릇없는 녀석이 세상에 문전박대를 하더라고요! 부모 없이 자란 티를 내려는지 버릇이 없어놔서……!”
손짓과 발짓을 동원하며 과장되게 말을 이어간다. 그런 여자를 서예린은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숙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아, 이 피디님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더랬다. 분명히…….
“하여간에 자기도 이제야 주제를 알고 틀어박혔으니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인간쓰레기라고 했었지.
서예린이 턱을 괴었다.
“좀 장황하네요.”
“어… 네?”
“용건이 뭐죠, 그래서?”
“그야…….”
눈이 굴러가는 게 보였다.
새파란 젊은이한테 무시를 당하고 불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내리누르는 모습이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진한 욕망이 드러났다.
참으로 알기 쉬웠다.
“그, 작가님께서 그 녀석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시다고 들어서 말이지요.”
“…무슨 근거로?”
“그야, 그. 유명하지 않았나요? 얼마 전에 그거.”
천박하게 웃으며 눈치를 맞춘다. 서예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에 머리채 한 번 잡은 것 가지고 두고두고 고생한단 말이지. 내가 그간 걔한테 당한 게 얼만데.
“그래서요?”
“왜, 저희가 작가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 녀석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고 있거든요- 최숙기는 천박한 웃음을 띠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에야 착한 척 이미지메이킹 하고 다니지만 웃기는 소리, 싸움은 몇 번을 했고 학교는 몇 번을 안 나갔는데요. 돈을 훔친 적도 있었고!”
“…….”
글쎄, 싸운 건 대개 당한 걸 돌려준 것이고, 학교를 빠진 건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빠듯했으니 도리가 없었던 경우였다.
돈을 훔쳤다는 건 아마 상대가 중학생인 걸 알고 아르바이트비를 떼어먹으려던 점주가 신고한 내용을 그대로 읊어대는 거겠지.
하지만 뭐, 지금 대중들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을 것이다.
간신히 자숙에 들어간 효과가 나오고 있는 지아에게 이런 의혹이 불거진다면 그야말로 치명상이 되리라.
손바닥을 비비는 최숙기는 득의양양했다. 서예린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신감이 훤히 보였다. 이걸 ‘팔아먹을’ 상대를 두고 참으로 신중하게 고민했으리라.
끝내 서예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포기한 듯한 얼굴이었다.
거래 성사로 판단한 최숙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가는요?”
“에이, 많은 건 안 바라지요! 그냥 좋은 관계랑, 약간의 보수만 주시면…….”
“뭐, 증거는 이 정도면 됐겠고.”
“…네? 아아악!”
서예린은 입도 대지 않은 뜨거운 커피를 들어 안면에 뿌렸다. 최숙기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테이블을 걷어차 의자와 같이 쓰러뜨렸다. 굉음이 나며 깜짝 놀란 주변의 시선이 쏟아졌다.
“뭐 하는 거야……!”
넘어진 사람이 악을 쓰는 사이 또각또각 걸어간 서예린은 기꺼이 추가로 주문한 오렌지 주스로 달아오른 안면을 식혀주는 친절까지 발휘했다.
주위가 얼이 빠진 사이 서예린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재밌네, 이거. 유행하는 이유가 있구나.”
외전 04. 서예린 론도
“물들었어, 물들었다고…….”
고모, 서수현 작가가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현석이 그놈 같은 미치광이랑 붙여놓는 게 아니었는데…….”
“진짜 재밌었다니까? 고모도 해봐.”
“퍽이나 하겠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회장님, 사모님처럼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녹음으로 최숙기의 입이야 막아놓긴 했지만 주위의 증언은 완전히 별개였던 것이다. 소문은 스멀스멀 퍼져나가 기사가 나올 기미조차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 고모에게 있어서는 실로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어쩌기는.”
서예린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쪽도 대놓고는 못 떠들 테고, 좀 시끄러워진다고 별일이나 있겠어? 그간 있던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고.”
“…….”
서수현은 침묵했다. 따지자면 본인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별일이 없을 게 사실이기도 했던 까닭이었다.
그 정도로 최근 서예린의 입지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최근 『서풍』이 우여곡절을 넘기고 분할 2시즌을 개시하게 된 영향이 컸다. 유지아가 하차했으므로 메인 자리는 온전히 서예린이 메우게 되었고, 응당히 이현석의 파트너로서의 평가도 이쪽에 몰렸다.
아직 종영은 한참 멀었는데도 각지에서 날아오는 제안서는 얼마나 쌓이는지 뒤적거릴 엄두조차 안 날 정도였다.
“으음.”
서예린이 이렇게 나오자 서수현도 뾰족한 말을 돌려주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신과 비교되며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던 조카를 알던 입장이다. 아무래도 이 태연자약한 모습에서 느끼는 바가 없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지금 저리도 호쾌하게 행동하는 건 조금 다른 이유에서겠지만.’
어쨌거나 어찌할 도리는 없는 셈이었다.
“오지랖도 넓다.”
결국 서수현은 볼멘소리 한 마디만 보탰을 따름이었다.
“유지아 그 녀석이 알아주기나 한다던?”
“뭐, 그 아이는 참석 못 하니까… 그 메우기 같은 거지.”
“…참가 못 하는 게 낫잖냐, 그런 건.”
“글쎄.”
탁자 위의 하얀 편지봉투를 집어 든 서예린이 작게 웃었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잖아?”
“…….”
“일찍 잘게. 이번 주는 많이 바쁠 것 같아서.”
2.
“큰일 났습니다, 작가님!”
다음 날, 제작센터에 출근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온 스태프에게 서예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럴 줄 알긴 했지만.
“뭔가요, 또?”
“드미트리 놈이 이대로는 차마 못 하겠답니다! 저런 고증이 말이 되냐고 난립니다!”
“…이 피디님이 알아듣게 설명하신 거 아니었어요?”
“어제부터 휴가시잖습니까.”
“아…….”
서예린은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는 거군.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이현석을 보고 온 데다 그 인상도 인상이니만큼 평소의 『서풍』 제작진들은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적이 없었다. 이현석은 참으로 ‘부드럽게’ 주위를 설득할 힘을 갖추고 있었다.
…바꿔 말해, 이현석이 자리를 비운 이상 모든 게 삐걱거리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가보죠.”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맥없는 투로 말했다.
사정은 단순하면서도 귀찮았다.
“오, 돌계단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곳에 있는 건 나무 계단이란 말입니다!”
“그래요…….”
“돌계단이라니……!”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참으로 ‘너드’스러운 이 러시아인을 달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예린으로서도 온전히 설득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뭐, 나중 일은 돌아온 이현석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겠는가.
“고생하셨습니다.”
곽태영 총괄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서예린과는 띠동갑이 넘는 차이가 나는 이 감독님은 항상 그녀에게 정중하게 예우를 갖추곤 했다.
성격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 의지하고 있기도 했던 까닭이었다.
“그… 평소답지 않게 좀 날카로우셨던 게 아닌가 싶지만.”
“네?”
“아뇨, 아닙니다.”
곽태영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저도 적은 경력은 아닙니다만… 이 기획은 너무 괴짜들이 많군요.”
“애초에 그런 사람들만 모아온 모양이니 말이죠.”
“휴우…….”
일찍이 이현석은 작가진의 사이즈를 키우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여기에 웹플릭스의 존 테일러는 한술 더 떠서 온갖 기인들을 끌어들였다.
…죄다 능력들은 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고개를 저은 서예린이 물었다.
“오늘 촬영은요?”
“뭐, 이 감독님과 도나 씨 안 계신데 진행이나 되겠습니까? 편집실에서 러프나 가다듬어보려고 합니다.”
“좋네요. 가능하면 저도 같이-”
“아뇨, 그것이…….”
곽태영이 말을 끌었다.
서예린은 슬그머니 불안감을 느꼈다.
“또 뭐죠?”
“드미트리 작가가 저렇게 된 건 부추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시.”
“예, 기존 기획 1팀입니다.”
곽태영이 조심스레 눈치를 보았다.
“저로서는 가능하면 그쪽을 달래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또인가요.”
서예린은 재차 양쪽의 빈자리를 실감하며 길게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지아가 자숙에 들어간 후 그녀가 담당하던 기획 1팀은 서예린 팀장에게 귀속되었다. 그간의 라이벌 상사(?)의 밑에 들어간다는 데 1팀이 격렬하게 항의했던 건 물론이었다.
“오,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운 의견을 추구합니다! 서 팀장께서는 우리와 맞지 않으신 분입니다!”
“호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아뇨, 그… 그러니까.”
“제대로 말씀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어서요.”
물론 인상을 팍 쓴 이현석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조금 얌전히 있나 했더니 이현석이 장기 휴가를 얻은 틈을 타 일을 터뜨린 모양이었다.
“쉽지 않겠는데…….”
어쨌거나 자신의 담당이 되었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예린은 살짝 암담한 심정으로 1팀 회의실 쪽으로 향했다. 어지간한 장기전쯤은 감내할 각오였다.
다행히도 난항은 아니었다. 퉁명스러웠던 1팀 멤버들은 서예린이 달래기 시작하자 이내 불만에 찬 본심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째서 전차를 쓰지 않으시는 겁니까……!”
“…회의에서 다 끝난 얘기로 알고 있는데요.”
“제기랄, 저희도 문제가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차입니다! 탱크라고요! 이건 무리할 가치가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진심으로 이 사람들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 씬에 탱크가 난입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지아는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좋아요, 제가 안 되는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드리죠.”
서예린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날카롭게 갈았다. 최근에는 비교적 관대해졌다고는 하나 『연극처럼』 시절부터 이어진 성격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약 삼십 분 후, 그녀의 사정없는 논리에 1팀의 대부분은 시무룩해져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제 두 번 다시 탱크 얘기는 꺼내지 않으시는 걸로 알게요.”
“……예.”
“좋아요.”
서예린은 한 건 해냈구나 싶어 몰래 식은땀을 닦았다. 누군가가 어째 평소의 세 배는 무서운데, 하고 중얼거렸다가 싸늘한 눈빛에 어깨를 움츠렸다.
박수를 쳐 주목을 모았다.
“뭐, 유지아 작가님이 부재하셔서 여러분이 동요하는 건 이해합니다.”
“…….”
“하지만 드미트리 작가님까지 부추긴 건 너무하지 않았나요?”
“…예?”
“그러니까, 불만이 있으시면 저에게 직접 말하실 일이지 남을 부추기는 건…….”
서예린이 말을 끊었다. 1팀 전부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까닭이었다.
아뇨, 하고 한 명이 조심조심 손을 들었다.
“저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네?”
“아마 다른 곳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아, 최근 미술팀 쪽이 동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그쪽에 여쭤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예린은 미술팀 쪽으로 향했다.
그쪽도 그쪽 나름의 고충이 있어 이야기는 길어졌으나 결국 해결되었다. 드미트리 작가를 부추긴 것도 그쪽이 맞았다.
하지만.
“사실 드미트리 작가를 부추긴 이를 부추긴 원흉이 달리 있습니다! 아마 음향팀이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리고 저, 오늘은 기분이 좀 안 좋으신 겁니까?”
어쩐지 익숙한 전개인데, 하고 서예린은 생각했다.
3.
이를테면 그런 게 있다.
게임에서 다른 대륙으로 가는 배를 타려는데 그 배를 타는 데는 특별한 표가 필요하고, 그 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신 자신의 강아지를 찾아줬으면 하고, 그 강아지는 불타는 적벽으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적벽의 수문장은 출입 허가를 위해 특별한 증표를 구해오라는…….
‘그냥 표를 팔면 어디가 덧나나?’
하루는 끔찍하게 길었다.
슬슬 해가 저물 무렵, 서예린은 무려 일곱 개의 부서를 돌아다닌 끝에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알아낸 진상이라고 할까, 원흉도 어지간히 허망한 것이었다.
‘결국 외부인이 온종일 죽을상을 하고 있는 통에 같이 우울해져서 불평이 생겼다는 얘기잖아!’
서예린은 성큼성큼 걸었다.
무척이나 피곤했다. 하지만 휴게실에 있다는 그 외부인을 어떻게든 잡아 족칠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현재의 짜증을 모조리 부딪쳐 버릴 작정이었다.
“……?”
하지만 실제로 그 외부인을 발견한 서예린은 멍하니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의외인 인물이었던 까닭이었다.
“…강아라 씨?”
“아, 작가님.”
멍하니 앉아 있던 그룹 에어리즈의 막내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고개를 숙였다. 서예린과는 그럭저럭 인연이 없지는 않은 사이였다.
아무래도 그녀야말로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었던 모양이었다.
“저…….”
눈치를 보는 모습에 맥이 탁 풀린 서예린은 고개를 젓고는 옆에 앉았다. 하지만 어조는 절로 불퉁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하시는 거죠?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앉아 있으셨다면서요.”
“예? 예…….”
“애초에 외부인이신 건 차치하고,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이쪽 사람들도 좋은 기분은 안 된다는 거 모르겠어요?”
“죄, 죄송합니다.”
강아라가 어깨를 움츠렸다. 한참 어린 상대를 괴롭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서예린은 그나마의 기세도 전부 날아가고 말았다.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뭣 때문에 그래요? 여기까지 와서.”
“그건, 그…….”
강아라는 잠시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건-
재차 언성을 높이려던 서예린이 순간 입을 닫았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그제야 강아라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편지봉투를 발견했던 까닭이었다.
“…….”
그것은 서예린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초대장이었다.
그리고, 요 며칠 그녀가 감정적인 모습이 늘어났다는 평가를 듣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그냥, 이현석 대표님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서요.”
강아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오늘부터 휴가라고 하시더라고요.”
“…….”
“집에 가기도 뭐해서 여기에 앉아 있던 게 너무 오래됐나 봐요. 죄송해요.”
서예린은 침묵했다.
몇 번이고 보았던 봉투에는 보내는 이들의 이름과 내용이 쓰여 있었다. 눈을 돌릴 수도 없을 만치 크게.
강아라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냥… 좀 이상해서요.”
“…….”
“시간문제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좀 그렇더라고요.”
“…강아라 씨.”
“그야, 저는 대표님 좋아하긴 했거든요? 유미 언니랑 우리 그룹 살려주신 은인이기도 하고, 얼굴도 취향이고, 그렇게 가끔 생각은 했는데… 딱 거기까지였거든요.”
이도나와 사귄다는 이야기가 되었을 때도 그렇구나- 하고 아쉬워했을 뿐 별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까, 조금 그랬어요.”
“…그래요.”
“이럴 거였다면.”
중얼거리는 말에 살짝 감정이 맺혔다.
이럴 거였다면 제대로 전하기라도 해보는 게 나았을까-
“…….”
대개 깨닫고 후회를 할 때는 너무 늦어 있게 마련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서예린은 잠시 침묵을 지킨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노을은 금세 사라지고 하나둘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도 몇 번이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어어, 하고 머뭇거리던 사이 순식간에 끝나버린 상황을 원망하지 않은 적이 몇 날 밤이나 있었을까.
일을 터뜨린 이설과 유지아를 원망하는 한편 부러워하고 질시하던 기분이 과연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끝난 첫사랑을 떨쳐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이랄 것도 없는 문제였다.
서예린이 일어섰다.
어찌 됐든 직무적으로도 이러고 있는 원흉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통금, 없죠? 이제.”
“…네.”
“와요. 좋은 데서 맥주나 한잔하지요.”
“네?”
“얼른.”
머뭇거리는 강아라를 잡아끌었다.
기세가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생각했지만 곧 흘려 버렸다. 어쩔 수 없겠지.
고생스러운 하루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을 지우고 떠오른 별도 나쁘지는 않았다.
서예린 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