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303)
막장드라마의 제왕 303화
“…잘 주무시네요.”
침대가 있는 새하얀 공간.
그 안에서 이설이 빙긋 웃었다.
코를 잡아당기고, 귀를 잡아당기고, 눈꺼풀까지 뒤집어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철야를 했을 때 타트체리 주스를 건넨 게 꽤나 주효했던 것 같았다. 잘 몰랐다고 변명하기에도 괜찮은 방법이었고.
“후후.”
이설은 곤히 잠든 이현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능하다면 계속 이대로 있고픈 심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몇 개월을 오매불망 기다려온 때가 아니던가.
“…이제 와서 제가 끼어들 자격 따윈 없겠죠.”
이설이 중얼거렸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애써 정당화하듯 몇 번 고개를 주억인다.
“이 정도쯤은-”
그녀에게도 납득할 만한 무언가가 하나쯤은 필요했다…….
이설은 가만히 상체를 숙였다.
눈이 희미한 욕망으로 가득 찼다.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호흡이 뜨거워졌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축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손을 뻗고-
문득 침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드르륵 열렸다. 기다리다 반색한 이설이 고개를 돌렸다.
“해주세요, 얼른.”
“저……?”
커튼을 열고 들어온 간호사는 어째선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자 기증은 기증자분 동의서가 없으면 안 되고… 무엇보다 본인 의식이 있으셔야 하는데요.”
이설은 잠시 침묵했다.
“없으면 안 되나요?”
“네.”
“…절대로?”
“네.”
“…….”
“…….”
외전 05. 이설 프래그먼트
“넌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파리만 날리는 한 작은 카페.
그 안에서 강주연 매니저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번 일 수습하는 데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알아?! 정자? 인공수정? 무슨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막장드라마 같나요?”
“개막장이지! 시청률 50퍼센트는 나오겠다!”
이설은 고개를 숙였다. 좀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하고 중얼거리는 담당 배우의 모습에 강주연은 그냥 정신줄을 놓고 싶었다.
미쳤다 미쳤다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돌아버렸을 줄이야……!
한편 기함하는 매니저와 달리 카페 주인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일을 거기까지 꾸민 주제에 그만뒀다고?”
“…네.”
“아니, 그쯤 되면 덮치기라도 하지 않니, 보통?”
“언니?!”
강주연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과거의 우상에게 차마 욕지거리를 내뱉지는 못했다.
이설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범죄잖아요.”
“…이번에 한 건 범죄가 아니고?”
“그렇지는 않지만… 거기까지 가면 감독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테고…….”
“그래, 네 도덕관은 현석이 걔에 한해서는 이상한 쪽에서 멀쩡했었지.”
강주연이 이설의 표정에서 ‘죄책감’이란 감정을 발견하고 기절초풍하던 사이 카페 주인은 그저 머리만 짚었다. 이 답이 없는 중생을 어쩌나, 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묻는다.
“그래서, 잘 안 됐으니 이걸로 포기할 거니?”
정적이 흘렀다.
“……그럼요.”
세상에 이보다 더 설득력이 없는 ‘그럼요’가 있을까.
턱을 내리며 슬쩍 눈을 피하는 모습에 강주연은 이 세상 온갖 고민을 한데 농축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카페 주인 역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이현석이 식육목 곰과에 속하는 곰이라도 검진 도중 쿨쿨 잠이 든 괴상한 상황을 몇 번이나 납득하겠느냔 말이다.
한때 둘이 잘 되길 응원하고 있었기는 하지만 이미 끝난 얘기가 아니던가. 크건 작건 양쪽 모두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그녀로서는 골이 지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카페 주인은 한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래, 뭐. 의미 없는 왈가왈부는 안 할게.”
“네?!”
“이미 생각이야 굳은 모양이고… 네가 그걸로 납득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낫겠지.”
사실상 돕겠다는 의미였다.
살짝 표정이 밝아진 이설과 달리 강주연은 기가 차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뭔 소릴 들은 거지? 멀쩡히 연인도 있는 남자의 정자를 뽑아 놨다 써먹는 걸 지지한다고?!
소돔과 고모라가 지구의 정식 수도인 세계관조차 그 정도 막장은 아닐 터였다!
“제정신이세요, 언니?!”
“뭐, 들어보렴.”
카페 주인이 다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가 여기서 안 된다고 결사반대를 하면 설이가 그만둘 것 같니?”
“…최대한 막아야죠.”
“지금껏 막으려고 해서 성공한 적은 있고?”
“……아뇨.”
강주연은 입을 닫았다.
이 세상에는 여러 나라가 있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언어가 통함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설이 후자에 속한다는 건 명백했다.
“눈 돌아가서 더 미친 짓이나 저지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여기서는 반대로 협력을 하는 게 나아.”
그리고 둘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강주연은 순간 동감할 뻔했지만 간신히 내리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는 상식이… 아니, 그 이전에 도덕이란 게 있지 않던가?
물론 그녀는 이현석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인권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었다.
“암만 그래도……!”
“그거 아니, 주연아? 동결 보존시킨 정자는 딱히 기한이 없어. 십 년 후든 이십 년 후든 필요할 때 해동해도 임신율은 저하되지 않지.”
“쓸데없이 잘 아시네요.”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았다는 표정을 짓는 강주연에게 카페 주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쟤가 진짜 억지로 덮쳐서 감옥에 가는 꼴을 보는 게 낫겠니, 아니면 그걸 인질로 잡아서 활동이나 계속하게 하는 게 낫겠니?”
“…….”
“게다가 기한을 두면 이 정신 나간 생각을 멈추도록 설득할 시간도 벌 수 있겠지. 일단은 그게 최우선이라고 봐.”
그리고 나에게도 생각이 좀 있단다.
강주연은 생애에 다시없을 깊은 갈등과 마주했다. 하지만 끝내 수긍하며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간 겪어온 이설은 이런 끔찍한 논리가 충분히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둘의 태도에 이설은 저, 하고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제가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
“…….”
한없이 무심한 눈길이 돌아왔다. 이설은 카페 주인과 매니저에게 밀려 슬쩍 시선을 피했다.
강주연에게 있어서는 실로 인생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자각은 없었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길게 한숨을 쉰 강주연이 물었다.
“이 피디님께 다 솔직하게 말씀하실 건가요? 설마 제정신이시라면-”
“정자은행 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하나 있거든. 말 못 할 빚도 좀 지워뒀고.”
“…아, 네. 자세히 묻지는 않을게요.”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매니저와 달리 담당 배우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천진한 미소』 따위의 제목으로 사진 공모전에 제출하면 가작 정도는 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자 얘기를 하고 있지만 말이지.
그때였다. 큼큼 헛기침을 한 카페 주인이 문득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것은.
“하지만, 뭐. 맨입으로 협력해 주기도 좀 그러네.”
“네?”
“그렇잖니. 나도 보수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네요.”
강주연은 은행 어플 이체 메뉴에서 ‘전액’ 버튼을 누르려는 이설을 간신히 뜯어말렸다.
카페 주인은 언뜻 보인 자릿수에 잠시 동요했으나 이내 애써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별 건 아니고, 사진이나 좀 찍어오렴.”
“…사진이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하고 열 장. 그걸 보수로 협력해 줄게.”
“…….”
이설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할까, 단어의 의도를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친구?
“나는 일단 네 언니 비슷한 입장이니까, 동생이 사회생활 잘 하고 있는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겠니?”
카페 주인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린 친구입니다’라고 적힌 종이든 뭐든 들고 열 명. 팬들은 안 돼. 네가 어떻게 알고 지내왔고 어떤 관계인지 오 분 이상 설명할 수 있는 상대만을 대상으로 할 것.”
“…….”
이설은 망연하게 굳었다.
그런 모습에 강주연은 순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러실 생각이셨구나……!’
곱씹어볼수록 묘수가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설이는 친구가 없어! 불가능한 얘기지.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 하면서 설이를 완전히 봉쇄하는 한 수야!’
‘친구를 만들려고 한다면 되레 좋은 일이지!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면서 상식이 생기게 된다면 자기가 얼마나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게 될 테니……!’
그야말로 완벽한 방책. 강주연은 존경 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우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 주인이 훗, 하고 웃었다. 뭐랑 뭐는 닮는다고 어째 이현석이 생각나는 웃는 방법이었다.
이설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설이 문득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카페 주인의 눈이 커졌고 강주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신호가 흐르고, 머잖아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뭐야?
“저기, 이도나 선배님.”
-왜.
“저희 친구 맞죠?”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미쳤니?
뚜, 뚜. 전화가 끊겼다.
긴 정적이 흘렀다.
눈을 깜박이던 이설이 고개를 돌렸다.
“그냥 제 전 재산으로 타협해 주시면…….”
“응, 안 돼.”
2.
몇 주가 지났다.
그간 이설은 에어리즈의 맏이인 한유미와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바꿔 말하자면 그게 거둔 성과의 전부였다는 뜻이었다.
“조금만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응.”
“…한 장당 이만큼에 살게요.”
“안 판다고 했지.”
이설은 매일같이 카페 『헐록 숌즈』에 들러 협상을 시도하고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가곤 했다.
매니저인 강주연은 풀이 죽은 이설의 태도에 종종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내 다잡았다. 저 비 맞은 강아지처럼 가여운 표정에 얼마나 정신 나간 생각들이 숨겨져 있던가.
여기에서는 마음을 귀신처럼 먹고 밀어붙여야만 했다.
“주연이 언니, 우린 친구죠?”
“어디까지나 쌍무적 계약관계지! 왜 그러니?!”
이설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에게 그나마 친분이 있다고 할 만한 이들은 많지 않았으며, 이현석이 엮인 조금 복잡한 관계들을 제외하면 더욱 그랬다.
한유미 외의 다른 에어리즈 멤버들과는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고- 강아라는 종종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그간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과의 사이에도 거리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한유미를 제외하면 이설이 그나마 길게 대화를 나누던 상대는 이도나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먼저 그쪽에 전화를 한 게 아주 영문 모를 판단까지는 아닌 셈이었다.
물론 한 명 예외가 있긴 했지만-
“음? 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당연히 이현석을 ‘친구’ 카테고리에 넣는다는 자승자박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몇 주가 더 지났다.
‘끝이야.’
강주연은 확신했다.
‘이제 설이한테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간 그녀가 봐온 이설이란 인물의 한계는 그런 것이었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 지낼 생각조차 없으며, 애초에 대화하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이설이란 태생적으로 그런 인물이었다.
강주연은 그런 성격이 완벽하게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
아니, 그렇지 않았다. 강주연은 아직도 이설이라는 인물의 집념을 경시하고 있었다.
강주연이 모르는 사이 그녀는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이설은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설은 한 여자 스태프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예, 이설 씨!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전화기로 세운 건물이 뭔지 아세요?”
“네?”
“…콜로세움.”
“…….”
“…….”
침묵이 흘렀다.
3.
기존의 인맥으론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확장을 꾀한다. 정리하자면 꽤나 단순하고 당연하게까지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 행위자가 이설이 된다면 이야기는 꽤나 달라진다.
강주연은 매일 얼이 빠진 채로 담당 배우의 변화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설은 그야말로 작정한 듯 보이는 이들마다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혹시 소금의 유통기한이 얼만지 아세요?”
“어… 글쎄요?”
“천일염.”
“…….”
“…….”
물론 방법론에는 약간의… 아니, 대단히 큰 문제가 있긴 했지만 강주연으로서는 놀라움부터 앞섰다. 설마하니 이현석과 그 자신을 빼면 모두가 소와 닭이던 설이가 여기까지 노력할 줄이야……!
그리고 뭐, 이현석이 했다면 다들 도망쳤을 수준의 개그도 더러운 외모지상주의적 세계에서는 달랐던 게 현실이었다.
“푸하하하!”
“설이 씨 너무 귀여워요!”
‘딸기가 실직하면? 딸기시럽’, ‘모자가 뭉치면? 밀짚모자’ 등의 살의를 일으키는 수준의 유머도 외모가 따라주니 귀엽다며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설이 이 괴상한 행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태프들은 모일 때마다 오늘의 행운아(?)가 누구인지 주고받기 바빴다.
“이설 씨가 나한테 개그했어요, 오늘!”
“아, 왜 나한테 안 하고… 하루 종일 웃어줄 수 있는데!”
아니, 도리어 평소의 서늘한 이미지와의 갭으로 더욱 호인상이 되기 시작했다.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었다.
강주연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오랜 인연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설이 이토록 노력하는 모습에는 약간이나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설은 평소의 모습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열정적으로 고리를 넓혀 나갔다. 무척이나 순조로운 나날들이었다.
“감독님, 감독님.”
“어?”
“왼쪽으로 절을 하면 좌절이래요.”
“……?”
다들 배를 잡고 웃는 좌중에 이현석이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건가’ 고민에 잠겼다는 소소한 부작용만 제외한다면.
“뭐? 차 열쇠 색깔은 카키색? 제기랄, 아주 정신이 나갔구만?!”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란 말입니다!”
이현석이 남몰래 연습한 개그로 김철과 갈등을 빚던 사이 이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이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애초에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와 친해지길 바라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던 게 사실이었다.
항시 홀로 있는 인상이던 이설의 근처에도 점점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이거, 설이도 변하려나 보군요.”
당연히도 이런 변화에는 이현석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유지아가 자숙을 선언하고, 그간 있던 여러 사건 탓에 이설과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줄였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마음을 놓은 기색이었다.
“저도 좀 심했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도나가 직접 용서하겠다고 했는데도.”
이현석이 웃었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법이군요.”
“……네.”
강주연은 몹시 흐뭇해하는 그에게 차마 당신의 정자를 노리고 저러는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사정이야 어찌 됐든 이설을 기특하게 여긴 이현석은 곧장 격려에 나섰다.
“요즘 좋아 보이더라.”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라. 도울 테니.”
이전 사건 이후로 제대로 된 대화조차 주고받지 못하던 둘이었다.
그저 의무감으로 인간관계를 넓혀나가던 이설은 뜻하지 않게 이현석에게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멍하니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고말고.”
이현석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 숫기 넘치는 녀석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안 봐도 훤하다는 얼굴이었다.
“결과가 좋으면 좋겠구나. 응원하마.”
“……네.”
잠시 말이 없던 이설은 곧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설의 친구 만들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반년이 순식간에 흘렀다.
4.
“…열 명. 확실하네.”
반년 후, 카페 주인은 머리를 짚고 있었다.
끔찍하리만치 어두운 얼굴이었다.
‘설마하니 해내버릴 줄이야…….’
그것도 간신히 채운 것도 아니고 초과달성이었다.
기껏해야 두세 명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당혹스러움과 기쁨이 혼재된 기묘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어쩐다…….’
진짜로 그 미친 짓을 주선해 줘야 하는 건가… 그녀는 애써 침음성을 삼키며 물었다.
“그래서, 어땠니?”
“괜찮았어요.”
“…그래?”
“네.”
누가 봐도 어떻게든 생각을 돌리기 위한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설은 빙그레 웃었다.
“깨달은 것도 좀 있고요.”
“깨달은 거?”
“제가, 그간 너무 못된 짓만 해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카페 주인이 강주연을 돌아보았다. 강주연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마치 회생 불능 판정을 받았던 환자가 부활한 걸 목격한 것 같은 기쁨이었다.
설마…….
카페 주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자세히는?”
“저번에 감독님 몰래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글쎄요.”
이설이 머뭇거렸다.
“그냥, 최근에 사람들하고 얘기하다 보니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흑…….”
강주연은 끝내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마치 갓난아기가 ‘엄마’라고 말하는 걸 처음 목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그 정도의 성장폭이기도 했다.
‘맙소사.’
설마하니 정말로 효과를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카페 주인은 이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 근황을 캐물었다.
하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할이 이현석 이야기였던 이전과 달리 이설의 화제는 훨씬 다채로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소품 쪽 언니가 낫시 인형 모으는 취미가 있거든요. 그런데 곽 감독님 쪽 AD 언니는 호러 영화를 좋아해서 서로 준 선물이…….”
“흐어어엉……!”
강주연은 숫제 펑펑 울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 주인도 그 심정에 절절히 동감했다. 설이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해본 게 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생각해 볼수록 후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게 가능했다면.
‘설이도 나아질 수 있었구나… 내가 지레 포기했던 거구나.’
못났기는.
포기하고, 그저 이현석이란 벽창호 탓으로 돌리기 바빴으니 얼마나 못된 언니였단 말인가. 아니, 그녀는 언니라는 이름을 댈 자격조차 없었다……!
그런 둘을 본 이설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
“흐윽… 끄윽… 뭐니?”
“제가 받아야 할 보상 말인데요.”
“…….”
둘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려던 찰나 이설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냥 감독님 의향대로 해주세요.”
“…뭐?”
“요즘 보니까 불임이나 난임, 항암치료 같은 문제로 건강할 때 정자나 난자를 동결 보존하는 경우가 많대요. 그런 거 소개해 주시면 감독님께도 좋을 것 같아요.”
“…….”
“전에 했던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잊어주시고…….”
이설은 펑펑 우는 두 여자에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주연도, 카페 주인도 그저 끝없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저렇게나 순수한 의도를 어떻게 순간이나마 곡해할 수 있었단 말인가?
크게 감격한 카페 주인이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보수라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 그렇게 할게!”
“…네, 부탁드려요.”
“염려 말렴!”
둘은 끝없는 감동에 젖어 있었다.
며칠 뒤, 신세를 진 은인의 계속된 설득에- 걔 마음을 헛되이 하면 안 돼!- 이현석은 마지못해 동결보존인지 뭔지 하는 잘 모르겠는 일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이설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종적을 감추었다.
“…뭐든 포장하기 나름이구나.”
장장 8년을 이어질 잠적이었다.
<이설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