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36)
036 – 신발 신고 가려운 곳을 긁다(6)
저벅저벅.
정하늘이 시동생을 따라 들어간 곳은 널찍한 회의실이었다.
곳곳에 지도가 붙어 있다. 벽면이며, 책상이며, 심지어는 천장에도.
하지만 일반적인 지도는 아니다.
걷던 정하늘의 눈이 닿은 한 곳에는 토성의 고리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살펴보던 백발의 노인이 얼굴을 들고는 이내 온화하게 웃는다.
「어서 오시게, 사령관. 올 줄 알고 있었네.」
정하늘이 얼굴을 노골적으로 찌푸린다.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전 그런 중책을 맡을 사람이 못 돼요.」
「상관없네. 그거야 자네를 포함한 누구든 그러니까. 같이 온 승빈이는 물론 나를 포함해서도.」
「······.」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도 몇 번째 같다. 정하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우리는 구심점이 필요한 걸세. 화성인과 금성인 모두를 상대해본 이는 오직 자네뿐이니까.」
눈이 가늘어지는 모습.
「금성인······? 죄송하지만 그런 외계인은 만나본 적이 없어요.」
「이광진.」
「······!」
묵직한 목소리.
간만에 들은 남주인공의 이름에 정하늘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한지원과 같은 곳에서 왔다고 했어요.」
「거짓말이네. 그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왔으니까.」
중년인이 안경을 벗고 눈을 주무른다.
「그 자는 지금껏 자네를 속였네, 정하늘 사령관. 그는 화성인이 아니라 금성인이었어.」
「······.」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풋······!」
결국 웃음보가 터지고야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한유미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다시금 웃음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거기에 다시금 사색이 되어 연거푸 고개를 숙이는 모습.
“컷.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이대로는 무한루프가 될 판이라 나는 적당히 휴식을 두기로 했다.
···나로서도 이해하지 못할 증상은 아니고.
한유미가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묻는 사이 스태프들이 장비와 소품을 점검하고 민재가 촬영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콘티를 꺼내 가볍게 계획을 정리했다.
[···결국 그놈의 화성인 금성인을 우겨넣고 마는군.]김철 선배가 투덜거렸다.
‘원래 시나리오에도 있었잖습니까?’
[지금처럼 진지하진 않았잖냐.]‘그렇긴 하지요.’
초고에서 발전했다가 다시 초고로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
뭐, 원점회귀는 좋은 일이다.
콘티를 넘기고 있던 중 조영철 촬영감독이 슬쩍 물어왔다.
“일정 괜찮겠어?”
“아마 괜찮을 겁니다.”
“이번 주말 들어갈 걸 월요일에 찍고 있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뒤쪽은 CG팀이 거의 뽑아줬으니 이번 주만 넘기면 됩니다. 그리고 김전감 PD님 때는 쪽대본으로 사흘 벼락치기도 흔했잖습니까?”
“···하긴. 이번 촬영이 어지간히 널널하긴 했어.”
조 감독이 수긍했다.
유지아가 워낙 말도 안 되게 글을 빠르게 뽑는 녀석이라 잊기 쉽지만 한국 드라마는 원래 쪽대본과 벼락치기 없이 끝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더군다나 그게 50부작쯤 되면 기적과도 가깝다.
죄다 외눈박이인 상황이라면 두눈박이가 비정상인 거랑 비슷한 이치랄까.
“두눈박이 촬영 해보니까 다시 외눈박이로 못 돌아가겠는데.”
조 감독이 투덜거렸다. 내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음 촬영도 지아랑 같이 가시죠.”
“자네는? 아··· 서 작가님이랑 같이 가지?”
“네. 꽤 길어질 거 같습니다.”
평상시면 차기작 파트너가 서예린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애매한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시청률도 막장률도 추세가 좋다.
막장률 90퍼센트는 당연하고, 시청률도 30퍼센트는 어찌어찌 넘겨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조 감독이 입맛을 쩝 다셨다.
“아쉽구만. 이 조합 그대로 갔으면 좋겠는데.”
“이 조합이요?”
“자네랑 유 작가, 서 작가. 그리고 설이 씨랑 유미 씨. 서 작가랑 유 작가는 포지션만 바꾸고.”
서예린이 시나리오를 쓰고 유지아가 스크립터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다 나는 웃고 말았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한유미 씨 정도는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설이 씨는?”
“적어도 차기작엔 계획 없습니다.”
사실 차차기작에도 없다.
걔를 또 넣었다 뭔 봉변을 당하라고.
“···그, 뭐시기냐.”
어째선지 조 감독이 잠시 버벅거렸다.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이 PD? 요즘 설이 씨만한 연기파도 없잖아?”
그건 그렇다.
나는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대충 얘기가 된 사람이 있어서요.”
“누구?”
“이도나 씨요.”
“······.”
급히 통할만한 이름을 끌어다 댔는데도 어째 애매한 표정이다.
설이가 이도나한테 연기력으로 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역시 연륜이 있으면 보는 눈이 느는 모양이다.
적당히 되는 대로 주워섬겼다.
“물론 설이도 대단하긴 합니다. 그래도 아직 연륜은 이도나 씨만 못하고··· 저로선 예전 이상형이었던 톱 여배우 한 번 찍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요.”
어째선지 조 감독이 연거푸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흔든다.
···뭐지?
[이 눈치 밥 말아먹은 자식아. 옆에 좀 봐라.]내가 시선을 돌렸다.
“······.”
이설이 캔커피를 두 개 든 채 망부석처럼 굳어 있다.
어······.
“···오늘 촬영 없잖아?”
“···그냥 한 번 와봤어요.”
“······그래.”
커피를 건네받았다.
몹시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설이 한참을 입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도나가··· 이도나 선배님이 감독님 이상형이신가요?”
“······.”
뭔지 모를 감정이 담긴 눈. 아마 경멸일 거다.
조금 죽고 싶어졌다.
#
어찌어찌 변명을 끝내고 촬영을 마친 후 나는 스태프들과 함께 CG팀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결과물을 확인한 후 할 말을 잊었다.
“어떻습니까?”
박민호 감독이 짐짓 여보라는 듯 콧대를 높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그에게는 충분히 그렇게 뻐길 만한 자격이 있었다.
서예린 작가, 그리고 그 외 스태프들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오더를 넣어가며 직접 완성에 관여해온 나와 김철 선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레벨이 눈앞에 있었다.
“와아아······!”
그저 유지아만이 해맑은 표정으로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릴 따름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기쁨이 넘실거린다.
“정말이에요? 진짜 이게 제 함선이에요?”
“어··· 그렇고말고요. 이제 작가님 겁니다.”
잠시 버벅이던 박민호는 슬쩍 내 쪽을 일별하고 나서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언제부터 쟤 함선이 된 거냐?]‘지금부터요.’
[······.]나는 유지아에게 소품인 함장 모자를 씌워줌으로서 간이 취임식을 마쳤다.
유지아는 배시시 웃고는 모자를 벗어 끌어안았다.
훈훈한 분위기가 되자 사람들은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내가 손을 내밀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상상 이상입니다.”
“별말씀을요.”
박민호가 멋쩍은 태도로 손을 맞잡았다.
“이거, 수당을 더 올려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저희가 그 많은 예산을 죄다 갈아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그런 소릴 하겠습니까.”
너털웃음을 짓는 눈이 퀭하다.
“그리고 솔직히 돈 안 받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꽤 하드한 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PD님, 이쪽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다 그런 거 각오하고 온 겁니다.”
붙잡은 손이 한 번 꽉 힘을 주고 떨어져나간다.
“포폴에 몇 년 붓고 들어와서도 몇 개월 만에 떨어져 나가 전업하는 애들이 태반입니다. 저희 같이 공중파에 붙어있는 쪽은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인데도요.”
“CG 쪽 어렵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압니다. 고생시켜드렸군요.”
“이거 제 말을 반대로 알아들으셨습니다.”
박민호가 웃음기를 머금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저희는 그런 대우를 감수하면서도 이 일이 너무 좋아서 매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예.”
“젊어서 생고생을 좀 하더라도 경력 쌓고 나중에 할리우드 영화 스탭롤에 이름 한 자 박아 넣겠다는 머저리들이 제 밑에 있는 애들입니다. 뭐, 사실 이 바닥에 조금만 있어 봐도 꿈같은 얘깁니다만······.”
솥뚜껑 같은 손이 화면 안에 웅장하게 떠 있는 우주전함을 두드렸다.
“설마하니 정말 할리우드 못잖게 만들어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
“이 피디님께는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디, 잘 써주십시오.”
그 표정이 너무 행복해보여 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저거, 곧 터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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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을 하나 해냈으니 또 회식이 빠질 수 없었다.
스태프들이 왁자지껄 대로를 점거하고 떠드는 사이 나는 뒤에 약간 떨어져서 걸었다.
[저건 기적에 가까운 결과물이야.]입을 닫고 있던 김철 선배가 문득 내뱉듯이 말했다.
[할리우드 쪽 내로라하는 팀들과 비교해 봐도 크게 떨어지는 구석이 없다. 제작기간을 따지면 비교조차 안 되고.]‘······.’
[옛날에 웬 성냥팔이가 충무로 자본을 죄다 끌어안고 익사한 뒤 이 바닥 SF는 말 그대로 씨가 말랐다. 우리가 있던 10년 뒤에야 조금 기지개나 펴볼까 했던 무렵이고. 그런 상황에서 저건······.]‘예, 정말 대단한 결과물입니다.’
김철 선배가 다시금 말문을 닫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러니까 현석아.]‘말씀하시죠.’
[그, 전함 나오는 시나리오를 조금만 더······.]‘안 됩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딱 자르자 김철 선배는 노골적으로 풀이 죽은 표정이 되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십쇼. 저나 선배님이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는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것도 있다, 이 무정한 놈아.]‘이번 작품 보란 듯이 성공해서 또 예산 타내서 CG 맡기면 되잖습니까?’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거 알지?]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이번만한 예산을 멋대로 굴려볼 상황이 또 오지는 않겠지.
김철 선배의 안타까움도 영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래. 그러니까······.]‘그래도 저건 터질 거지만요.’
[야,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