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43)
“의상에 문제 생겼어! 좀 와봐!”
“이 PD님이 이대로는 스크린스페이스가 안 나오신답니다! 세트 좀 좁혀 주십시오!”
“짐벌 어디 갔어? 어이구, 이 좁아터진 곳에 달리라도 놓으시게? 너 이 자식 일 똑바로 안 하냐?”
녹음을 마친 후 촬영장을 견학할 수 없냐고 떼를 쓰던 은솔은 정작 정신없이 달려 다니는 현장을 보고는 기가 질린 표정이 되었다.
“어··· 진짜 들어가도 돼?”
“괜찮아. PD님이 미리 허락하셨어.”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은솔을 유미가 다독였다.
정말 수가 틀리면 바락바락 우기며 들이받는 막내 아라와 달리 은솔은 대개 닥치면 움츠러드는 성격이었다.
“실례합니다······.”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긴다.
둘째 주리도 내색은 하지 않아도 긴장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스튜디오 촬영은 야외에 비해 별 거 아닌 줄 알았는데······.”
유미가 실소했다. 흔히들 하는 오해다.
“반대야, 은솔아. 제작하시는 분들은 로케보다 스튜디오 촬영을 더 어렵게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아.”
한 대의 카메라만 잘 컨트롤하면 되는 로케이션 촬영과 달리 스튜디오는 카메라가 다수다. 콘티가 꼬이는데다 나이가 적잖은 고참 스태프들을 통솔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젊은 PD분들은 로케를 많이 선호하신다고 해. 이현석 PD님이 대단하신 이유기도 하고.”
최고참에 가까운 조영철 촬영감독은 종종 입봉 PD가 10년 묵은 놈보다 더하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독한 놈은 한창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 씬은 이미지라인이 잘 안 나오니까 나중에 편집에서 이어붙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풀샷으로 나갔다가··· 유미 씨?”
유미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두 동생도 눈치를 보다 얼른 따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습니다. 거의 끝난 참이고.”
이현석이 고개를 들었다.
큰 키와 살짝 냉막한 인상에서 나오는 묵직한 분위기에 은솔과 주리가 움찔했다.
오기 전에 미리 『토크밴드』를 복습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역시 박력이 달랐다.
“음, 이 분들은······.”
“아, 제 동생들이에요. 어서 인사드려.”
둘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데뷔하며 수많은 상대에게 수천 번쯤 반복한 인사다.
“안녕하세요! 에어리즈 은솔입니닷!”
“주, 주리입니다.”
하지만 은솔은 삑사리를 냈고 주리에 이르러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라 뭐라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현석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보면 오늘이 녹음이었군요. 후시로 넣기로 했지요?”
“예.”
“아깝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로서는 네 분 모두 직접 출연해주셨으면 했는데요.”
빈말이 아니라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주리와 은솔이 저도 모르게 송구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리고 보면 한 분이 안 계시는 것 같은데?”
“아, 죄송해요. 같이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아라는 그··· 부끄럽다고 먼저 돌아가서요.”
큰언니를 보며 두 동생이 입을 떡 벌렸다.
이현석은 대수롭잖게 그렇습니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군요. 좀 거부감 있는 일로 만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다 망해가던 저희 건져주셨는데요! 항상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이현석이 머리를 숙이자 은솔과 주리는 허겁지겁 손사래를 치며 꾸벅꾸벅 절을 했다.
“뭐, 편하게 있다 가십시오. 유미 씨처럼 연기에 뜻을 가지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보시다 보면 도움이 되는 일도 있겠지요.”
“······.”
두 소녀가 멍한 눈을 했다.
콩깍지 씌인 아라는 둘째치더라도 웃으니 인상이 달라 보인다.
이 정도면 의외로······?
“형님! 서예린 작가님이 최종 대본 보내주셨습니다!”
“오냐.”
이현석이 대본을 확인하느라 잠시 대화가 끊겼다.
“······.”
그리고 이어지는 표정에 두 소녀는 저도 모르게 힉, 하고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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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인사를 나눈 한유미와 두 동생들은 정신을 차려보니 없었다.
정말로 예의바르게 인사만 하러 왔던 모양이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굉장하구만.]김철 선배가 대본을 보며 다시금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그걸··· 그 정신 나간 트로트 떼창을 여기까지 재해석해서 볼만한 씬으로 만들다니! 현석아, 너는 정말 훌륭한 작가진을 뒀다.]‘···감탄하실 시간에 대책이나 좀 생각하지 그러십니까?’
보면 볼수록 암담한 기분이었다.
본래 내가 계획한 트로트 씬의 포인트는 두 가지 막장성을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첫째는 중요인물이 죽는다는 끔찍하게 진지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는 황당함.
그리고 둘째는 그 노래가 하필 떼창으로 부르는 트로트라는 점이다.
하지만 설마하던 서예린과 유지아는 첫 번째를 어떻게든 납득이 가게 살려내고야 말았다.
암만 야구는 투수놀음,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란 말이 있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김철 선배가 이죽거렸다.
[네가 뿌린 씨앗이잖냐, 정하늘이 몇 명이니 하는 거.]‘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합니까?’
대본을 확인한 나는 궁리 끝에 녹음이 끝난 트로트를 확인하려 편집실로 왔다. 첫 번째가 막혔으면 두 번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내가 노래는 잘 모르는데 이거 되게 잘 부른 거 아니냐?]‘···맞습니다.’
서진태 음악감독이 무척이나 흐뭇한 표정이었을 때 예상했어야 했다.
맙소사.
나는 머리를 짚었다.
아니, 이게 멤버들이 죄다 20대 초중반인 걸그룹이 부른 트로트라고? 당장 드라마 BGM으로 깔아도 되겠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 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전문 트레이너 두고 철야로 연습이라도 한 건가?
[1안과 2안이 둘 다 막혔군.]‘······.’
어쩐다. 이걸로 90퍼센트를 버무릴 수 있을까?
나는 고민에 잠겼다.
씬에 힘을 빼버릴까? 아니, 아카펠라로 들어가는 트로트에 정적인 분위기면 오히려 연출이 살 거다.
대본에 수정을 요구한다? 이유가 없다.
영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으로서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선배님, 저번에 명함 받은 『플래닛 걸즈』가 몇 명이었죠?’
[···응?]‘여덟 명? 아니, 아홉 명이던가? 걔네들을 동시에 올리면······.’
[잠깐만, 현석아. 잠깐만!]어째선지 김철 선배가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이제 몇 화나 남았다고 그렇게 무리수 던지려고 하냐? 진정해라. 진정 좀 하고 냉정하게 생각하자!]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지 않을까요?’
[스트라이크 아웃이다, 자식아!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선배님이요?’
김철 선배는 문득 낭패한 얼굴이 되더니만 금세 표정을 바꿨다.
[그래. 차라리 나한테 맡겨봐라, 현석아.]내가 눈을 끔벅였다.
‘어쩔 생각이신데요? 묘수라도 있으십니까?’
[요즘 하는 꼴 보다보면 차라리 내가 너보다 낫겠어.]김철 선배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빙 돌아가는 수단을 쓰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다.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하고 싶어? 간단하잖냐? 지금 씬이랑 노래가 어우러지는 게 문제니까 연출로 떨어뜨려놓으면 되는 거야.]‘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맞장구를 쳤다.
선배가 짐짓 콧대를 세웠다.
[너는 내 밑천 쏙쏙 잘만 빼먹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진짜배기는 그런 게 아니야. 관객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보게 만들고 보고 싶은 걸 잘 안 보이게 하는 거야말로 제대로 된 연출이지.]오오······.
몹시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그야말로 이전 내 우상이었던 김철 감독의 모습 그 자체.
최근 들어 허당스런 모습만 보아왔던 나로서는 폭풍 같은 감격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살짝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알겠습니다! 선배님께 전부 맡기지요! 그대로 따를 테니 뜻대로 하십시오!’
[어? 어··· 굳이 전부랄 필요까지는 없고 너도 좀 의견을······.]‘믿고 있겠습니다, 선배님!’
#
몇 주 뒤 모 소속사 휴게실.
홍지호와 이도나는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 『연극처럼 살다』 42화의 막바지를 보고 있었다.
30화 이후로 간만의 외나무다리 재회지만 웬일로 큰 소란은 없었다.
둘은 그저 화면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형수. 제 주머니 안에서 뭣 좀 꺼내주시겠습니까? 영 기분이 진정이 되질 않아서, 노래나 좀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정하늘은 묵묵히 시동생의 품을 뒤졌다. 하지만 찾아보니 이미 산산조각이 난 후다.
그걸 본 시동생이 쓴웃음을 짓는다.
「거 운도 없구만요. 두 번 죽는데 음악도 없이 가는 인생이라니.」
정하늘은 미간을 좁힐 뿐 대답하지 않는다.
잠시간의 간격.
「형수님.」
「말씀하세요.」
「노래 좀 불러주십시오.」
카메라가 가늘어지는 눈을 비춘다.
「이제 죽을 사람 아닙니까. 배웅은 좀 해주시죠.」
「···잊었나요? 당신은 내 원수에요.」
「그리고 지금 형수님 대신 총 맞고 죽어가고 있죠. 이 정도면 남은 빚은 탕감해주시는 게 인정 아니겠습니까?」
「······.」
킬킬대는 시동생을 내려보는 정하늘은 여전히 무표정이다.
하지만 얼굴에는 희미한 전류가 흐른다. 눈가 위쪽에 아린 감정이 성글성글 맺히고 입술이 올올히 조여든다.
죽은 남편도, 이광진도 정하늘과 이 정도로 고락을 함께한 적은 없었다. 그 시간들이 정하늘의 시선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이설한테 가려져서 그렇지 한유미도 참 연기 잘해.”
홍지호가 짐짓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냥저냥이네.”
드물게도 이도나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사실 뭐라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우인 둘로서는 그렇게 애써 자기제어를 해야 할 정도로 심도 높은 감정선이었다.
「나는··· 노래를 못 불러요.」
「네? 음칩니까?」
「그냥 잘 모르는 거예요.」
「그래도 아는 노래는 몇 있을 거 아닙니까? 동요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불러주시죠.」
정하늘이 머뭇거리다 말한다.
「예전에 어머니가 부르시던 트로트 정도라면.」
「트로트라니······!」
꺽꺽대며 웃던 시동생이 피를 토한다.
「뭐, 그걸로 됐습니다. 불러주시죠, 형수님.」
「······.」
「슬슬··· 말을 잇기도 힘듭니다. 불러주세요.」
「···한 가지만 물을게요. 승호 씨를 죽인 건······.」
「물론 제가 한 짓입니다.」
남자의 눈이 또렷하다.
그걸 본 여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이윽고 배경음 하나 없는 가운데 무반주로 구성진 트로트가 울려 퍼진다.
시동생은 미소를 지은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더 움직이지 않는다.
정하늘은 혼자 남았다. 하지만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
노래는 이어지고 정하늘의 얼굴에는 둑이 무너진 것처럼 서서히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지켜보던 이도나도 홍지호도 그 감정선에 삼켜져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던 우주선 홀에 그림자가 몇 개 생겨나더니 노래가 겹쳐지기 시작했다.
2중창, 3중창, 다시 4중창.
끝내 무반주였던 노래에 멜로디까지 들어차며 구성진 트로트 가락이 이어진다.
“······??”
“······???”
그 전까지의 감정선에 삼켜져 있었던 만큼 홍지호와 이도나의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둘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야, 이게?”
끝내 홍지호가 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현석 이 인간, 주변에서 막장, 막장 하니까 진짜로 막장드라마 만들자 이거야?!”
이도나는 얼굴을 창백하게 했다가 이내 한껏 붉히더니만 결국 성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방출도 잠시였다.
화면이 변했다.
카메라가 노래의 박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실제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진다.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 얼핏 보기엔 극히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장면.
하지만 어째선지 그 단순한 장면에 두 노련한 배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화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씬에 두 배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얼마가 흘렀을까.
5분? 10분? 아니, 어쩌면 1분도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 노래야. 너는 항상, 이 순간이 되어야만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어.」
「다른 어떤 정하늘도 부를 수 없어.」
「그러니까 나는 네가 진짜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사이에 분명히 카메라에 잡힌 한지원의 말들이 배경음악처럼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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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처럼 살다』 42화, 시청자들은 ‘알쏭달쏭’, 평론가들은 ‘격찬’.
▶ 『바랑기안』의 김철이 생각나는 압도적인 연출과 영상미, 무릎을 굽힌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나?
▶ 연출 속에 자연스럽게 숨긴 비수. 정하늘은 대체 몇 번째인가? 진짜는 언제 사라졌나?
▶ SF의 권위자, 로이드 곤잘레스 감독 SNS에 사과문 게재··· ‘몰라 뵈어 죄송하다’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내 그릇 밖이라는 건 알겠다’
▶ 어째서 트로트여야만 했는가? 수없이 갈리는 의견들.
나는 기사를 읽는 걸 그만두고 옆의 메시지창을 보았다.
『’연극처럼 살다’ 42화의 방영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를 집계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평균시청률 34.1%, 시청자 중 해당 드라마를 막장이라 생각하는 비율은 29%입니다.』
옆으로 시선을 향했다.
“···선배님.”
김철 선배가 우물거렸다.
[···그, 나는 열심히 했다. 진짜 열심히 했어, 현석아. 알잖냐?]“······.”
[······잘못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