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49)
– 십년감수했어요.
전화 너머로 서예린 작가가 투덜거리고 있다.
– 다시는 이런 미친 짓에 끼게 하지 말아주세요. 대체 어쩌실 생각이셨어요?
내가 멋쩍게 사과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서수현 작가님께는 제가 따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 관두세요. 역효과만 날 테니까.
서예린 작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우리 기획은 언제부터 다시 진행되는 거예요?
“음, 죄송하지만 좀 걸릴 겁니다.”
– ···얘기 잘 풀린 거 아니었어요?
“물론입니다.”
내가 웃었다.
“잘 풀렸으니 슬슬 토낄 준비를 해야겠죠.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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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시상식에서 사고가 터진 이후 나는 몰려드는 기자들의 세례에서 간신히 몸을 피했다.
이후 골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김철 선배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쉽지 않았다.
꼴에 회귀자니 나에게는 당연히도 제법 많은 카드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워낙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차분히 그러모을 틈이 없다는 것.
둘째는 단순히 그걸 터트리는 걸로는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다.
[이제부터 이설 그 지지배랑 놀지 마라. 아주 폭탄이야, 폭탄.]“음.”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시상식 끝나고 그냥 엿 먹으라고 시원하게 터트려버리고 갈 길 가는 거.
하지만 하필이면 이설이 중간에 끼어들며 순식간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 되고 말았다.
터트려도 일단 저 천치를 건져내고 나서 터트려야 할 거 아닌가.
여기서 내가 어설프게 굴면 그 녀석은 정말로 매장이다.
[그 지지배를 건져낸다는 건.]“네. 강길수 본부장··· 즉 이사회 라인이 그 녀석을 때리는 걸 멈추고 배동기를 손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죠.”
[···입봉 PD가 말이지?]“그 외에는 어떻게 해도 화근이 남습니다.”
한동안 골을 싸매던 김철 선배가 맥없이 말했다.
[그럼 우선 가진 패로 협상을 가장해야겠지. 조건으로 배동기 녀석을 내치게 하고.]“협상이라······.”
나는 음울한 심정이 되어 내가 쥔 카드들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테이블에 끌어내라고요?”
내가 쥔 게 가벼운 패면 상납하고 빌면서 그쪽 라인으로 갈아탈 것 같은 기미를 보여주는 걸로 좋을지 모른다.
코앞에서 흙을 뿌리긴 했지만 애초에 그쪽도 배동기를 그리 탐탁케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심지어는 시상식에서의 그 멍청한 퍼포먼스도 반쯤 독단이었다고 하고.
하지만 정작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당장 그치들의 발밑을 날려버릴 수 있는 초대형 폭탄들이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그냥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들 것 같은 목록들.
심지어 나나 김철 선배나 미래에 이런 사실이 밝혀졌다는 걸 알고만 있을 뿐 증거 같은 걸 제대로 쥐고 있지도 않다.
협상은커녕 기본도 안 된 상황이다.
[협상이 안 된다면··· 뭐, 작정하고 협박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 이설 걔 물어뜯는 거 그치지 않으면 확 터트려버리겠다, 하는 거지.]“···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찌됐든 이설이 나한테 중요한 카드라는 걸 눈치 채면 저쪽은 당연히 그 녀석을 인질로 잡고 나올 거다.
그걸 생각지도 못하게 할 정도의 협박이라.
나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안기식이가 움직이고는 있는 모양이다만.]“지금 그쪽하고 함부로 접촉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파탄입니다, 선배님.”
그래서 나는 패를 쥐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며칠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찾아온 게 바로 로이드 곤잘레스 감독이었다.
“오. 소식은 들었습니다, 리 감독!”
그는 눈물을 죽죽 흘리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제작자가 불미스런 일에 끌려 다니느라 온전히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다니!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 예······.”
나는 얼떨떨하게 답했고, 심지어 경계도 했다.
하지만 머잖아 그에게 전혀 사심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유지아와 비슷한 –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로이드는 나에게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가는 것을 권유했고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로이드와 어느 정도 의기투합했을 무렵, 그는 내게 꽤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저도 몇 번쯤 알력다툼에 휘말려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끔은 어마어마하게 거물인 상대이기도 했지요.”
“호오.”
“그런 이들을 한 발 물러서게 하는 데 대개 효과적인 방법은 당신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럴 수가.
나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럼 나에게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지 않은가?
[···뭐, 임마?]“제 경우에는, 음··· 제가 정말 필요한 걸 숨기면서 상대가 몹시 하찮게 여길 것 같은 요구사항에 집착하는 게 도움이 됐습니다.”
흠.
하찮은 요구사항이라?
“뭐, 스태프 석식값은 점심값의 두 배여야 한다거나, 조명등은 모두 백열전구가 아니면 안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거 괴상하군요.”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괴상한 조건을 들이밀수록 상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현석. 겜블의 기본은 당신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두려움은 대개 미지이지요.”
···그렇게 말해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김철 선배가 물었다.
[현석아, 네 입장에서 지금 가장 절실한 요구사항이 뭐냐? 이설 그 지지배는 빼고.]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야 지아한테 상 돌려주는 거죠. 제가 어떻게 해서든 그 새끼들 뚝배기를 깨서······!’
[됐다. 그걸로 가자.]‘예? 하지만 이건 설이 일만큼이나 중대한······!’
[그걸로 됐다니까! 완벽해! 너는 굳이 미친놈을 가장할 필요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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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C, 배우 이설에게 공식 사과. ‘오해가 있었다.’
▶ 배동기 책임프로듀서. 그간의 만행들 폭로··· 조카와 함께 수십 건 지위 남용 드러나.
▶ 신인배우 감싼 이도나, 홍지호 소신발언 주목··· ‘한류배우답다’ 찬사
▶ 『연극처럼 살다』 이현석 PD.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제작사연. 그야말로 흙에서 궁궐을 일구다.
▶ 로이드 곤잘레스 감독, 비밀리에 방한··· 이현석 스카웃 노리나?
놀랍게도 강길수는 배동기를 손절했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틈을 타 안기식 사장라인이 일을 터트린 거지만 뭐, 보고만 있었으니 그게 그거다.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나는 깊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냥 평범하게 가는 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김철 선배를 믿지 못하고 열심히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던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역시 거장쯤 되면 다른 보이는 게 있는 건가?
[그러게 말이다. 신기하다, 야.]어째선지 김철 선배가 국어책을 읽듯 말했다.
나는 김철 선배를 백 마디 말로 칭송하고는 후련한 심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KBC 사장실이다.
“···왔구만.”
“예. 민폐 끼쳐드려서 죄송했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봉투를 내밀었다.
안기식 사장이 침중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꼭 이래야겠나, 이 PD?”
“제가 더 남아 있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보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 KBC는 말 그대로 전쟁터가 될 거다. 도화선을 당긴 사람은 빠지는 게 도리다.
“그래도 회사 생활 10년차에 사장님께 직접 사표를 드릴 수 있으니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8년차 아닌가?”
“기분으론 그렇단 말씀입니다.”
안기식 사장이 눈을 감았다.
“정말 미안하게 됐네. 자네는 우리 방송국의 기둥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어. 내가 힘이 없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설이··· 이설 씨나 저나 사장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그대로 끝이었을 텐데요.”
안기식 사장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
“갈 곳은 있나?”
“종편에서 제안이 몇 개 오긴 했습니다.”
입맛이 쓴 선택이었다.
현재 시점에서 종편은 개국 초창기를 간신히 넘어선 상황이다.
슬슬 자리를 잡긴 했지만 회귀하기 전처럼 지상파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시청률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까짓 몇 년 당겨버리면 그만 아니랴.
워낙 시청률과 화젯거리에 목이 마른 이들이니 조건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좋기도 하고.
안기식 사장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게서 한 가지 더 제안이 있네.”
“예?”
“내가 SBC 최도정이와 친분이 있다는 거 아나?”
···알기야 한다.
최도정 사장.
취임하자마자 자기 방송국의 드라마를 ‘허깨비’니 뭐니 신나게 까댄 양반이다.
꽤 인상 깊은 말이었던 터라 내가 유지아를 처음 만나 설득할 때 써먹기도 했다.
“최근도 얘기를 한 번 나눠봤는데, 그 친구라면 자네를 좋아할 것 같네.”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KBC에서 근무하던 PD가 SBC로 이동한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린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물론 SBC에 직접 들어가는 건 어렵겠지. 하지만 올해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구멍이 하나 생겼네.”
“······?”
올해 개정안이라면······.
[외주프로그램은 방송사업자나 특수관계자가 아닌 독립제작사가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한다. 올해로 그 조항이 삭제됐었지, 아마.]아.
나도 비로소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다.
“SBC는 아마 몇 달 안으로 몇 군데 제작사의 주식을 인수할 걸세. 잠깐 눈치를 보다 통합해서 자회사로 만들 계획이고. 자네가 일찍부터 그중 하나에 몸을 담고 있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하네.”
“······.”
말인즉슨 SBC 자회사가 될 예정인 외주제작사를 주선해주겠다는 뜻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글쎄, 가능하게는 들리는 얘기지만······.
“물론 쉽진 않을 걸세.”
안기식 사장이 무겁게 말했다.
“전례가 드문 일인데다 자네는 벌써부터 이름이 알려졌으니. 얘기가 많을 거야. 당연히 텃세도 있을 테고.”
“예.”
“하지만 나는 종편 같은 곳에서 썩히기에는 자네의 제작자로서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네.”
···음.
일단 이 사장님이 종편을 어지간히 띄엄띄엄 보고 있다는 건 알겠다.
앞으로 몇 년 뒤면 걔네들이 우리 공중파 뚝배기 깨고 다닙니다, 영감님.
[하지만 우리에겐 그 몇 년이 없지.]‘팩트군요.’
나는 고민에 잠겼다.
종편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권한을 줄 거라고 꼬시고 있다.
어디 다른 데는커녕 KBC에 계속 남아서 연타석 홈런을 날린다 하더라도 오륙 년은 더 굴러먹어야 쥘 수 있을 정도의 권한.
말 그대로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볼 수 있겠지.
반대로 안기식 사장의 제안은 아무런 보장이 없다.
내 기획이 채택될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설령 채택되더라도 SBC쪽에서 내려온 낙하산이 얼마든지 어깃장을 놓아 끌거나 뜯어고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감수하는 대가는 공중파에 방영된다는 것 하나뿐.
···뭐, 고민의 여지가 없군.
나는 빙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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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었다.
–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목소리는 분노에 가득 차 있지만 한편으론 곤혹한 기색이 역력하다.
슬슬 안기식 사장이 칼을 든 모양이다.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높으신 양반은 좋겠구만. 내게 있어서는 BB탄 수준의 키워드가 순식간에 대포탄이 되니.
– 해 달라는 거 해줬잖아, 이 자식아! 뭐가 불만이야? 그 얼빠진 사장이 네놈 챙겨줄 거 같아?!
“이런, 모르셨나 보군요.”
내가 낄낄댔다.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그게 국제상식이란 겁니다, 강길수 씨.”
– ······.
수화기 너머의 말이 멈추고 숨이 거칠어졌다.
[···네가 테러리스트란 거냐?]‘뭐 잘못 드셨습니까, 선배님? 악당은 저쪽이잖습니까.’
[······.]김철 선배가 침묵하는 가운데 한동안 씩씩대던 강길수는 끝내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가만히 들어주었다.
“좋습니다.”
내가 말했다.
“방금 여섯 가지 다른 표현으로 제 부모님이 견공이라 추측하셨군요. 아쉽습니다. 그런 입체적인 표현력을 그간의 쓰레기 같은 행보로 썩히고 계셨다니요.”
– 이······!
“제가 보기엔 아마 그 정도 햇수만큼 실형이 나오실 것 같군요. 준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꽤 정확한 추측일 거다. 미래시니까.
[이 자식이! 이런 짓거리를 벌이고도 이 바닥에 길게 붙어있을 것 같아?!]“뭐, 굳이 오래 갈 생각도 없습니다.”
6년은커녕 몇 년 안 되어 결론이 날 테니까 말이다.
나는 적당히 강길수를 놀려먹다가 지겨워지자 전화를 끊었다.
“흐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좋냐? 전에도 쫓겨나고 이번에도 쫓겨나는데?]“다르죠, 선배님. 이건 제 발로 나가는 겁니다.”
예전엔 까마득한 괴물로 보였던 쓰레기들에게 불 한 번 시원하게 질러주고 말이지.
좋군.
끝내주게 상쾌한 기분이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눈앞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애증의 회사에서의 마지막 일, 『연극처럼 살다』 마지막화의 최종편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의욕을 내려던 순간이었다.
다시금 전화벨이 울렸다.
“음, 배동기군요!”
이름을 본 내가 활짝 웃었다.
당분간은 기분전환이 그칠 새가 없을 모양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