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54)
2월 중순.
나는 공식적으로 KBC를 퇴사하고 스튜디오 링깃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갑습니다! 환영해요!
“하하, 이거 굉장하신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몇몇 직원들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
물론 조직이란 곳이 다 그렇듯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제법 보였다.
“뭐, 적당히 무시해달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대표실에서 독대하던 중 이지은 대표가 내게 커피를 건넸다.
“그 사람들 중심이 방을찬 PD인데, 여기서 참 오래 있었거든요. 한 10년 정도.”
“10년이요?”
이 회사의 나이가 열두 살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반쯤 원년멤버라는 뜻이다.
“능력은 괜찮은 사람이긴 한데··· 나이가 문제인지 본래 성정이 그런 건지 좀 그런 기질이 있어요.”
이지은 대표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없는 사람처럼 대하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지요.”
뭐, 텃세를 아주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러려니 넘겼다.
하지만 이지은 대표의 말과는 달리 곧 문제가 생겼다.
며칠 뒤 내가 참여한 첫 번째 회의는 SBC에 납품할 단막극에 관한 것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희 대주주 되실 분들이 기껏 단막극을 부활시켜 놓고도 인하우스 찍기 싫어서 저희한테 넘겼습니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진짜.”
이지은 대표의 너스레에 회의실 안에 웃음이 돌았다.
고작 30대 후반의 나이로 좌중을 완전히 휘어잡는 모양새에 나는 조금 감탄했다.
“혹시 하고 싶으신 분 계신가요?”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순식간에 웃음이 가시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뭐, 그렇겠지.
옛날이라면 모를까 요즘 단막극은 제작비 9천 써서 광고비 2천 건지면 선방이라고 할 정도로 몰락했다.
그나마도 더 안 나오면 눈치가 보일 테니 꺼려지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이지은 대표가 혀를 찼다.
“숨들 쉬어요. 그럴 줄 알고 이번에 새로 오신 정수아 PD님께 맡기기로 했으니까.”
사람들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이번이 입봉작이시니까 누구 한 분은 붙어야 할 것 같은데··· 이현석 PD님으로 불만 없으시죠?”
“예!”
“좋아요. 그럼 기본적인 뼈대를 논의해볼게요.”
외주제작사의 제작회의는 꽤나 신선했다.
PD 혹은 CP가 끙끙 앓아가며 제안서를 뽑아 컨펌을 받는 방송국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제 뜻대로 해도 괜찮으시다면 작가는 유지아, 메인배우는 이설로 가려고 합니다.”
“『연극처럼』 패밀리네요?”
이지은이 웃었다.
“리허빌리라도 시키시려나 보군요. 저희야 환영이죠.”
리허빌리.
이설의 소속사인 FMC가 원하는 바를 생각하면 꽤 적절한 표현이었다.
역시 짬은 그냥 먹는 게 아닌 모양이다.
대화가 활기를 띠었다.
여기저기서 이설 실물을 볼 수 있겠다느니, 자기는 유지아의 팬이라느니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후자를 가만히 살피고 있는 중 김철 선배가 물었다.
[대체 어쩌려는 거냐? 걔네들은 또 왜 불러?]‘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현재 서예린 작가는 작품에 자극적인 요소를 더하면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다.
나는 그 점을 정면으로 찌를 요량이었다.
하지만 내 궁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노골적으로 불평의 목소리를 낸 까닭이었다.
보니 이지은 대표가 요주의 대상으로 언급하던 방을찬 PD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지은이 애써 웃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너무하다는 거죠, 방 PD님?”
“불공평하잖습니까. 다들 나서기를 꺼려한 건 캐스팅과 각본을 뽑아올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유지아 이설로 간다는 거 알았으면 저라도 나섰을 겁니다.”
침묵이 흘렀다.
[···저게 대체 뭔 놈의 억지냐?]김철 선배의 헛웃음을 이지은 대표가 풀어 설명했다.
“이상한 말씀이시네요. 유지아 작가님, 이설 배우님 모두 이현석 PD님이 직접 발굴하셨고 『연극처럼 살다』로 데뷔했어요. 이현석 PD님의 인맥인 거죠.”
“아무렴요.”
방을찬이 이죽거렸다.
“보통 인맥이 아니니 정치질 잘 해서 낙하산도 떨어지고, 그 낙하산이 다 쳐내고 황금시간대 월화드라마도 맡고. 세상 참 공평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
노골적인 비아냥에 이지은 대표의 표정이 굳었다.
“방 PD님. 이현석 PD님은 어디까지나 실적과 자질을 인정받아서······.”
무어라 말하려는 걸 내가 막았다.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자 방을찬은 조금 움찔하는 기색이 되었다.
내가 말했다.
“비꼬지 말고 본론부터 말씀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설마 단순히 저에게 시비를 걸고 싶으셨던 겁니까?”
“···일단 그 단막극 기획은 다른 적절한 사람에게 넘기시죠.”
적절한 사람이 애써 거드름을 피웠다.
“듣기로는 맡은 월화극이 50부작 정도 될 거라고 하던데 둘 다 가져가시기는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내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전 빠지겠습니다. 캐스팅부터 다시 시작하시죠.”
“아니, 그건······.”
“유지아 작가와 이설 씨는 필요하시다 이거군요?”
“···크흠.”
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이건 드라마를 욕심내는 게 아니다. 현재 뜨거운 감자인 둘의 이름값을 빌어 자신을 띄워보겠다는 거지.
방을찬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승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보니까 실적에 몸이 달은 거야, 저거.]김철 선배가 툭 내뱉었다.
[곧 SBC 자회사가 될 거 아니냐. 그치들이 병신이 아니라면 쭉정이들은 다 잘라내겠지.]‘저도 대충 알겠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추 반 정도는 나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바꿔 말해 나머지는 중립적이거나 나에게 적대적이라는 뜻이었다.
이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KBC에서 질리게 겪어본 줄서기 싸움이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좋습니다. 이지은 대표님?”
“네? 네, 말씀하세요.”
“유지아 작가와 이설 씨를 주선해드리겠습니다. 기획은 저기 계신 방 PD님께 맡기도록 하시고.”
방을찬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나를 한 발 빼게 했다고 생각했는지 기쁜 기색이 역력해졌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양반이구만!”
“다만 이후 제 기획이 관련된 회의에 방 PD님은 참여하지 않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지은 대표가 어깨를 으쓱하며 방을찬을 돌아보았다.
방을찬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럽시다. 제 진의를 오해하시는 것 같아 마음은 좀 아픕니다만.”
[지랄하네.]김철 선배가 코웃음을 쳤다.
뭐, 미적지근하지만 여기선 선을 그어놓는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우기엔 난 아직 신참일 뿐이니까.
둘에게 연락했다.
지아는 꽤 저어하긴 했지만 어렵사리 나 없는 기획을 응낙했다. 강주연 매니저는 되레 내가 없는 걸 반기는 것 같았고.
내가 빠진다는 얘기를 들은 정수아는 제안을 고사했다. 더해 이설이 단막극이나마 얼굴을 비춘다는 건 금세 인터넷상에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SBC는 흐름에 올라타 단막극 편성시간을 거진 영화 한 편 수준으로 올렸다.
기획과 연출을 같이 맡게 된데다 화제의 중심이 된 방을찬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단막극 『같은 세상』이 방영되었다.
그리고.
『단막극 ‘같은 세상’의 방영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를 집계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평균시청률 7.2%, 시청자 중 해당 드라마를 막장이라 생각하는 비율은 93%입니다.』
『단막극에서는 보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보상을 얻을 수 없으며 ‘동시제작’의 대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구십···몇?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
– 내 눈 돌려줘라ㅅㅂ
– 혹시나, 혹시나 하고 마지막까지 봤는데 기적은 없었다.
– 이걸 방송해? SBC는 머저리들밖에 없냐?
– 개쓰레기 드라마.
– 미치겠다, 진짜; 여기 나온 이설이 진짜 그 한지원이 맞냐? 어디 다른 쌍둥이 아님?
– 스토리 개노답; 유지아 어디 아픔? 아님 누가 대필이라도 함?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대동단결해서 욕을 퍼붓기에 바빴다.
김철 선배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석아.]“···왜 그러십니까.”
[당장 그 방 뭐시기놈 찾아가라.]“찾아가서요?”
[어쩌긴 어째. 싹싹 빌면서 비법을 알려달라고 해야지.]···나도 조금 그러고 싶어졌다.
막장도 93%.
『연극처럼 살다』 50편을 내달리며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90퍼센트 이상을 방을찬은 단 한 편으로 이뤄냈다.
심지어 이설을 데리고.
괴물인가.
나는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 내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 왜 이 지랄이 난지 알았다. 이설 있고 유지아 있는데 이현석이 없음.
– 맞네. 이거 방을찬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놈이 연출함.
– 이현석이 규격외네. 이 지랄나는 걸 포장해서 『연극처럼』을 만들었다고? 괴물이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 이거 보니까 『연극처럼』도 이현석 아니었음 그냥 개막장 드라마로 끝났을 듯.
– 이현석, 그는 웰메이드의 신인가?
아니라고······.
– 『연극처럼』이 배우, 작가빨이라고 했던 머저리들 다 어디갔냐ㅋ
–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짐ㅋㅋ
– 괜히 갓-잘레스 감독이 찾아오셨던 게 아니네.
– 오늘부터 이현석을 명제라고 부르자. 명품드라마의 제왕의 준말임.
ㄴ 개구림.
ㄴ 왜 사냐.
끔찍한 사태였다.
나는 차마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인터넷 창을 닫았다.
단막극 『같은 세상』은 근 하루간 실검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음날, 나는 출근해서 곧장 방을찬 PD를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며칠간 출근하지 않던 그는 얼마 후 우편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그와 같이 나를 백안시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돌변해 살가워졌다.
하지만 나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
지아를 찾아가니 몹시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반응이 많이 안 좋죠?”
“괜찮아.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내가 애써 달래자 지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대왕오징어만 넣자고 하지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음.
그건 그랬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설이는 어딨어? 같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설이 언니요?”
설이 언니······?
어째 좀 희한한 호칭인데.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서예린 작가였다.
받아보니 무척이나 활기찬 목소리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몹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이 PD님, 알았어요!
뭘.
– 그냥 자극적인 요소를 넣는 것만으로 좋은 게 아니었어요. 그걸 인물에게 진정으로 녹여냈어야 했던 거예요! 그걸 몰랐다니······!
아니야··· 계속 몰라도 돼.
– 일주일만 기다려주세요! 인정하실 수밖에 없는 원고를 가져갈 테니까!
그냥 『연구일지』면 돼··· 그거면 된다고······.
내 염원도 무정하게 전화가 끊겼다.
“······.”
내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김철 선배가 툭 내뱉었다.
[노린 거면 네가 법정 해라.]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