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59)
상암동, MBS 본사.
그 안 어딘가의 흡연실에서 한 CP가 뻑뻑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KBC는 이현석 신작 타이밍 맞춰서 월화 열 시 편성 빼버렸단다. 일단 파일럿으로 채울 모양이야.”
“······.”
“뭐, 그쪽이야 지금 사정이 말이 아니니 그리했겠다만은··· 우리 국장님도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다.”
앞에서 듣고 있던 장연철 PD가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알잖냐. 배우며 감독이며 상대가 너무 세니까 바로 맞불 놓지 말고 적당히 빠지자 이거지.”
CP가 담뱃재를 털었다.
“SBC가 중반부쯤 힘 빠질 때까지 준비하면서 버티다가 펀치 한 방 날려서···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니냐?”
말을 잇다가 문득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는지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도 어디 이현석 같은 놈 하나 안 떨어지나 몰라.”
“···운 좋게 입봉작 하나 터트린 애송입니다.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CP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은 아직도 이런 소리를 하고 있군. KBC에서 SBC로 넘어간 주제에 저 정도의 푸시를 받고 있는 게 안 보이나.
“연철아, 너도 알잖냐? 어지간히 경력 있는 놈들도 50부작 마라톤 한 번 달리면 후반부 개판 나기 십상인 거.”
“······.”
“심지어 이현석이는 나오는 말의 반만 믿어도 어마어마한 악조건으로 그걸 해냈어. 이미 애송이 소릴 들을 레벨이 아니지.”
타이르듯 말하다가 장연철의 표정을 보고는 혀를 차며 담배를 비벼 끈다.
말해서 들어먹을 얼굴이 아니다.
“아무튼, 너도 이번에 마지막으로 현장 뛰는 줄 알아둬. 짬 먹을 만큼 먹었으면 애들한테 기회 줄줄도 알아야지.”
“···예.”
“설욕하겠다고 너무 무리수 두지 말고. 설령 백 보 양보해서 『연극처럼』이 뽀록으로 터진 거라고 해도 상대가 이도나 홍지호 더블이잖냐. 이길 자신 있어?”
홍지호의 이름이 나오자 장연철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흥.”
CP가 나간 뒤 장연철은 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며 코웃음을 쳤다.
CP까지 달았으면서 순진해 빠졌기는.
세상에는 오히려 대마이기에 쉽게 죽는 경우가 흔하다.
장연철은 자신이 있었다.
‘내가 예전에 실패한 건 PD, 작가 모두 입봉에 배우도 죄다 신인이라는 녀석의 이점 때문이었어.’
일종의 언더독 효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이현석은 나름 알려진 PD다. 게다가 이번 신작에는 어마어마한 레벨의 톱스타들도 끼고 있다.
언더독은커녕 도전을 받는 위치.
예전처럼 네거티브 전략에 초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선 좋은 카드가 있지.’
멍청하게도 이현석은 보이그룹의 팬덤이 얼마나 무서운지 감을 잡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것부터 살짝 밀어주면 그만이다.
장연철이 히죽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
“오······!”
[대단하군······!]나와 김철 선배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1차 티저의 반응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와 김철 선배는 아직까지 『로켓맨』의 팬덤을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등지의 막장 타령을 한번 훑어본 김철 선배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현석아. 어쩌면 우리는 정말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건지도 모르겠다!]“맞습니다. 지금처럼 막장도를 올리기 쉬운 상황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쯤 되자 항상 부드러운 촬영을 고집하던 나도 조금은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연기를 하지 마십시오.”
내가 새로이 이도나와 홍지호에게 내린 지시는 이랬다.
둘이 눈을 깜박였다.
“네?”
“그냥 두 분 평소 하듯 행동하시라는 겁니다. 분위기 타서 조금 과장되어도 좋습니다. 캐릭터만 무너지지 않는다면요.”
“······.”
이도나는 나를 괴상한 눈으로 보다가 서예린 작가의 표정을 보고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반면 홍지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요, 감독님······?”
나는 그의 당혹스런 시선을 흘려 넘기며 촬영에 집중했다.
가벼운 참견도 더했다.
“이도나 씨. 거기서 왜 팔이 멈췄습니까? 평소라면 멈춥니까? ···아니라고요? 그럼 멈추지 마십시오. 발길질을 했으면 주먹질도 나가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컷. 홍지호 씨, 움찔거리며 대비하시는 거 카메라에 다 찍힙니다. 완전히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처럼 반응해주십시오. ···그거 아닙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네, 다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서로 웬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척수반사에 가까운 느낌으로 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닙니까? 사실 둘이 친합니까? 아니라고요? 그럼 다시 해봅시다.”
“홍지호 씨, 아니, 김성재 박사. 눈앞에 있는 건 지질학자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는 초끈이론 신봉자조차 이보다 끔찍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더 해봅시다.”
“거 보십시오, 하면 되잖습니까? 계속 갑시다. ···해가 졌다고요? 그럼 조명 켜고 조금만 더 해봅시다.”
이후의 촬영은 꽤 순조로웠다.
두 주연에게서는 언제 헤맸냐는 듯 그야말로 톡톡 튀는 건질 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잘 안 되면 계속 반복시키면 됐다. 그럼 결국엔 만족스런 씬이 나왔다.
과연 톱배우들은 다르군.
이래서 비싼 배우 쓰는구나 싶다.
“허허······.”
촬영 중 찾아온 나이 든 인상의 중년인은 그런 광경이 마냥 신기한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것밖에 없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멋대로 찾아왔는데 내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죠.”
내가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건네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박진태 실장.
이도나와 홍지호라는 양대 톱스타를 발굴해 여기까지 키워낸 주역이다.
엄밀히 말해 현재 소속사인 루브도가 여기까지 성장한 건 반 이상 눈앞의 상대의 공로나 다름없다.
···뭐, 바꿔 말하자면 그런 박진태가 아직도 겨우 실장이라는 게 회사 꼴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도나랑 지호 같이 데려가신다고 할 때는 조금 걱정했는데··· 허튼 생각이었군요. 훌륭하십니다.”
박진태가 껄껄 웃었다.
어째선지 기진맥진해있던 홍지호가 그런 박진태를 가재눈을 뜨고 째려본다.
“기왕 오셨으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제작발표회 일정이 잡혔습니다.”
“아, 저희가 힘을 좀 써야겠군요! 걱정 마십시오.”
최근의 제작발표회는 대개 화려하다.
보통 호텔을 대절하고, 기자를 부르고, 배우의 팬클럽에서 보낸 쌀이 수 톤에서 수십 톤가량 쌓이곤 한다.
밥그릇이 나뉘었으니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홍보효과를 누려보려는 발악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연구일지』의 제작발표회는 방송국 대기실에서 조촐하게 열 예정입니다.”
“예······?”
거진 10년 전쯤에야 통했을 법한 이야기에 박진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
#
촬영이 이어지며 어느덧 첫 방송 날짜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타협 없는 촬영, 철저한 포스트 작업.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완벽해.]김철 선배가 침음성을 냈다.
[그런데도 어째 불안하구만.]“···선배님도 그러십니까?”
[오냐. 옛날에 가진 돈 죄다 쏟아붓고 알거지가 된 상태로 개봉 기다릴 때보다 더하다.]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진인사대천명입니다.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기다릴 밖에요.”
괜찮겠지.
뭐. 근래에 딱히 재수 없는 일도 없었고, 생각대로 풀릴 거다.
그렇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던 중이었다.
“응?”
그 때였다.
내 앞에 최근 들어 볼 일이 없던 메시지 창이 떠오른 건.
#
얼마 전, 일본에서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사건이 있었다.
드물게도 신인이 쓴 SF 계열의 장르소설이 놀라운 돌풍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라선 것이다.
“근래 SF 장르는 하나의 불모지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쓰실 수 있으셨습니까?”
인터뷰어가 감탄한 어조로 물었다.
시라카와 사이토라는 이름의 이 신인 작가는 조금쯤 거만해져도 납득할 수준임에도 줄곧 겸손을 유지했다.
“이 글은 제 힘으로 쓴 게 아닙니다. 드라마 『연극처럼 살다』에 큰 감명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 분명 한국 드라마인······.”
“그렇습니다.”
사이토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운 작품입니다. 보지 못하신 분은 꼭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연극처럼 살다』는 사이토의 언급으로 일순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간 드라마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지만 서브컬쳐를 주로 향유하는, 일종의 오타쿠 계층에게는 달랐던 까닭이다.
쉽게 뭉뚱그릴 수는 없지만 일본의 서브컬쳐 쪽은 비교적 우익, 혐한 성향을 쉽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서브컬쳐의 신성이라고 생각했던 작가가 한국의 드라마를 칭송하자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 재일w
– 실망이다. 좋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 똥 같은 한국 드라마나 빠는 놈이었다니.
하지만 당연히도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 미쳤는데? 이건 신의 작품이다.
– 속는 셈 치고 15화까지만 봐둬.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테니.
– 떡밥이 넘쳐흐른다. 이바 이후로 이렇게 즐겁기는 간만이야.
이들은 통상적인 드라마 팬들보다 인터넷상의 세력에서 훨씬 막강했고, 더해 압도적으로 분석적이었다.
이들은 거의 매 화를 낱낱이 해체하여 복선을 찾아내고 가설을 세우고 설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30화 이후의 군상극과 결말에 관해서는 수십 가지에 달하는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시라카와 사이토는 그들과 어울려 설정을 논하기도 했고, 종종 이유 없이 욕하고 비웃는 넷우익들과 싸우기도 했다.
신상이 드러나 있는 그는 쉽사리 표적이 되어 욕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작 이런 걸로 은혜를 갚을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이토는 뭐라도 히키코모리였던 자신을 한 사람의 작가로 만들어준 데 대한 보은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단 그가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연극처럼 살다』는 일본 내에서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현석 프로듀서라고 했던가. 이 정도면 약간은 보답이 되었겠지.’
사이토의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다.
분명 기뻐할 것이다.
#
『해외 방영으로 종영된 드라마의 수치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전체 시청자 중 ‘연극처럼 살다’를 막장으로 생각하는 비율이 5%로 감소했습니다.』
“······.”
“···망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