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70)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김철 선배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왜, 최근 들어 설이 성격이 갑자기 변했잖습니까?”
내가 말했다.
“전 그게 자연스레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설이의 태도는 예전부터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뭐. 사실 그런 걸 떠나서 전에 시상식에서 한 발언, 특히 ‘쫓겨났다’는 키워드부터가 미래의 나를 모른다면 나올 수 없을 말이다.
당시 내 긴가민가함은 비로소 확신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한참 뒤 다시 만났을 때는 뭐··· 그랬다.
“기억의 유무를 떠나 아예 사람이 통째로 바뀐 것 같은 모습이었죠.”
당시 내 기분은 여러모로 기묘했다.
[···너 별로 신경 안 썼었잖냐?]침묵하던 선배가 간신히 운을 뗐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척을 했습니다. 주변의 모든 걸 의심하고 가설을 세워봐야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면 왜 나한테는······.]“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선배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주변을 모두 의심해 봐야 했습니다.”
[······.]비로소 김철 선배의 표정이 변했다. 멍하니 벌린 입이 서서히 다물어지고 눈썹과 입꼬리가 축 늘어진다.
애써 담담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가장 먼저 생각했던 가능성은 당연히 이 망할 물건이었습니다.”
하나가 있다면 둘도 있을 수 있다.
생각하기 싫은 가정이었지만, 설이 역시 어떠한 목적으로 회귀를 했다가 그걸 이루지 못하고 ‘끔찍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참 열심히도 부정하더군요. 뭐라더라, ‘회귀’를 한건 오직 저 뿐이라나요.”
보통 열심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사용자.』······.
내가 의심을 갖기 시작하자 메시지 창은 김철 선배의 사각에서 수시로 떠올라 내 인내심을 시험했다.
나는 일단 반만 믿기로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현재 설이의 성격이 변한 건 나와 관계가 있나?’
[···대답은?]“한참을 침묵하다가 답변할 수 없는 사항이라더군요.”
얼추 가닥을 잡기에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저렇게까지 부정하는 주제에 관계없으면 없다고 자르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저와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고, 과연 무엇이 영향을 끼쳤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망망대해를 뒤지는 기분이었다.
시상식 이후 나는 설이와 두 달 가까이 만나지 못했고, 그 시기에 내가 벌인 일은 쓸데없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나 『연극처럼 살다』가 종반부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해하고 흔들리던 설이의 모습이었다.
“어렴풋이 『연극처럼』이 끝난 것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갔습니다.”
하지만 뭔가 문제인지 모르니 닥치는 대로 시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종영이 문제인가 해서 바로 차기작에 들어갔고, 배역이 문제인가 해서 설이를 본래 『연구일지』에서 맡았어야 할 역에 꽂아 넣었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 수를 써봤다. 선후가 바뀐 얘기긴 하지만 다른 피디의 작품에 출연하도록 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별반 소득은 없었다.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소식이 무척이나 생뚱맞은 데서 들려온 게 문제였지만.
“네, 여기 생뚱맞은 사람입니다!”
한유미가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들었다. 김철 선배와 눈을 맞춘 채로.
선배가 느릿하게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연구일지』가 크랭크인에 들어간 시기와 맞물려 묘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모양입니다.”
[······.]나로서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지만 본인의 혼란은 더했다.
“한 몇 주간은 머리가 너무 뒤죽박죽이고 깨질 것 같았어요.”
한유미가 뺨을 긁적였다.
“참다못해 이 피디님께 전화 드려서 도와주십사 펑펑 울었지 뭐예요. 온갖 횡설수설을 다 하면서.”
한유미가 좀 미쳤었죠, 하고 헤실거리는 반면 나는 지금도 웃기가 뭐했다.
당시 그녀의 몰골은 그 정도였다.
[그··· 왜 하필 이 녀석에게? 다른 의지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까?]김철 선배는 나 이외의 인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스로가 몹시 어색한 얼굴이었다.
한유미가 빙긋 웃었다.
“없었어요.”
[······.]김철 선배가 눈을 끔벅이는 사이 내가 말을 돌렸다.
“뭐, 그래서 제 가설로는 설이랑 유미 씨가 일종의··· 바톤터치를 한 거 같습니다.”
이유는 몇 가지 가설이 있지만 아마 내가 촬영에 들어간 드라마가 관련되어 있을 테고, 설이의 예를 봐서는 종영과 동시에 기억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무척이나 제정신이 아닌 소리로 들렸다.
어쩌면 막장은 생각보다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후우.”
“그렇게까지 한숨 쉬시면 조금 마음이 아픈데요.”
한유미가 투덜거렸다.
“뭐, 그쵸. 당연히 이설 씨가 좋으시겠죠. 어차피 전 항상 밀려서 2등이었으니까요.”
“거의 동격이었잖습니까.”
침울한 표정으로 땅을 긁는다.
“피디님, 그거 아세요? 보통 짜장면과 짬뽕을 고르는 걸 희대의 난제처럼 표현하지만 사실 전자를 고르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거?”
“···아뇨.”
“이설 씨가 황제펭귄이라면 전 왕펭귄이에요.”
왕펭귄? 그런 것도 있어?
난 적당히 대답했다.
“둘 다 귀엽잖습니까?”
“아마 새끼 때를 못 보셨나 보네요. 진짜 못생겼거든요.”
“······.”
이어 에베레스트와 K2니, 삼겹살과 목살이니, 윈포와 이글혼이니 하는 주저리를 늘어놓는다.
끝이 없을 모양새라 적당히 말을 끊었다.
“뭐, 그래서 아마도 기간 한정으로 저희를 도와주실 유미 씨 되시겠습니다.”
“RPG 게임에서 잠깐 들어왔다가 빠지는 NPC 동료라고 생각해주세요.”
지금이라면 이설 씨보다 레벨도 높다고요, 하고 한유미가 손을 흔들었다.
김철 선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현석아.]“예.”
[네가 지금에 와서 이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건, 나에 대한 의심이 풀린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냐?]“아니오.”
내가 고개를 젓자 선배는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그냥, 뭐.”
내가 웃었다.
“요즘 들어 생각해봤는데 선배님이 절 속이고 계신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어서요.”
[······.]“제자 된 입장으로 뒤통수 한 대쯤 맞아드려야지 어쩌겠습니까.”
눈을 끔벅이던 김철 선배가 느릿하게 머리를 숙였다.
한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디님. 이 분 진짜 우시는데요?”
“···이리 와서 계약 문제나 마저 정리합시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아시다시피 『연구일지』 20화부터는 출연해주셔야 하니까요.”
“죽을 각오로 할게요!”
한유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이미 죽었던가요?”
#
– 걸그룹 『에어리즈』의 유미 씨가 소속사와의 전속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반면 다른 세 멤버는 아직 이렇다 할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어 팬들은 술렁이는 분위깁니다.
– 최악의 경우 『에어리즈』는 맏언니를 잃거나 아예 공중 분해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 소속사는 딱히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모 관계자가 ‘솔직히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 것이 화제가 되어······.
나는 TV를 껐다.
맞은편에는 익숙한 거구의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햐, 사무실 좋네!”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아니지. 이렇게 구질구질한 집구석은 처음 본다, 야.”
김전감 PD가 씩 웃었다.
KBC에 있던 시절 여러 번 신세를 졌던 양반이라 난 그저 한숨만 쉬었다.
···실제로 구질구질한 건 사실이기도 했고.
최대한 예산을 아끼며 크기를 확보하려다 보니 도리가 없었다.
“그래, 회사 이름은 지었고?”
“아직 고민 중입니다.”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야. 방금 테레비만 봐도 기자 놈들 냄새 맡는 거 순식간인데 그럴듯한 이름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긴 그랬다.
나는 새로 부사장 직함을 단 박진태를 좀 더 들볶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김전감 PD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나 다음달에 CP로 승진한다.”
“오, 축하드립니다.”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대신 가볍게 연락을 줬다면 축하할 자리라도 마련했을 텐데 말이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전감 PD가 씩 웃었다.
“그런데 너, 『연극처럼』으로 프랜차이즈를 만들려고 한다는 건 사실이냐?”
“···예, 뭐.”
갑작스런 화제전환에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마빌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말이지?”
맙소사!
이어지는 말에 나는 기절초풍했다.
“말씀드리지만 절대 그 정도로 본격적인 건 아닙니다!”
“어··· 어, 그래.”
김전감 PD가 얼떨떨하게 반응했다.
···생각해보니 아직 그 정도로 입지가 대단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마어마한 공룡이긴 매한가지지만.
“아무튼 사실이긴 하다는 거지?”
김전감 PD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독립은 언제 할 생각이냐?”
“······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회사까지 떡하니 차려놨으니 이제 KBC니 SBC니 하는 방송국에 좌지우지되지 않겠다는 뜻 아니야?”
“······.”
이 양반은 대체 뭐라는 거지.
할 말은 많았지만 나는 일단 아주 기본적인 사항부터 지적했다.
“저기, 여기 연예기획삽니다.”
제작사가 아니다.
“그래. 유지아니 한유미니 네게 필요한 애들 싸그리 끌고 올 연예기획사잖냐.”
김전감 PD가 낄낄댔다.
“미친놈. 피디며 작가며 하나같이 누구누구 사단이니 뻐긴다만 회사 꾸려서 못 박아버리는 건 네가 전무후무할 거다.”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아니, 설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가 어안이 벙벙해있는데 김전감 PD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지아함 뽑은 CG팀 박민호 감독이 애들 모으고 있다.”
“···예?”
“언제 독립할지 말만 해달라는 거야.”
내가 황당한 심정으로 굳어있는데 김전감 PD가 어깨를 으쓱했다.
“덧붙여 지금이라면 곧 CP로 승진할 경력과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PD도 함껜데,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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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일본의 한 가정집.
“···진짜야? 진짜 나도 같이 가도 되는 거야?”
“그래. 허가는 받아뒀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남동생에게 누나, 시라카와 리카 프로듀서가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네 이름도 한국에 제법 알려져 있다고 들었는걸. 이현석 피디님도 나쁘게 보시진 않을 거야.”
“세상에······!”
작가 시라카와 사이토.
누군가와 누군가의 철천지원수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껑충껑충 뛰었다.
끝